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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0일 수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아폴리나리스 주교 순교자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태중에서 성별하시어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씨는 길에 떨어져 새들에게 먹히고, 돌밭에 떨어져 말라버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숨이 막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복음).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열매는 백 배가 되었다.>
씨를 뿌리는 것은 땅에 생명을 심는 것입니다. 이 작은 생명의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햇볕과 비, 그리고 땅의 재질, 농부의 인내 등 많은 요소가 함께 작용을 해야 합니다. |
초보 농사꾼의 추억
애기 수사님들과 같이 지인들의 땅을 빌려 한 5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얼마나 웃기는지 모릅니다. 밭이랑을 수십 개 만들고 나서 밭이랑 한가운데다가 호박 모종을 심었다가 지나가는 할머니한테 엄청 혼난 적이 있습니다. 고추모종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지지대를 세우고 끈으로 묶어줘야 하는데, 그 지지대 값을 아낀다고 부러진 야구방망이, 우산대 같은 걸 쭉 세워놓으니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고구마 줄기를 두 박스나 사서 심었는데, 나중에 수확을 해보니 총 수확량이 두 박스였습니다.
농사 이거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는 하나하나 겸손하게 이웃 농부 할아버지께 자문을 구했습니다.제가 깨우친 바로는 농사에서 가장 기본이자 키포인트는 좋은 토양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좋은 토양은 아무런 노력 없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를 위해 농부들은 이른 봄부터 엄청 신경을 쓰십니다. 일찌감치 밭 여기저기 겨우내 묵혀둔 퇴비를 왕창 뿌리더군요. 날씨가 조금 풀리면 퇴비와 함께 땅을 완전히 갈아엎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비닐이며 돌들을 골라냅니다. 갖은 정성을 기울인 좋은 토양과 적당한 일조량과 강수량이 합쳐져야 그해 가을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 각자의 마음도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말씀이란 씨앗이 그 좋은 토양 위에 뿌려져 왕성히 성장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전해도 완고하고 닫힌 마음으로 인해 도무지 말씀의 씨가 발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길바닥이나 돌밭과도 같습니다. 영혼의 귀가 닫힌 사람이라 절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일단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발아되고 성장하는 과정이 얼마나 더딘지 모릅니다. 그의 내면은 가시덤불로 가득합니다. 갖은 의혹, 불신을 걷어내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 이해, 수용, 적극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스펀지 같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하느님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그의 삶 전체를 기름지게 만듭니다.
농부이신 주님께서 바라보시고 흐뭇한 미소 지을 ‘좋은 토양’을 우리 내면에 일구어야겠습니다. 매일 하느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The parable of the s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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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0일(수) 음6/17 聖 엘 리 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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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엘리야(Elias) 예언자 |
구약에서부터 재림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며 성조 엘리야 님이시여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
7월20일(수)음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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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김로사 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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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가 된 뒤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 생활로 친정 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님은
1839년 1월 16일 권득인(權得仁) 님등과 함께 체포되셨다.
포청과 형조에서 심문을 받을 때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이시라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셨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는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을 배반할 수는 없다'며 당당히 주장하시고
56세에 순교하신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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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富平)에서 태어난 김성임님은
혼인에 실패한 뒤 서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점쟁이와 재혼하셨다.
이 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하던 김성임님은
1839년 4월 11일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님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님 등과 순교를 결심한 뒤
이미 체포된 남명혁님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셨다.
포청과 형조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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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집을 전전하며 허드렛 일로 연명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을 잃지 않았고 성녀 김성임 마르타 님이시여, 님이 간직하셨던 밝은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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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에 과부가 되어
경기도 봉천(奉天)의 친정으로 돌아온 이매임님은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조카 이정희와 영희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셨다.
이영희님이 동정 생활을 결심하여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4월 초 이매님임은
남명혁, 이광헌님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 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에 감동하여
순교를 결심하셨다.
마침내 4월 11일 자수하여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2세에 순교셨다.
올캐와 어린 조카들을 모두 주님께 인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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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김장금님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님과 친하게 지내셨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님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님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마침내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태중 교우로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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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삼’으로도 불렸던 이광렬님은
명문 양반인 광주 이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22세쯤 형 이광헌님과 함께 입교한 뒤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님 등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며
나 베드로(모방) 신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 등을 맞아들였다.
북경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한 뒤로는 육식을 끊고,
극기와 인내로 동정을 지키며 생활하셨다.
1839년 4월 7일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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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헌 아우구스티노님의 동생으로서 육식을 끊고 엄격히 동정을 지키다가 45세로 순교한 성 이광렬 요한 님이시여 오늘 하루만이라도 작은 희생으로 님의 길에 동참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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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순교자 이영희님은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님의 권면으로
어머니 허계임, 언니 이정희님과 함께 어린 나이에 입교하였다.
성장하면서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이매임님과 함께 살며 신앙 생활을 하셨다.
1839년 김성임, 김 루치아,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일곱 번 형문(刑問)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고모 이매임 데레사님의 인도로 입교한 후 상경하여 고모와 함께 지내다가 김성임, 김 루치아,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수하여 고모, 어머니. 언니, 15세의 어린 질녀까지 순교한 동정 순교자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님이시여 님들의 순교를 기억하는 오늘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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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순교자 김 루치아님은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셨다.
14세 때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고,
부모를 여읜 뒤로는 자신을 받아 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천진한 태도와 한결 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 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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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여읜 뒤로는 교우들 집에서 잔심부름으로 연명하다가 동정 순교자 성녀 김루치아 님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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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원귀임 마리아 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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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순교자 원귀임님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아홉 살 때 서울의 친척집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때 동정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언제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9년 3월 29일 원귀임님이 있던 친척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길거리에서 원귀임을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원귀임님은
정신을 가다듬고 포청으로 끌려가셨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뿐입니다." 하며 배교를 거부하니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원귀임님은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일곱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2세에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아홉살에 고아가 되어 친척 집에서 삯바느질로 연명하면서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피신하는 중에 체포된 후 심문을 받으며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22세의 젊음으로 순교 제단에 봉헌되신 현세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