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감기몸살 때문에 금요일 하루는 목포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독한 약을 먹어서인지 낮시간동안은 거의 자다시피 했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자 그럭저럭 회복되는 듯했다. 짐을 챙겨 삼학도 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제주에 도착한 후에는 버스를 타고 여동생 집으로 갔다. 나무를 옮겨 심어주기로 했는데, 시간이 늦어 할 수 없었다. 동생집에서 푹 쉬고 일요일 아침 식사를 마치자 동생은 종합운동장까지 나를 바래다줬다. 셔틀버스를 타고 행사장에 도착한 후에는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평촌마라톤클럽 박지은씨가 잠시 제주살이 하면서 가입했다는 제주마라닉 부스를 찾았다. 클럽치곤 소규모이지만 다들 친절하고 가족처럼 잘 대해줬다. 사진 몇 장 함께 찍고 후미그룹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가민시계는 GPS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출발신호와 함께 시계버튼을 눌렀는데 기록이 튀었다. 어쩔 수 없다. 2~3km는 감으로 속도를 제어할 수밖에 없다.
바람이 무척 강했다. 대개는 뒤에서 밀어줬지만 수시로 방향을 바꾸며 나를 힘들게 했다. 감귤마라톤 주로인 해안도로의 특징은 계속해서 오르내리막이 파도처럼 반복된다는 점이다. 거친 파도는 하얀 포말을 만들며 도로를 덮쳤다. 피한다고 하지만 몇몇 주자들은 바닷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초반 내 페이스는 사실상 엉망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속도를 낮추면 6분주로 내려앉는 것 같았고, 5분 30초로 올리기도 버겁다. 가슴통증이 나타날 듯 말 듯 하면서 3시간 50분 완주를 점점 어렵게 했다.
일부구간이 200km 울트라마라톤과 겹쳐 160~180km 사이 구간에 안면이 익숙한 주자들 여럿을 만났다. 그들에게 힘내라고 하거나 화이팅을 외쳐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힘들기는 나도 마찬가지니깐...
제주 자치경찰단의 교통통제가 주자에게 너무 고압적이고 원할한 자동차 통행에만 신경 쓰는 것 같았다. 한 주자가 주로를 가로지르는 차량통행을 막아달라고 요청하자 되려 주자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어떤 대회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장면이다. 후진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주자를 겁박하는 것도 다반사다. 코스를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주로 감독도 아니면서 경기를 포기한 것이냐며 계속하여 경적을 울려댔다. 차량을 통제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주자를 통제하고 있었다. 좁은 주로에 수천 명의 주자가 몰리면서 사고를 막기 위해 엄격한 통제가 불가피하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정도가 있는 법이다.
10km까지는 5분 30초 페이스를 겨우 유지한 후 5분 20초 이내로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무척 힘이 들다. 바람 불어 땀이 날 상황이 아님에도 땀이 쏟아졌다. 감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대회와 달리 초반부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이번 대회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고통이 지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프는 1시간 58분에 통과했다. 이제 바람을 안고 가야하는 상황이다. 고군분투하며 30km까지는 버텼다. 그러나 31km 넘어서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6분주로 주저앉으면 약간은 호흡이 편해졌지만 여기저기 쑤시는 고통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4시간 완주라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 수정한 목표조차도 달성하기 어려웠다. 여러 번 뛰었기 때문에 35km쯤 가면 그날 견적이 나오게 되었다. 4시간 5분을 넘어서 들어가겠구나 하는... 오늘은 그저 고향 제주 바다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제주 200km 울트라마라톤 대회(2회 완주)를 회상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한다.
4시간 7분 2초로 236번째 풀코스 대회를 마감한다. 지난주 3시간 47분으로 골인해서 이번에도 당연히 4시간 완주는 쉽게 가능할 것으로 봤다. 기분은 떨떠름하지만 어쩔 것인가? 다음주에 3시간 40분대로 복귀하면 잊힐 텐데...
제주 마라닉클럽에서 주는 김밥과 컵라면으로 대충 허기를 지우고 고맙다는 하직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외지인 참가자에게 주는 귤박스를 들고 목포행 배를 타기 위해 국제터미널로 향했다. 여객선에는 자전거와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로 꽉 찼다. 배안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잠을 청했다. 기상악화로 우회하긴 해도 너무 늦지 않게 목포에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