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러시모어 산 화강암 절벽에는 미국의 기적을 이룬 네 명의 대통령 흉상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즈벨트, 그리고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미국을 위대하게 했으며,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며 묵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라고 했으며, 제퍼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그 위에 세워진 국가다”라 했고, 루즈벨트는 “어떤 방면에서 일하든 그가 자신의 인생을 보람있게 가꾸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묵상하라고 권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또,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된 우리에게서 믿음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생명은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진행형이기에, 그저 머리로 이해하고 습관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경험하는 능력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적인 신앙과 경험을 통해 몸으로 체험하는 신앙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신앙은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어서, 그 모습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습니다. 하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신앙은 신앙과 삶이 하나로 일치됩니다. 그것은, 신앙의 의미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고 삶 속에서 순종함으로 살아갑니다. 본문의 중풍병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불치의 병에서 치료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꼼짝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중풍병자의 생각을 그 주변 사람들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합심하여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모습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합니다. 우리 같아도 그들의 행위를 보겠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중심 곧, 그들의 믿음을 보신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으려고 했지만, 예수님 앞은 이미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여기서 포기할 겁니다. “다음 기회를 찾자”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이것을 놓치면, 중풍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지붕을 뚫고, 예수님 발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비난받을 일이었지만, 예수님께로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한계에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막 9: 23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믿음의 실천을 예수님이 원하셨던 겁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본문에서 치료받은 중풍병자가 아니라,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네 사람의 행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성도된 우리가 취해야 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한계 앞에서 멈춥니다. 절망 앞에서, 낙심 앞에서, 한계 앞에서 그냥 포기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선택은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제 2024년 마지막의 주일을 보냄에 있어서, 2024년 한 해를 되돌아보며, 2025년을 바라보아야 할 시점에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사람들의 믿음과 행위입니다. 한계 앞에서, 불가능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믿음과 행위입니다. 이 믿음과 행위로 2024년을 잘 마무리하고, 2025년을 활짝 열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중단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실망하거나 낙심치 않는 믿음으로 힘차게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 - 3절을 보시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라고 합니다. 성경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지방을 방문하셨을 때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방을 방문하셨다는 소문이 인근에 퍼지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위로 모였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라고 합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예수님께로 나가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가고 싶어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갈 수 없다는 겁니다. 혼자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온 종일 누워서 천정만 바라보며 지낼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중풍병자의 곁에는 그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네 사람이 선택되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현관을 통해서는 예수님 앞으로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의 지붕을 뜯고, 그 곳으로 중풍병자를 내려서 예수님 앞에 두자는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방법입니다. 마치,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한 것과 같습니다. 모든 군인들은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수심도 낮기에 거대한 군함으로는 상륙할 수 없다고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연합군 뿐 아니라,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륙작전을 하려면, 서해가 아닌 동해라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무모한 것 같고, 불가능한 상륙작전을 맥아더 장군은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첩보와 연합군의 합력 작전등 모든 것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던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나 네 사람이나 모두가 예수님께로 나가면 중풍병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은, 예수님에 대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합니다. 들음에서 시작한 믿음은, 행동으로 실천됩니다. 이들의 믿음은 객관적 지식인 소문이었지만, 그것을 자신들에게 적용함으로 경험적 믿음이 되었습니다. 본문의 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중심이 되는 사람은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치료자이신 예수님이고, 또 하나는, 중풍병자와 네 사람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성경은, 중풍병자와 네 사람을 알리고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5: 39을 보시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치유된 것을 알기 위해 본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기 위해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대신할 진리나 경전, 종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를 만나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없는 곳에는 은혜도, 구원도, 축복도, 치유도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도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시며, 성경의 핵심이 되신 예수님만 바라고, 예수님만 의지하며, 예수님과 함께 2025년의 새 해를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5절을 보시면,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참된 믿음은 현실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라고 합니다.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로 왔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에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에 도저히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는 상황에 부딪혔습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도 중풍병자와 그를 돕는 네 사람의 마음처럼,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여기서, 이들이 선택할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가는 거냐?였습니다. 하지만, 이쯤되면, 대부분 단념하고 그냥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는, 최대한으로 가능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6.25전쟁에서 낙동강 이남만 남은 우리나라는 두 가지의 선택에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라를 포기하고 망명하는 것과 또 하나는 끝까지 싸워서 다시 북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북진하기에는 너무 밀려와 있었습니다. 이 때,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이남만 남은 우리나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곳곳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국군과 우리나라의 지형학적 위치를 통해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회복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가능한 방법을 생각했고, 그것이 아군이든 적군이든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외면한 인천상륙작전이었습니다. 여러분, 진실된 믿음은 현실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그것은, “노력은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도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와 네 사람의 이러한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중풍병자야 네 병이 나았다”라고 하셨습니까? 이것은 차후의 말입니다. 이보다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본문 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곧, 그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죄를 사해 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병자를 치유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까? 또,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사 53: 5을 보시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겁니다. 본문의 중풍병자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나 오늘의 우리나 모두가 근원적으로 해결 받아야 할 것은, 죄 사함입니다. 병이든 양식이든 의복이든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삶 전체를 볼 때는 해결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 사함만큼은 삶 전체의 어떤 상황으로든 해결할 수 없습니다. 법정에서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육신의 한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해결해 주신 겁니다. 중풍 병자를 돕는 네 사람이 지붕을 뜯어낼 때, 그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흙 부스러기와 먼지를 뒤집어씀으로 민폐를 끼쳤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음으로 행한 그들의 행위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높이 샀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예수님께서 높이 살 수 있는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 이들의 믿음은, 일반적인 생각의 한계, 상황의 한계를 초월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현실의 한계를 초월하는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고정관념 안에서만 행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논리가 주는 확신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는 겁니다. 밝아오는 2025년에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의 현실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높이 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 - 12을 보시면,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변화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이라고 합니다. 지붕을 뚫고 매달려서 내려온 중풍병자가 제 발로 일어나서 모든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걸어서 나갔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중풍병자의 병을 치유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중풍병자의 치료가 주변에서 지켜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했습니다. 이를 보면, 사람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보고 하나님이 위대하다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성도들이 주의 이름을 외치면서도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모습으로 있기에,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이들은 많아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사는 이들은 심히 적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나 모세 때나 다윗 때나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았고 병에서 놓임을 받는 은혜를 입었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인생을 실패자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인생의 성공자로 인생역전을 이룬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중풍병자의 불치병인 중풍병을 완치시킨 것처럼,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생각과 우리의 능력과 방법의 한계를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밝아오는 2025년에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