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행9:8-22)
2025.2.23,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지난 주간에 우리교회 성도님들 몇 분과 함께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성지순례 기간 동안 은혜 받은 이야기들을 앞으로 차츰 나눌 기회들이 있을 것이다. 이번에 방문한 곳 중에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라는 곳이 있다. 피렌체에는 13세기 이태리가 낳은 천제 소설가 단테(Durante, 1265-1321)의 생가가 있다.
단테의 대표작인 “신곡”의 “지옥편”에 보면, 35세의 단테가 길 안내자이지 스승인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입구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옥의 문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로 들어오는 자들아”
단테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이 장면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Rodin)이 “지옥의 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의 맨 위부분에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생각에 잠긴 사람의 조각품이 있다. 후에 로댕이 이 부분만 별도로 다시 크게 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옥 문 앞 앉아 있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시험점수? 어느 주식을 살까에 대한 고민? 아니면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에 대한 고민?.…. 최소한 이런 세상적인 것들은 아닐 것이다. 아마 지나온 삶에 대한 회고나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또는 살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모두는 매 순간마다 평생에 단 한번만 허락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숨을 쉬는 모든 순간은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가의도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보다 소중하다. 이 귀한 시간들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어떤 사람은 발등에 떨어진 불같은 절박한 삶의 문제들(긴급한 질병, 극한 재정의 혼란, 입시, 진로, 갈등 등) 때문에 “어떡하지?”를 연발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은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치스러운 질문이나 먼 나라의 일처럼 여기기도 한다. 상황이 급박하고 마음이 분주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떡하지?”라는 말을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자체가 이미 좋든 싫든(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중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들이 조금만 더 깊이 고민하면서 생각해 보면, 이 질문에 대답은 분명하다. 그것은 영원한 것, 최소한 내 생명을 다 투자하고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영원하고, 내 생명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이 무엇이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우리들 모두는 큰 인생의 방향이든, 또는 매순간의 선택의 순간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과 해답은 빠를수록 좋다. 마침 오늘 설교 후에는 각급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을 축하하는 순서도 있다. 본 설교자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런 고민을 했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본업과 직업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본업이고, 그 본업을 이루는 수단이 직업이다.
로마에 가면 “세 분수 교회((L'Abbazia delle Tre Fontane)”라는 곳이 있다. 세 분수 교회는 사도 바울이 순교를 당했던 곳 위에 세워진 순교기념교회이다. 이곳은 대부분의 성지순례자들이 로마에서 가장 많이 도전을 받고 눈물 흘리게 되는 곳 중의 하나이다. 세 분수라는 명칭은 사도 바울이 참수형을 당한 순간에 잘려진 머리가 세 번 튀면서 굴러갔는데, 머리가 튀는 곳마다 샘이 터졌나왔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면, 그가 복음을 위해서 평생을 살고자 고민하면서 결단을 내렸던 순간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 본문말씀 속에 그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9장은 사도 바울이 청년시절 사울(Saul)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당시에(바울이라는 이름은 후에 개명한 것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을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9장 8-9절 말씀을 보면, 청년 사울은 찬란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 충격으로 인해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9:8-9)
자신이 핍박한 사람들이 믿었던, 예수님을 직접 만났을 때 그가 받았던 충격은 어땠을까?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핍박했던 사람들이 믿었던 예수가 진짜였단 말인가?”
“지금까지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사흘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9장 11절 말씀에 보면,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무슨 기도를 했을까? 전후맥락을 볼 때,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회개와 함께 “이제 지금부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엄청난 고민과 기도였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렇게 고민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방인 선교에 대한 소명을 보여 주셨다(행9:15-16).
그가 어떻게 살기로 고민하고 결심했는지는 회심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회심 후에 “즉시로”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언(전도)했다(행9:19-22).
“1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행9:19-22)
이처럼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해답을 말씀 안에서 찾았던 것은 사도 바울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순교자들, 헌신자들이 모두 그러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나)에게도 동일하다고 확신한다. 우리도 이러한 고민과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해답은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러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아시시(Assisi)의 성자로 알려진 성 프란치스코(Francesco, 1182~1226)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일생을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던 분이다.
사도 바울의 순교현장과 함께 이번 성지순례 기간 동안 본 설교자를 가장 깊은 생각 속에 잠기게 했던 또 하나의 현장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 기념교회 뜰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동상이었다(사진). 이 동상은 프란치스코가 십대 후반의 야심찬 마음으로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고, 풀이 죽은 모습으로 조랑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했다. 동상 앞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듣게 될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후에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 하는 중에 교회를 살리라는 환상을 보고, 하나님을 위해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그런데 그는 로마의 화려한 바티칸 성전 밑에서 구걸하면서 죽어가는 걸인들과 환자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자신이 입었던 옷과 물건들을 다 나눠주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들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고민과 모습을 우리는 마땅히 본받고 실천해야한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사람들은 그를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생애와는 상반되는 엄청난 성전을 복층으로 짓고, 신성시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수도회는 ‘프란치스코회의 재산이 얼마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부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의 순교터 위에 새워진 거대하고 화려한 성 베드로 성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그 후 약 3백여 년 후에 마르틴 루터는 다시 ‘오직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외치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다.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나 성 프란치스코나 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삶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은 모두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했고, 그 문제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을 말씀 안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들도 어떤 상황에 있든지, 매 순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며 기도하자. 그러고 그 해답은 말씀 안에서 찾자. 그 해답이 바로 하나님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십자가 복음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드리자. 이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