2009년 8월 23일, 오늘이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이 거행되는 날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전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의 장례식이라고 들었습니다. 장의위원만도 2371명, 예식에 초대 받은 인사가 모두 2만4천명은 된다고 하니, 초대장 없이 모여드는 민초들까지 합치면 족히 10만의 인파가 물결치는 거대한 고별식이 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면서 동시에 노벨평화상 수상자, 그 임기 5년 동안 '제왕'같은 강력한 대통령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기가 끝난 뒤에도 '의중의 인물'을 '딱' 자리에 앉혀, 현직대통령 못지않은 전직대통령이였습니다. 옛말에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년 가는 세도가 없다”고 하였지만, 민주 사회에서도 '십년 가는 세도'가 있음을 입증하였습니다.
어떤 대통령은 후계자를 잘못 세워 내외가 백담사에 유배를 가기도 하고, 임기가 끝나고 좀 편하게 여생을 즐기려던 참에, “기르던 개에게 손을 물린다”는 일본 속담대로, 의왕구치소나 안양교도소에서 피눈물 나는 세월을 보내야 했던 전직 대통령들도 있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절묘하게 후계자를 선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후계자가 임기를 마치고 얼마 뒤에 자살로서 생을 마감했으니, “전생에 그와 나는 형제였던 것 같다”면서 “나의 반쪽이 떠나간 것 같다”면서 통곡하시더니, 그만 그'동생'을 저승으로 보내고 꼭 87일 만에, “여인숙 하나도 없다”는 황천길을 외롭게 떠나신 셈입니다. 얼마나 상심하셨으면 그토록 속히 그 뒤를 따르셨겠습니까.
유서라도 한 장 있어서 “내가 죽거든 5·18을 기념하는 망월동 묘지에 누울 자리를 마련하라”고 하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동작동에 대통령 묘역으로 결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김대중을 이제부터는 호남사람으로만 알지 말라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인이다” 그런 뜻이 밑에 깔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잘 된 일입니다. 앞으로는 '호남인들의, 호남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호남인들만의 김대중'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두고 보세요. 앞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한국인은 없을 겁니다. 공화국을 세우고 공화국을 지킨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이승만 전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고, 이 나라 경제 발전의 기초를 다진 박정희 대통령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의 경무대나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던 아홉 분 중에서 '前'자 없이 '대통령'으로만 불리는 분이 두 분뿐이었는데 이제 세 분이 되리라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지 무리하게 해서 되는 일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만일 유서에 김 대통령께서 “나를 동작동에 묻지 말라. 망월동도 싫다. 나를 제발 목포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 하의도에 묻어달라. 그곳이 내가 태어난 고장이다. 나도 이제는 좀 조용히 쉬고 싶다”라고 하셨다면 더욱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을 듯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작동의 대통령 묘역에는 자리가 없어서 대전 국립묘지로 가실 수밖에 없었다는데, 유족 측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두 대통령이 누워계신 사이에 비비고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바다가 보이는 넓은 땅에서 편히 쉬실 수도 있었을 텐데! 소인들이 대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저지르는 일들도 적지 않은 인간세상이라고 생각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영원한 나라로 보내면서 저도 착잡한 심정입니다. 영국시인 토마스 그레이가 '교회당 뒤뜰에서 적은 만가'에서 '영광의 길 가다보면 무덤 있을 뿐'이라고 읊으면서 탄식한 바 있습니다. 옛날 부흥회에서 많이 부르던 '허사가'의 일절이 이렇습니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오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사람이란 돈이 많아도,지체가 높아도,오래 살아도,고래등 같은 크고 드높고 웅장한 집을 짓고 살아도 다 소용없습니다. 죽음 앞에는 모두 한바탕 봄날의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토지 많아 무엇해 나 죽은 후에 일평 장지 관 한 개 족치 않으랴”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죽은 뒤에 훌륭한 비석을 세우고 거기 적힌 문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일단 무덤에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무덤에 들어갔다 다시 나와서 자신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의 미사여구를 읽어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천주교 신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한 나라가 있고, 영원한 생명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지요. 김 대통령께서는 '사도신경'에 있는 대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또한 믿으실 것입니다. 영원의 나라로 가신 뒤에는 생전의 김 대통령 덕에 잘된 사람들은 좀 잊으시고, 김 대통령 눈 밖에 나서 출세의 길이 꽉 막혀 고생만 하다가 이젠 나이만 잔뜩 먹고, 쓸모없게 된 그 많은 호남의 재사들을 기억하시고, 동정하시고, 가능하시다면, 좀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원한 평강을 누리소서.
김동길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