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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申櫶)과 초의
신헌(申櫶, 초명은 申觀鎬, 1811-1884)은 자신의 문집 중에 초의에게 준 여러 명사들의 시문첩을 옮겨 적은 『금당기주(琴堂記珠)』를 남겨, 초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인물이다. 『금당기주』에 실린 여러 글에 대해서는 앞서 다른 글에서 몇 차례 살펴본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신헌은 「초의시집발」과 「초의선사화상찬」, 그리고 「초의대종사탑비명」 등 초의와 관련된 중요한 글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선종과 교종의 이치를 두고 장문의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 이글에서는 신헌과 초의의 교유를 알아보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수창시문과 신헌의 차시를 읽어 보겠다.
신헌과 초의의 교유
먼저 신헌과 초의의 교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신헌은 1866년 8월 2일, 81세를 일기로 초의가 세상을 뜨자 제자 선기(善機) 등의 요청에 따라 「초의선사화상찬(草衣禪師畵像贊)」 병서를 짓는다. 그 글은 이렇다.
내가 일찍이 연영(蓮營)을 맡아 나갔을 적에 스님과 더불어 노닐었다. 뒤에 녹도(鹿島)에 귀양 가자 스님이 산과 바다를 건너와 종유하였는데 또한 두 번을 만났다. 서울로 돌아온 이듬해에도 창랑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게 두터이 대하여 끝내 버리지 않았으니 또한 감사할만 하다. 스님은 불교의 경전에 정심하였다. 일찍이 나와 더불어 선종과 교종이 본시 두 가지 이치가 아님을 토론하였는데, 스님은 이를 몹시 옳게 여기며, 내게 자신이 지은 선문(禪門)의 변이(辨異)에 대한 글을 보여주었다. 나 또한 답한 것이 있다. 스님은 시문에 뛰어났으니, 대개 다산 정약용 공에게서 받은 것이다. 또 서화에도 뛰어났다. 사대부와 더불어 노닐기를 기뻐하였고, 자하 신위와 추사 김정희 등 제공과 특히 친하였다. 또한 근세의 혜원(惠遠)과 관휴(貫休)의 부류이다. 일찍이 두륜산의 광명전(光明殿)에 거처하였고, 법랍이 80세였다. 그 고족 선기(善機) 등이 스님의 영정을 맡겨 보내 내 말을 구하였다. 스님의 깊은 학문과 맑은 모범은 형상으로 비슷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지금 세상에 다시 일으킬 수도 없다. 아! 마침내 이를 위해 쓰고, 다시금 찬한다.
余曾出?蓮營, 與師遊. 後謫居鹿?, 師跋涉嶺海而從焉, 亦再遭. 旣歸京師之翌年, 訪余於滄浪亭, 其厚於余, 而終不遺, 又可感也. 師深於玄典, 嘗與我論禪敎本無二致, 師甚是之. 示余以自著禪門辨異之說. 余亦有所答. 師長於詩文, 盖受於茶山公. 又工於書畵. 喜與士大夫游. 紫霞秋史諸公, 尤善焉. 亦近世之惠遠貫休流也. 嘗居頭輪之光明精藍, 臘八十. 其高足善機等, 委送師之影, 而求余言. 師之邃學淸範, 不可得以形似, 亦不可得以復起今之世. 噫遂爲之書.
신헌은 1843년 11월 15일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로 해남에 내려왔다. 그는 호남으로 내려오기 전부터 초의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초의가 신헌보다 25세가 더 많았다. 당시 신헌은 「증초의순공(贈草衣洵公)」과 「증초의상인(贈草衣上人)」 등의 작품을 지어 인사를 건넸고, 1845년에는 직접 두륜사로 초의를 찾아가 「춘유두륜(春遊頭輪)」과 「초암제증초사(草庵題贈草師)」 2수를 지어 초의에게 주었다. 초의는 뒤에 이 시에 화답하여 10수의 시를 지었다. 이후 서울로 올라간 신헌은 1849년 7월 신원이 분명치 않은 의원을 데려다가 왕을 진찰케 해서 갑작스레 병사에 이르게 한 죄목으로 녹도(鹿島)에 귀양을 간다. 이후 1854년까지 머물게 되는데, 당시 초의는 녹도로 두 번씩이나 신헌을 직접 찾아가 위로하였다.
당시 신헌은 녹도 유배지에서 헝크러진 마음을 추스릴 겸 해서 송나라 때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엮은 『심경(心經)』을 읽고 있었다. 초의는 신헌과 함께 이 책을 읽다가 빌려줄 것을 청해 이듬해 다시 올 때 돌려주었고, 신헌에게 이때 자신의 시집에 발문을 써줄 것을 청하였다. 신헌은 이에 1851년 9월에 『초의시고』에 발문을 써주었다. 1857년 신헌이 해배되어 서울로 올라오자, 이듬해인 1858년 봄에 초의는 다시 서울 한강가의 창랑정(滄浪亭)으로 신헌을 방문했다. 당시 초의는 완당의 영전에 분향하고 제문을 올릴 겸 해서 상경했던 터였다.
또한 두 사람은 당대 불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백파(白坡) 긍선(亘璇, 1767-1852)과의 논쟁에도 함께 참여했다. 윗 글에 따르면 일찍이 두 사람은 선종과 교종이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니라는 점을 두고 토론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있기 전, 백파가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을 살활(殺活)과 체용(體用)의 나뉨을 근거로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한데 대해, 초의는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지어 그 논리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본격적인 비판을 전개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추사도 가담하여 당시 일대 뜨거운 논쟁이 붙었다. 초의는 토론 끝에 자신이 지은 백파 비판의 글을 신헌에게 보여 주었다. 이에 신헌이 다시 이 논의에 뛰어들어 장장 수천 자에 달하는 「여초의선사의순서(與草衣禪師意洵書)」를 보내 초의의 논점 중 의문 나는 점을 비판했다. 워낙 복잡한 논의인데다 필자의 역량을 벗어나는 문제여서 이에 관해서는 여기서 따로 논하지 않는다.
이후 초의는 일지암에 칩거했고, 신헌은 벼슬길에 복귀하여 바쁜 나날을 보냈으므로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1866년 초의가 대둔사 쾌년각에서 81세를 일기로 입적하자 제자들이 신헌을 찾아와 「화상찬」을 부탁했고, 신헌은 평생의 우의를 기려 「화상찬」을 지어주었다. 글 끝에 남긴 찬(贊)에서 신헌은 초의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師來旣空 스님 오심 공이요
其去亦空 떠나심도 공일세.
來空去空 가고 옴이 다 공이나
將亦無同 또한 장차 같지 않네.
一幅丹靑 한 폭의 그림에다
强留神? 풍신(風神) 굳이 남긴데도,
儼然天竺 천축국 엄연하니
本無其? 그 자취 본시 없다.
撈之?之 붙잡고 움키어도
水月松風 물위 달빛 솔바람일세.
師在不在 스님이 있건 없건
孰謂始終 처음과 끝 뉘 말하랴.
모든 법이 다 공(空)한데, 영정으로 그 모습을 남긴대도 본시 없는 자취의 허상을 붙들려는 것일 뿐이니, 스님이 계시고 안 계시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신헌의 이 글은 아모레 퍼시픽 미술관이 소장한 초의선사 진영 상단에도 신헌의 친필로 적혀 있다. 다만 이상한 점은 문집에 실린 것과 달리 초의선사의 입적시 나이를 84세라고 잘못 적었고, 글을 쓴 시기도 초의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을축년(1865) 7월 25일로 적혀 있는 사실이다. 연유를 알 수 없다. 서명란에는 ‘유경도인(留耕道人) 훈찬(薰贊)’이라 적고 그 아래에 금당(琴堂)이란 신헌의 인장을 찍었다. 향후 더 면밀히 살필 점이 있다.
신헌과 초의의 시문 수창
이제 신헌과 초의가 주고 받은 시문을 살펴 보기로 하자. 다음은 신헌이 1843년에 지은 「초의 의순에게 주다(贈草衣洵公)」이다.
頭輪山下轉摩尼 두륜산 아래에서 마니주(摩尼珠)를 굴리니
色色如如影影隨 색색마다 여여(如如)하여 그림자 따라오네.
南來不見曾遐想 멀리서 그리다가 남쪽 와도 못 만나니
奇畵奇文未展時 기이한 그림과 글 아직 보지 못했구려.
추사의 제자였던 신헌은 해남으로 내려오기 전부터 추사를 통해 초의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다. 3구에서 일찍이 품어온 먼 곳을 향한 마음을 남쪽에 와서도 펼쳐 보지 못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헌이 먼저 초의에게 시를 보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한 내용으로 여겨진다. 신헌은 초의의 거처에 들러 그의 기이한 그림과 시문을 펼쳐 보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이 시를 받아본 초의는 답례로 자신이 법제한 차 2,3봉지를 신헌에게 보냈다. 그러자 신헌은 다시 「초의상인에게(贈草衣上人)」란 시를 지어 보냈다.
草衣上山去 초의가 산 위로 떠나가서는
聞居草庵中 초암의 가운데서 산다고 하네.
結草四十年 띠집을 얽은 지 40년인데
往來有淸風 오가는 건 해맑은 바람이라네.
白雲抱石宿 흰 구름 바위 안고 잠을 자노니
細谷沿溪通 좁은 골 시내 따라 길이 통한다.
連床書畵裏 책상에 쌓아둔 서화 속에서
長明一燈紅 붉은 등불 하나가 늘 환하구나.
拾枯以爲? 고목 주워 이것으로 땔감을 삼고
抉芽以爲茗 차싹을 따와서 차를 만든다.
春陰邃?箔 봄 그늘서 발에다 쬐어 말리니
火候適炒鼎 볶는 솥에 화후(火候)가 마침 맞구나.
百煎石間水 바위 틈 솟는 물을 백 번 달여서
點來光澈瀅 차 끓이자 그 빛이 몹시도 맑네.
感君兩三封 그대가 두 세 봉 줌 감사하노니
奇絶出塵逈 빼어남 티끌 세상 벗어났도다.
我來蓮葉界 이내 몸 연잎 세계 들어와 보니
頭輪山邇密 두륜산이 더더욱 가까웁구나.
七寶粧伽藍 칠보로 가람을 단장했어도
一爐淨禪室 일로향실(一爐香室) 선실(禪室)은 정결도 하다.
振衣欲相尋 옷깃 떨쳐 서로를 찾고자 하나
魔累恐自? 마가 끼어 어긋날까 걱정이 되네.
一見山人足 산인의 발자취 한번 보고는
白雲心上出 흰 구름이 마음에서 피어나는 걸.
신헌의 문집은 어지러운 초고 상태여서 워낙에 오자가 적지 않다. 이 시 또한 원문에 미심한 글자가 여럿 된다. 2구의 ‘문거(聞居)’는 ‘문거(聞去)’로 되어 있고, 4구의 첫 글자는 결자인데 의미를 살펴 ‘왕래(往來)’로 채워 넣었다. 20구의 ‘일로(一爐)’는 필사본에는 ‘일로(一?)’로 되어 있는데 오자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신헌은 초의의 일지암에 대해 소문만 들었을 뿐 직접 가보지는 못한 듯하다. 9구부터는 초의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찻잎을 채취해서 발에 펴서 봄 그늘에 말리고, 이후 화후(火候)를 조절하여 솥에서 덖는다. 그리고는 석간수(石間水)로 달여 내오면 빛깔이 투명하여 해맑다고 했다. 이런 차를 두 세 봉지나 보내주니 당장이라도 초의가 머무는 일로향실(一爐香室)로 달려가고픈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음은 「금당기주」에 실린 신헌의 「초의」란 글이다.
내가 일찍이 연영(蓮營) 임소에 있을 적에 대둔사 승려 초의 의순 중부와 함께 두륜산에 놀러가서 운을 뽑아 율시 두 수를 짓고 인하여 초의에게 주었다. 그 뒤 6,7년이 지나 초의가 내 귀양지 거처로 나를 찾아와, 그 시권(詩卷)을 가지고 와서 발문을 청하였다. 그 시권을 뒤져 내 시운에 화답한 시 10수를 얻었는데, 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초의가 내게 대해 각별한 줄을 알았다. 또 그 시는 연천 홍석주 선생과 해거 홍현주 선생, 자하 신위 선생에게 허가받은 바다.
余曾在蓮營任所, 與大芚寺僧艸衣意恂仲孚, 遊頭輪山, 拈韻賦二律, 因贈艸衣. 其後六七年, 艸衣訪余於謫居中, 持其詩卷, 而請跋之. 搜其卷, 得和余韻十首, 卽余初見者. 尤知艸衣??於余. 且其詩爲淵泉洪先生, 海居洪先生, 紫霞申先生所許.
이 글은 이후 두 사람이 반갑게 해후하여 주고 받은 시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신헌이 다시 초의에게 시 두 수를 지어 주었고, 6,7년 뒤에 초의가 자신의 화답시 10수가 포함된 시집에 발문을 요청했다. 먼저 신헌이 초의에게 준 두 수의 시를 살펴본다.
時平?帶樂時休 평소 갖옷 허리띠를 즐거울 땐 풀어두니
山寺雲烟起我遊 산사의 구름 안개 날 일으켜 노닐게 하네.
別有??春以外 이 봄날 저 너머로 따로 성한 기운 있어
元來盤?海之頭 원래부터 바닷가서 다리 뻗고 편히 쉰다.
?祠紀績知回向 선사(禪祠)의 기적비(紀績碑)에 회향함 알겠거니
溪?憑虛覺大浮 허공 기댄 냇가 정자 허망함을 깨닫겠네.
喫惱趙州茶供養 조주(趙州)의 차 공양을 괴롭도록 마시니
相關花柳亦成尤 화류(花柳)와 상관함이 또한 허물 되겠구려.
제목이 「봄에 두륜산을 노닐며(春遊頭輪)」이다. 바쁜 벼슬길의 와중에서 모처럼 대둔사로 놀러온 한갓진 마음을 노래했다. 절 입구의 부도탑과 비림(碑林)에서 이미 이 절을 거쳐간 고승대덕의 자취를 보고 회향하는 마음이 일었는데, 침계루(枕溪樓)를 지나면서는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한 줄을 새삼 깨달았노라고 했다. 절에 와서 초의에게서 차 공양을 실컷 받고 나자, 화류(花柳) 즉 기생들과 풍악 잡히며 노는 것은 오히려 허물이 되겠기에 그만 둔다고 말한 내용이다.
두 번째 시는 앞서의 운자로 다시 지은 「초암에 제하여 초의스님에게 주다(草庵題贈草師)」이다. 이때 신헌은 초의를 따라 일지암까지 올라갔던 모양이다.
君寄?林是貫休 선림(禪林)에 기탁하니 그대 바로 관휴(貫休)인데
平生喜與士夫遊 평생에 사대부와 함께 노님 기뻐했지.
貝徑深悟空中色 공즉시색(空卽是色) 깊은 이치 불경에서 깨닫고는
?屋移居最上頭 산꼭대기 높은 곳에 띠집 지어 옮겨 사네.
佛土過來求極樂 부처님 땅 지나와서 극락을 구하려니
吾身忘却在閻浮 내 몸이 염부제(閻浮提)에 있는 줄도 잊었다오.
若逢人世淵明輩 세상에서 만약에 도연명 무리 만난다면
三笑溪橋孰更尤 시내 다리 세 번 웃음 뉘 다시 허물하리.
초의를 진나라 때 도연명 등과 사귀었던 승려 혜원(惠遠)과 관휴(貫休) 등에 견주었다. 이어 8구의 삼소(三笑)는 진(晉)나라 때 승려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적에 손님을 전송하더라도 호계(虎溪)를 건너는 법이 없었는데, 도연명과 육수정(陸修靜) 등이 방문했을 적에는 이야기에 팔려 저도 몰래 호계를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초의가 신헌의 시 2수에 화답한 10수는 『초의시집』에 「삼가 우석(于石) 신공(申公)께서 주신 시에 화답하다(奉和于石申公見贈)」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지면 관계상 읽지 않는다. 신헌은 또 1837년 초의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올 때 지은 금강산 시첩을 보고 장시인 「차운하여 의순 공의 금강첩에 제하다(次題洵公金剛帖)」를 지어주기도 했다. 이렇듯 신헌과 초의는 처음 만남 이후 차와 시문을 매개로 한 교유를 줄곧 이어갔다.
신헌의 차시
이제 신헌의 문집 속에 남은 차시를 살펴, 그의 차생활에 대해 알아보겠다. 신헌이 젊은 시절에 쓴 「벽간소기(壁間小記)」를 보면 거처의 벽에 주문공(朱文公)의 「백록관학규(白鹿館學規)」를 써 붙여 놓고, “아침 차 마시기 전에 20번, 마신 뒤에 20번, 저녁 차 마시기 전 20번, 마신 뒤 20번을 읽는다”고 한 내용이 보인다. 태만해지기 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는데, 이 글에서 그가 젊은 시절부터 아침 저녁으로 차를 즐겨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차를 노래한 한시도 여러 수 남겼다. 다음은 「중유가 차를 보내준 데 감사하며(謝仲猶惠茶)」란 작품이다.
遠來一縫麻 멀리서 삼베 꿰맨 봉지가 오니
中有七斤茶 그 속에 일곱 근의 차가 들었네.
慇勤手自坼 은근하게 손으로 직접 뜯어서
遂令口吻佳 마침내 입맛에 좋게 하였지.
茶味猶可得 차맛이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其趣固難? 그 운치 참으로 얻기 어렵네.
握椒不足比 한줌의 산초도 견줄 수 없고
報瓊猶爲些 패옥으로 갚기는 외려 작다네.
何以繼芳訊 어이해야 꽃다운 소식 이을까
再復興三嗟 다시 거듭 세 번 탄식 일으키누나.
신헌이 17세 나던 1827년 봄에 쓴 시다. 중유(仲猶)는 젊은 시절 벗인 변길(邊佶)이다. 그가 멀리서 차 7근을 보내왔다. 차는 삼베로 만든 주머니에 잘 꿰매어져 있었다. 주머니를 끌러 차를 끓여 마시고, 차맛도 차맛이지만 차를 베주머니에 담아 보낸 그 정성에 감동하는 마음을 적었다. 7구의 악초(握椒)는 『시경』「진풍(陳風)」 「동문지분(東門之?)」에 나온다. 남녀가 어울려 교외로 소풍 나갔다가 산초 한 줌을 선물로 건네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여기서는 벗이 보낸 7근의 차가 『시경』의 산초 한 줌 보다 더 고맙고 귀하다는 뜻이다. 8구의 보경(報瓊)도 『시경』 「위풍(衛風)」의 「모과(木瓜)」에서, “내게 모과를 보내주매, 패옥으로 보답하니.(投我以木瓜, 報之以瓊?)”라고 한 대목에서 따왔다.
앞서 「벽간소기」 뿐 아니라 위 작품을 보더라도 신헌은 초의와 만나기 훨씬 전부터 차에 대해서는 비교적 익숙했던 것이 분명하다. 다음에 읽을 시는 「차를 끓이며(烹茶)」이다. 24세 때 작품이다.
梅前酒後小燈靑 매화 보며 술 마신 뒤 작은 등불 푸른데
??深深擁雪亭 장막은 깊고 깊다 눈 온 정자 둘러있네.
山味一杯分舊雨 산미(山味) 한 잔을 옛 벗과 나누고는
泉香數点付童星 천향(泉香) 몇 점을 동자에게 주노라.
世間事業成恒? 세간의 사업이야 늘상 먹는 밥이 되고
病餘精神註逸經 병 앓은 뒤 정신은 일경(逸經)에 주를 다네.
近日不堪昏似夢 요즘 들어 꿈속처럼 어지러움 힘들더니
塵腸滌盡悅如醒 찌든 내장 씻어내자 술 깬 듯이 기쁘도다.
매화꽃을 앞에 두고 벗과 술자리를 가졌다. 작은 등불 하나 푸르다. 눈쌓인 정자에 장막이 둘러쳐 있다. 산미(山味), 즉 차를 끓여 오랜 벗과 함께 마신다. 그리고는 아이를 시켜 향을 사른다. 돌이켜 보면 세간의 사업이란 것은 하루 세 끼 먹는 밥처럼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병 앓은 뒤 투명한 정신으로 일경(逸經), 즉 옛 경전에 주석을 달며 정신을 추스린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부쩍 멍하게 지내던 나날이었는데, 한 잔 차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찌든 내장을 말끔히 씻어내자, 어리 취한 듯 몽롱하던 정신이 산뜻하게 되돌아온다.
28세 때인 1838년 겨울, 수파산(壽坡山)에 가족과 함께 머물 때 지은 「추려삼십수(楸廬三十首)」 연작 중 제 24수에도 차를 노래한 시가 있다.
建州雙井著茶經 건주차(建州茶)와 쌍정차(雙井茶)는 『다경』에도 나오는데
此物眞堪養性靈 이 물건 참으로 성령(性靈)을 기를만 해.
雪片每當煎處見 차 달일 때 언제나 설편(雪片)이 보이고
松風更擬沸時聽 물 끓을 땐 다시금 솔바람 소리 들리는 듯.
索居奚止孤愁破 외진 거처 근심을 없애줄뿐 아니라
暮境偏?宿醉醒 노년에 숙취에서 깨는데도 꼭 맞다네.
可愛香芽三數? 어여쁘다 향그런 차 세 겹이나 포장하니
來從去歲玉河星 지난 해 옥하(玉河)에서 보내온 것이라네.
중국에 연행갔던 친지에게서 선물로 받은 중국차에 대해 노래한 작품이다. 1구의 『다경』은 실은 모문석(毛文錫)이 지은 『다보(茶譜)』를 가리킨다. 이 책 속에 건주의 북원차(北苑茶)와 쌍정의 백아차(白芽茶)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 때 구양수가 『귀전록(歸田錄)』에서 “납차(臘茶)는 검주(劍州)와 건주(建州)에서 나고, 초차(草茶)는 양절(兩浙) 지방에서 많이 난다. 양절 지방에서 나는 제품으로는 일주차(日注茶)가 으뜸이다. 경우(景佑) 년간 이후로는 홍주(洪州) 쌍정의 백아차(白芽茶)가 점차 성행했는데 근년에 만든 것은 더더욱 훌륭하다”고 언급했던 바로 그 차다. 아마 이때 선물로 받은 차에 건주와 쌍정의 이름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3,4구는 눈[雪片]을 녹여 찻물을 끓이는데, 물이 끓을 때 송도성(松濤聲)이 이는 것을 묘사한 내용이다. 쓸쓸한 거처에서 묻혀 지내니 고적한 근심을 없애주는 것이 차이고, 나이 들어 간밤의 숙취에서 깨어나게 해주는 것도 차라고 하여, 차와 늘 함께 하는 생활을 노래했다. 중국에서 온 차는 세 겹이나 겹겹이 포장되어 있었던 듯하다. 8구의 옥하(玉河)는 조선 사신들이 머물던 옥하관(玉河館)을 지칭한다.
다음은 전라우수사 시절인 1844년경에 지은 「밤중에 일어나 회포를 적다(夜起書懷)」란 작품이다.
官居半在病吟中 벼슬살이 절반은 병 앓아 신음하니
?海相連合一空 바다 장기(?氣) 잇닿아 온 허공과 합쳐지네.
百壽湯煎茶失水 백수탕(百壽湯) 끓이다가 차는 물을 잃었고
三重帳掩燭搖風 세 겹 장막 닫았어도 등불 바람에 흔들린다.
睡餘??迷鄕夢 잠깬 뒤 구슬피 고향 꿈만 어지러워
年後支離檢已功 세밑에 지리하게 자기 공부 점검한다.
若問公私長處語 공사(公私) 간 좋은 점을 말로 물어 본다면
頭生佛氏白毫同 부처님의 백호광(白毫光)이 생겨남과 한가지리.
당시 신헌은 익숙치 않은 바닷가 생활에 장기(?氣)로 인해 병치레가 잦았던 듯하다. 3구에서는 백수탕(百壽湯)을 끓이다가 차가 물을 잃었다고 했는데, 백수탕은 당나라 소이(蘇?)의 「십육탕품(十六湯品)」에 나오는 말이다. 물이 십비(十沸)를 넘긴 노숙(老熟)한 상태를 가리키며 백발탕(白髮湯)이라고도 한다. 넋놓고 앉았다가 물이 너무 끓어 쇤물이 되는 것도 몰랐다는 말이다. 차를 끓이면서 탕비(湯沸)의 단계까지 가늠하고 있을만큼 차에 대해 상당한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겹이나 되는 장막을 둘러쳐도 웃풍이 스며드는 찬 방에서 꾸다 만 고향 꿈이 슬프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지난 1년 동안의 성과를 점검해 본다. 7,8구에서는 이곳에 와서 지낸 생활에 무슨 좋은 점이 있었느냐고 물어본다면 부처님의 미간에서 백호광(白毫光)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고 했다. 그만큼 묵묵히 자기 내면과 맞대면한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는 의미로 읽었다. 원문의 ‘약문(若問)’은 필사본에 ‘약향(若向)’이라 되어 있고, ‘백호(白毫)’도 ‘백호(白豪)’로 되어 있는데, 문맥으로 바로 잡았다.
이밖에도 「유사(酉史)가 보여주는 시에 차운하여(次酉史示韻)」의 1,2구에서는, “그대와 우리 집서 스무 해를 시 읊으니, 차향과 시경(詩境)으로 몇 번이나 자리했나.(君嘯我家二十年, 茶香詩境幾番筵)”(133면)고 하여, 벗과 더불어 시 지으며 노니는 자리에 늘 차향(茶香)이 함께 했음을 노래한 바 있다. 「낮잠이 한창 달다 일어나 시를 짓고 허소치에게 주다(午睡適?起而試草贈許小痴)」의 1,2구에서도, “낮잠서 갓 깨어나 정신이 해맑은데, 한잔 차가 폐를 맑게 해 기운 가득함 깨닫누나.(午睡初?秋水神, ?茶淸肺覺??)”(139면)라고 한데서도 그의 생활과 늘 함께한 찻자리의 풍경이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신헌은 30대에 금위대장을 지내고,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摠戎使)로 강화도를 수비하고, 병법에 밝아 「민보집설(民堡輯說)」을 엮었으며,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 당시 조선측 수석 대표로 활동한 정치가로 기억된다. 그런 그가 젊은 시절 전라우수사로 해남에 내려와 맺은 초의와의 교분을 통해 우리 차문화사에 기억할만한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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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를 올려 주셨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