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철 2일 ·
한 때 <건국전쟁>이란 다큐에서 제가 등장한다고해서 역시 '알아주는 사람들은 반대편에 따로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ㅋㅋ
불행히도 이들은 남의 돈, 특히 세금이라면 마음대로 차를 바꾸고, 사무실을 리모델링하고, 심지어는 빵 커피까지 사먹어야 양이 차는 양아치 심성을 가진 범죄자들이지요.
이런 사람들이 제 입장을 두둔한다며 염려의 전화를 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만, 반면 당시 한강인도교와 피난 민간인의 피해와 관련된 제 판단의 오류를 지적해주신 분이 있으셔서 오늘에서야 명확히 제 잘못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사진은 <인천 1950>에 수록된 사진입니다. <한국전쟁사>에 인도교를 통제했다고 했는데 그러면 민간인들은 어디로 피란을 갔던거야? 의심하던 때 이 사진을 보았던 거지요. 사진이 말하는 진실, 즉 복장이나 멀리 희미하게 내려앉은 철교는 의심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 부유잔교는 6월 28일 파괴되었다"라는 텍스트만 보고 1950년 6월 27일 쯤 찍은 것 같았지요.(한국전쟁사를 보려면 뭔가 기준을 세워놓고 맞춰봐야 하거든요. 지금보아도 죄다 거짓 무용담 같아서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역사연구자들이 한국전쟁사를 연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사진대장 임인식이라는 분의 사진이었습니다. 당시 출판사 사장이었던 상원 후배가 위 사진의 저작권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두 번째 이 사진을 유족들로부터 허가를 받아 사용했습니다. 유족들도 철교 폭파전으로 이해했고 이는 한겨레 <서울엔드>의 기사에서도 반복됩니다. 이 사진에서도 여섯 번째 교각 뒤의 철교는 붕괴된 것이 보입니다. 복장도 여름은 아니고요. 첫 번째 사진과 같은 시기에 찍힌 것으로 판단됩니다.
세 번째 사진은 <다시쓰는 현대사>에 삽입된 사진입니다. 둘째 셋째 모두 첫째 사진을 보고 난 뒤에 발견한 것인데요, 눈꺼풀에 뭔가 씌운 것처럼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 사진 오른 쪽 끝 부분 철교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철교 폭파 후의 사진인 게 분명하지요. 계절도 여름은 아니고요.
네 번째 사진은 강대훈 선생님이 보내오신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입니다. 첫 번째 사진의 원본이네요. 끊어진 철교가 선명히 보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사진은 결정적이네요. 촬영일이 1951년 4월 29일입니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 순서를 기다리며 서있는 코리안"이라고 적고 있네요.
http://archive.history.go.kr/image/viewer.do...
저를 혼란스럽게 했던 다른 글 하나는 "서울엔드 http://www.seouland.com/.../cul.../culture_general/3738.html"였습니다. 여기에 삽입된 사진이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입니다. 마치 1950년 6월 29일 촬영한 것처럼 소개되어 있지만, 파괴된 영등포 쪽 철교 모습은 이 날이 아님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여덟 번째 사진은 1950년 7월 중순인가 폭격 모습인데요, 한강 북단의 철교가 멀쩡했음이 보입니다. 부교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것만으로 부교가 없었다고 단정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사진 속 한강 철교 사이의 부교는 1951년 4월 29일의 모습이므로 1950년 6월 28일 전후로 부교가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피란민이 부교로 건넜다는 판단은 섣부른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시기 사진의 부교 모습으로 본다면 6월 28일 이전에 한강철교 사이의 부교가 있었는지 의심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아직까지 폭파 전후로 한강을 건너는데 부교를 이용했다는 진술은 임인식 사진대장 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군인들은 대부분 철교 위를 지났다고 했고 철교 아래 부교에 대한 증언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면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피란 민간인의 피해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저는 확인된 피해자가 4대의 트럭에 탑승한 76명의 경찰관이었다는 <한국전쟁사>의 기록을 소개하는 것이 주 관심이었습니다.
이외에 전쟁 상황에서 군이 헌병대를 동원하여 군사작전 도로를 통제하는 데 일반 민간인이 통행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가정을 세워봤고, 이를 뒤집을 증거를 아직도 찾지 못했습니다.(폭파 책임자였던 김백일조차 헌병대를 뚫고 가지 못했다고 했는데, 폭파명령을 이미 내린 자여서 이 증언을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만 달리 방법이 없네요.) 당시 폭격 현장을 직접 목격한 증언은 대부분 군인들이나 미군, 종군 기자의 것입니다. 민간인의 증언이 발견되어 공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한강인도교에서는 후퇴하지 못한 자기 군대와 경찰까지 폭파와 작전으로 희생시켰습니다. 이 마당에 인도교에서 민간인이 희생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제가 했다는 것이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민간인 집단학살 범죄를 가려주는 방어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또 뭘까요? 저는 전쟁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을 보면서 이것이 전쟁이 아니라 대규모의 민간인 집단학살 과정에 불과하지 않는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피란민 이동을 막았던 한강 인도교 폭파는 결국 수복 후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 투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이승만 정부가 돌아와 국민에게 그 책임을 지웠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4장
모든 공감:
24회원님, 박만순 및 외 22명
5
좋아요
댓글 달기
복사
공유하기
댓글 더 보기
이승무
어려운 일을 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