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현장부재증명 現場不在證明
대륙에서 왔다는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대륙 즉, 신 나라 왕망 시기에 발행한, 신전 新錢 (오수전 五銖錢과 화천 貨泉)을 헤프게 쓰고 다니며 추종 세력들을 양산 量産 시킨다.
* 화천 貨泉:
왕망 시대에 발행한 화폐로 신전 新錢 또는 왕망전 王莽錢이라고도 한다. 화천은 왕망이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발행한 동전으로 일반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하여 명맥만 유지하였는데, 묘하게도 신나라를 멸망시킨 광무제는 오수전보다 화천을 더 유통하도록 권장한다. 이는 광무제 유수의 출신지가 ‘백수 白水’였는데, 백수 ‘白水’를 합치면 천 ‘泉’자가 된다. 그래서 광무제는 자신의 고향 지명을 의미하는 화천을 애용하라고 명하였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오수전과 화천은 거의 같은 곳에서 동시에 발견되었으며, 대부분이 서해안의 해안가와 남해 부근에서 발굴되었다.
* 사진 - 화천 꾸러미.
* 오수전과 화천의 주요 발굴지
요동 반도의 해안가, 평양, 황해도, 전남 나주, 거문도, 김해패총, 창원 성산패총, 일본 큐슈 등에서 다수 발굴되었다.
이들 유물 발굴지를 살펴보면, 후한에서 탈출한 투후부의 후손과 그 추종 세력들은 산동반도 동쪽의 한반도 즉, 사람이 살만해 보이는 곳은 바닷가와 도서 島嶼 지역을 불문 不問하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샅샅이 뒤집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인적 人跡이 한적한 해안가나 섬에서까지 동전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화폐를 갖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초기 신라 (사로국) 시대는 후한 (後漢, 중국) 과의 교류는 전혀 없다.
후한이 멸망하고 삼국 三國으로 갈라지고 다시, 진나라가 통일하였으나, 그때까지도 150년 이상 신라와 중국 대륙과의 외교적인 접촉은 일절 一切 없다.
중국 대륙의 전한 前漢과 신 新나라가 발행한 대륙의 화폐를 물 쓰듯이 헤프게 사용하면서도 중국 대륙과의 교류는 일절 없었다.
앞뒤가 맞질 않는다.
출신지를 숨기는 이유?
그들은 ‘현장 부재증명’ 現場 不在證明 (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 그 현장에 없었다는 증명 즉, 알리바이 alibi)이 필요했다.
혁명이나 반란이 일어나면 개개인의 잘 잘못은 뒷전이다.
패한 쪽의 친인척은 연좌제 緣坐制로 죽임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며,
그 무리와 함께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연좌제 連坐制가 성립되며 반역도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대륙의 장안에서 수십 년간 당당히 세도를 누리던 투후와 그 일족 또, 그들을 따르던 무리 모두가 본의 아니게 무더기로 반역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추적 병에게 잡힌다면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전제주의 專制主義에서는 반역도는 범죄 중에서도 연좌제 (緣坐制, 連坐制)를 철저히 적용시켜 가장 폭넓게 엄한 처벌을 받는다.
구족 九族을 멸한다.
발본색원 拔本塞源한다. 속된 말로 씨를 말려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출신지를 숨기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가야의 초대 왕비, 허황옥이 김해지역에 출현한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천축국에서 가야로 곧 바로 원항 遠航한 것으로 기술 記述되어 있는데,
그러면,
대륙의 사천성 泗川省 보주에서 득성 得姓한 보주 허씨의 유래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에 대한 해명 解明이나, 관련 논문은 없다.
당시 천축국에서는 성씨 姓氏에 대한 개념 槪念 조차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허황옥 許黃玉이란 성명 자체가 중국의 한자 漢字식 이름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반도에 나타난 시기도 조금씩 다르다.
한꺼번에 동시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차례에 걸쳐 여러 번, 많은 인원(3~4만 명으로 추산)이 김해의 가야로, 신라의 경주로 입국하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황건적의 난으로 후한이 멸망하고 대륙이 분열되어 조조, 유비, 손권 등이 치열히 다투는 위, 촉, 오 삼국시대를 거쳐 다시 중원을 통일시킨, 진 晉나라와 선비족의 천하인 5호 16국 시대를 거쳐, 수나라가 망하는 등 대륙에서 여러 차례 왕조들이 바뀜으로서 가상 假想의 위험성이 사라지고,
5~6세기경 서역 西域의 도래인 渡來人 (훈족) 등의 유입 流入으로 신라의 국력이 급격히 강성해지자 이에 고무된 태종 무열왕 太宗 武烈王 김춘추는 비로소 자신들이 흉노족 출신, 투후 김일제 金日磾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대릉하의 금성부는 금성부 나름대로 정신이 없었다.
동쪽에서는 고구려군이 점차 대릉하 가까이 다가오는 형세라,
어쩔 수없이 금성부를 서쪽의 소릉하 건너편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서쪽은 서쪽대로 후한군 後漢軍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이고,
사로국으로 먼저 간 이주민들은 터를 잡는데,
이런저런 사유로 처음 계획보다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서한동려 남해북악 西漢東麗 南海北岳의 사면초가 四面楚歌 신세다
서쪽의 후한과 동방의 고구려는 인적 人的인 위험 요소이며,
남쪽의 푸른 발해만과 북방의 높은 산과 강들 즉, 자연적 自然的인 험난한 지형 地形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초원의 삼촌에게 제대로 연락마저 하지 못하였다.
넉 달 전에 두 번이나 연락병을 보내었으나, 연락병은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도망을 갔거나, 죽었거나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초원의 일족은 어디쯤 자리를 잡았는지조차 모르니,
선대 先代들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지만 약 150년이란 세월이 흐른,
7대 代가 지난 지금은 아득하기만 하다.
무작정 연락책을 자꾸 보낼 수도 없었다.
때마침, 초원에서 가마우지 일행이 연락병으로 소식을 전해 오니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서신의 내용은 초원이 사로국 쪽보다 더 심각한 모양이다.
오 년 전,
투후부와는 별도로 하서회랑을 통하여 고비사막으로 피신 避身하여,
먼저 자리 잡은 귀족 일행들이 기존의 본토 흉노인들과 더불어,
한군 漢軍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내용이다.
배신감을 느낀다.
한족에게 떠밀려서 여기까지 도피하였는데, 오히려 그놈들과 친하게 지낸다니,
친인척 사이지만, 그놈들은 자존심도 쓸개도 없는 한심한 놈들이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남 탓만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일단 이곳도 곧 사로국으로 이주할 것이니,
초원의 일은 숙부님과 아우들이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사로국에서 터를 잡고 안정화되면 연락단 聯絡團을 파견하겠습니다>
라는 서신을 연락병에게 주었다.
가마우지 일행은 이틀 후 초원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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