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022. 3. 13
寒溪嶺
“결혼 날 잡았는데요...”
그녀는 생각지도 않고 있던 말이 입에서 불쑥 튀어 나오자 조금 멋 적은 듯 빙긋이 웃으며 이제 막 들어와 모자에 살포시 앉은 눈을 털어내고 있는 그에게 다가섰다.
“결혼 날? 언제....”
그녀는 잠시 주춤했다.
“어서 앉기나 해요.”
모자를 받아 탁자 위에 놓은 그녀는 카운터로 가서 두 잔의 양주를 들고 난로 옆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가 온다는 전화 연락은 이미 받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준비는 여전히 없다. 그것은 그가 늘 바라는 바였다. 쓸데없는 준비는 그녀에게 부담을 준다는 평상시의 지론이었다.
짧은 겨울 해가 기울기 시작한 골짜기의 저녁은 늘 조용했다.
그가 가끔 찾아드는 시간은 언제나 그 무렵이었고, 별 할 얘기도 없이 시간을 보내다 어두워지면 다시 들어왔던 방문을 아쉬운 듯 열고 사라졌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득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진한 녹색의 세피아 꽁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의 담배연기가 아직 남아있는 탁자 앞에 몸을 던지고 담배를 피워 물곤 했다.
“누가 결혼 날을 잡았다고?”
언제나 그는 아이를 대하듯 반말이었다.
“추운데 우선 한 잔 들어요.”
그녀는 잠시 자기가 뱉은 말을 잊은 듯 서너 개의 얼음에 잠긴 양주잔을 그의 앞으로 밀어내며 그와 마주앉았다.
“응, 그래 여기가 확실히 춥군.”
반쯤 남는 담배 갑을 주머니에 서 꺼내 놓으며 그는 양주잔을 들고 반쯤 남은 양주를 단숨에 비웠다.
조금 전 그녀에게 던진 질문을 잊은 듯 실내를 휘 둘러보았다.
“이렇게 손님이 없어?”
실내에 단 둘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이런걸요. 손님이 있을리 없지요. 이렇게 눈이 쌓이는 겨울에는 차들이 뜸해요...”
나머지 한잔의 양주잔을 들며 그녀는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겠군. 어쩌나? 혼자 너무 지루하지 않아? 가끔 들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심심치 않을텐데...”
“조금도 심심치 않아요 오히려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더 좋아요."
반쯤 남은 양주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그는 희미한 조명이 겨우 집기들을 밝히고 있는 실내로 다시 시선을 보냈다.
대여섯 평 됨직한 실내에 몇 개의 탁자와 낡은 의자가 석유난로를 가운데 두고 자리 잡고 있었고, 벽에는 한계령의 설경을 담은 유화 한 폭과, 이름도 없는 시화를 넣은 액자가 몇 개 걸려있었다.
“으응?”
카운터 옆에 걸린 액자의 그림이 그의 시선 속으로 파고들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조명 속에서 20호쯤 되어 보이는 그림은 그녀의 초상화란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럼 저 그림이?-
그녀의 눈치는 빨랐다.
“처음 보는 그림이죠?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으응 글쎄. 잘 보이지 않네...”
그는 속으로‘아하! 저 그림이 바로 그 그림이었구나.’
“비슷해요? 가까이 가 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팔을 잡아끌었다.
“보나마나 잘 그렸겠지 뭐.”
“그러지 말고 가까이 가 봐요. 날 닮았는지...”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그녀는 억지로 그의 팔을 당기며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저는 마음에 안 들어요 어쩐지 촌스러워 보이지요?”
“잘 그렸구만...꼭 닮았어. 유명한 화가가 그린 명화인데 마음에 안 들면 되겠나...”
그림앞에서의 빈정거림이었다.
“방에 걸려다 너무 크고 마음에 별로 들지 않고 해서 우선 여기에다 걸었어요. 마음에 안들면 뗴 치울게요.”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에 안들 긴...그린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걸어 놔야지...”
“글쎄...”
그녀는 아리숭한 대답을 남긴 채 그의 팔을 당겨 다시 탁자로 돌아왔다.
“직접 가지고 왔겠지. 그 화가 선생이...”
역시 언짢은 말투로 그는 긴 담배 연기를 내 뱉었다.
“글쎄 내가 시간이 있으면 찾으러 간다고 했는데도 얼마 전 버스를 타고 가져 왔더군요.”
그 화가 선생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 왔다는 그녀의 말에 어떤 조그마한 분노 같은 것이 자신도 모르게 뭉클 치솟아 올랐다. 허전함을 느꼈다.
화가 선생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준다고 자기의 화실로 찾아오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그에게 말 한 것은 거의 일년 전 일이었다.
그림을 좋아하는 그녀는 친구를 따라 화가 선생의 전시회에 갔고, 그곳에서 친구의 소개로 그 화가 선생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얼굴이 이국적이라면서 꼭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싶다고 했다.
그때 그녀와 동행한 친구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화가 선생이었지만 자기에게는 아직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서 빈둥거렸다.
그 후 그녀의 이야기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고 그녀도 초상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관심이 대단하군...그 화가 선생이...”
“글쎄요. 뭐 자기는 이런 환경이 좋다나요. 한계령 고갯길과 골짜기 마다 자욱한 안개가 좋다면서 언젠가 한계령 정경을 화폭에 담고 싶다고 했어요.”
“으응, 그래?”
그는 또 다시 자기의 영역이 조금씩 침식당해가는 야릇한 느낌 속에 묻혔다.
“이곳까지 찾아왔으니 대접을 잘 해 드리지 그랬어...”
“뭐 대접할게 있어요? 소주 한 잔 대접하면서 이야기만 했을 뿐이죠.”
그 화가 선생은 저녁 막차로 양양으로 내려갔고 다음 기회에 이곳에 머물면서 한계령 정경을 화폭에 담겠다고 했단다.
“그럼 언젠가 다시 올라 오겠군.”
“글쎄요. 저는 별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내 시간만 낭비 하는 것 같아서...”
“누가?”
“그 화가 선생.”
“왜?”
“대학 졸업하고 일정한 직업 없이 그림에만 매달려 있는가 봐요.”
그녀가 화가 선생이 퍽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나타냈을 때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가는 그림이 팔려야 먹고살지.”
그의 말투는 계속 퉁명스러웠다.
“그림도 잘 팔리지 않는가 봐요 전시회를 몇 번 열었지만 나가는 작품은 없었어요.
전국 미술 전람회에서 몇 번 입선해 유명해 졌지만 뭐 지방에서 누가 그림에 그렇게 관심을 두나요.“
그녀는 그 화가 선생에 대하여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으응, 걱정이군. 그 화가 선생도 고민이 많겠군.”
“그런 모양이에요. 참, 저녁식사를 준비해야지지요... 한 잔 더 하시면서 좀 기다려요.”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그때서야 화가 선생 이야기를 털고 나서며 카운터로 갔다.
“글쎄, 한 잔 더 할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서며 그녀의 등을 가슴에 살며시 안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반응도 없이 다시 빈 양주잔에 술을 따라 돌아서며 가슴 앞으로 지켜들었다.
“으응, 그래 딱 한 잔만.”
그녀의 앞가슴을 안으며 오래 만에 따스한 정을 느꼈다.
파리한 외등이 켜진 창밖에 눈은 계속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다. 가끔 눈길을 기어오르는 승용차의 불빛이 창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그는 창가로 다가섰다.
한계령을 오르는 큰길에 그레이더가 눈을 밀고 간 자리가 흰 눈에 다시 덮이고 있었다.
-그래, 그때도 이처럼 눈이 내리는 겨울밤이었군!.-
이년 전 겨울밤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그날 밤도 눈이 엄청나게 내렸고 인제를 다녀오는 승용차 안에서 대설 주의보를 들었지만 이미 한계령은 폭설로 변하고 있었다.
와이퍼로 승용차 앞 유리를 밀어내며 한계령을 내려오기 시작한 것은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다.
부친상을 당한 친구를 두고 오기엔 좀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칠 줄 몰랐고 한계령을 넘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그는 상가를 나왔다.
이날따라 대설 주의보 탓인지 눈길의 차들은 무서울 만치 뜸 했다.
눈길에 대한 운전 부담이 스르르 전신을 파고들었다. 그때 그의 머리에 떠 올린 것이 팔부능선에 큰 길 좌측에 있는 외딴 시골집이었고 그 시골집 간판이 무슨 카페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곳에 들려 따끈한 커피라도 한 잔 하고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그 카페 앞까지 내려왔을 때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온통 눈에 덮인 시골집은 겨우 간판만 을시련스럽게 좁은 돌집 둘레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을 뿐이었고 카페의 창문은 이미 카텐으로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있었다.
가끔 한계령을 넘을 때 별 관심 없이 스쳐지나가던 카페였다.
농가를 개량해 만든 카페의 주인이 궁굼 해 언젠가 한번쯤 들려보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아직 한 번도 찾아들지 못했다.
그냥 한계령을 내려 갈 생각을 했지만 쌓이는 눈이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승용차 안에서 꼬박 밤을 지낼 수 없어 그는 혹시나 하며 카페 입구로 차를 집어넣고 차에서 내렸다.
적막. 바로 그것이었다.
도로에서 십여 미터 쯤 떨어졌을까 승용차 한대가 들어 갈 수 있는 길은 이미 차의 흔적이나 사람이 스친 흔적은 없없다.
내린 눈은 발목 위를 훨씬 넘었다.
“계십니까?”
몇 번 카페의 문을 노크했다.
한 참 후에 나타난 사람은 빨간 겨울 세타를 걸친 키 작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정을 듣고 스스럼없이 카페의 불을 밝히고 석유난로를 피워주었다.
그년가 만들어 준 따끈한 커피 한 잔이 몸을 녹혔다
카페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그녀 혼자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양양으로 내려간다는 자기 생각을 잊은 듯 했다.
“바쁘지 않으시면 여기서 하루 쉬고 밝을 때 내려가에요.”
그녀는 친절했다.
“...”
그는 망설였다.
그 사이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겨울 담요 한 장을 난로 옆에 걸쳐 놓고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난로 옆 의자를 당겨 깊숙히 몸을 묻었다. 전신이 피곤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가슴위에는 난로의 온기를 가득 품은 담요 한 장이 덮여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잠에서 깬 한참 후에야 안에서 나왔고 따스한 커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창문이 밝아왔다.
그는 카페 입구에 세워둔 승용차를 덮고 있는 쌓인 눈을 보며 혼자‘허허..’하며 걱정이 찾아들었다.
“한계령도, 미시령도 모두 교통 두절이군요. 지금 아침 뉴스에...”
창가로 다가 선 그녀가 뱉은 말에 그는 다시 난로 옆으로 다가섰다.
이날 오후까지 한계령을 지나는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눈은 조금씩 그 양을 줄여나갔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집에 전화를 했고 그녀에게 아침 점심을 대접받으며 그녀가 내 놓은 양주는 모처럼 눈 속에서의 겨울 분위기를 맛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고향이 대구이고 그곳에서 대학을 마치고 들어간 직장에서는 얼마 후 박 과장인가 하는 사람에게 삶의 추한 요구를 거절하다결국 쫓겨났으며 그간의 퇴직금으로 동해안을 헤매다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지루한 줄 모르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녀는 비록 키는 작지만 이국적인 안면과 안경 뒤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상대방을 매혹시키기 충분했다.
한계령 정상까지 왔다가 빈농가를 보았고, 그녀는 그 농가를 빌려 하나 둘씩 집기를 사들여 아직 완전치 않지만 허름한 쉼터를 만든 것이 이 카페의 시작이라고 서슴없이 말을 토해냈다.
한계령의 눈길이 트인 것은 그 날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쥐꼬리만 한 짧은 겨울의 한나절이었지만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다정한 연인으로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이후 그는 한계령을 지날 때마다 그녀의 카페에 들려 시간을 보냈다. 그녀도 하루 쯤 쉬는 날이면 한 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 양양으로 내려와 겨울 여름의 낙산 해수욕장 모래 위를 같이 거닐었다.
전망이 좋은 해변 가 카페에서도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그런 시간에도 가끔 그녀는 그 화가 선생 이야기를 양념으로 뱉곤 했다.
“참, 누가 결혼 날 잡았다고?‘
그녀가 차려준 저녁이 거의 끝났을 때야 그는 어둡기 전에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그녀의 못소리를 떠 올렸다.
“나, 결혼 날 잡았어요. 아니 그 화가 선생이 급하다고 해서 그쪽에서 먼저...”
“누가?”
그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라셨죠? 어차피 혼자 살 계획이 없을 바에야 한사람 영혼을 구제해 주고 싶었거든요.”
그녀는 그의 놀란 듯 크게 뜬 두 눈을 바라보았다.
“으음...”
그의 신음이 희미한 탁자위로 흘러들었다.
“선생님은 꼭 참석 해 줘야 해요! 저는 초대 할 사람도 없어,”
“으음 그래, 그래야 하겠지...”
그는 자신이 더듬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직감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옷걸이에 걸린 모자를 벗겨 머리위로 쿡 눌러썼다.
“왜요? 가시려고요?”
그녀가 따라 일어서며 옆으로 다가갔다.
“으음, 가야지. 시간이 늦었어. 눈이 떠 쌓이기 전에 내려가야지.”
얼굴에 갑자기 열이 올랐다.
카페 문을 나섰다. 어두워 오기 전에 한계령을 내려가야만 했다. 더 여기 있을 이유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진 듯 카페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시선을 파고 들었다.
“화나셨어요?”
그녀가 뒤따라 나섰다.
“....”
“연락 할 께 꼭 오셔서 축하 해 줘요.”
그가 승용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을 때,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의 귀속을 파고들었다.
시동을 걸며 그는 와이퍼를 작동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엑세레이터를 살며시 밟았다.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이 빽 밀러에서 차츰 사라져간다.
차창 앞 유리창에서 밀려가는 그녀의 얼굴이 지나고 또 지나갔다. 온통 가슴이 텅빈 듯 허전했다.
청첩장도 아닌 결혼 날짜가 적힌 그녀의 편지를 받은 것은 그녀의 카페에 발을 끊은 지 한 달이 넘어서였다.
카페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그날. 그는 카페로 찾아갔다. 그러나 카페는 예전같이 조용했다. 그녀는 침통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교통사고-
그녀의 결혼 상대자가 당한 비보였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야릇한 감정에 함몰되면서 핏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계령 계곡에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아내리는 듯 한 허전함이 그의 가슴 가득 스며들고 있었다.
카페 주방 구석에 아무렇게 세워둔 그녀의 초상화가 갑자기 크게 시선을 파고들었다.
-한계령을 다시 찾아와 하나?-
그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계령을 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