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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요새 핫하신 향봉스님이라는 분이 윤회는 없다라고 주장하시며 예를 드신 게 교미시 수억마리 정자중 단 하나의 정자만 생존한다면서 그게 윤회가 없다는 증거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공부하고 또 교수님께서 과거 영상에서 가르침 주셨듯이 난자와 정자가 합쳐질때 새로운 집을 찾는 윤회하는 존재가 찾아온다..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만.. 문득 궁금한것이.. 그럼 1등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주하는 수십억 정자들은 윤회하는 중생으로 보지 않는게 맞는걸까요.. 교수님이라면 답을 알려주실거 같아서 또 질문 올립니다. .().
그 향봉스님이라는 분은 다른 스님들 험담은 그렇다 치더라도.. 좀 너무 본인주장을 근거없이 하시는거 같았습니다.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본생경에도 부처님 과거전생 이야기가 있고, 초전법륜경에도
Ñāṇañca pana me dassanaṃ udapādi— ‘akuppā me vimutti [cetovimutti (sī. pī.)],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그러자 다시 나의 내면에 지와 견이 솟아났다. 즉 내 마음의 해탈(心解脫)이 확고부동하며(akuppaa me vimutti), 금생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더 이상의 몸받음(再生)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답변입니다.
결론만 얘기하면, 정자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불전 어디에도 정자가 중생이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초기불전 가운데 <중아함경>을 보면 12연기에서 '식'과 '명색'이 쌍조건(식 ↔ 명색) 관계인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부처님께서 '정자'를 거론하시는데, 이를 모두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 누군가가 명색(名色)의 조건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식(識)을 조건으로 삼는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소위 “식(識)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있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가령 식이 모태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명색이 지금의 이런 몸으로 성장했겠느냐?
아난: 아니옵니다.
부처님: 만일 식이 태(胎)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나가버린다면 명색이 정자(精子)와 만날 수 있었겠느냐?
아난: 만나지 못합니다.
부처님: 아난아 가령 어린 남자아이 혹인 여자아이의 식이 애초에 파괴되어 없어졌는데도 명색이 자라나겠느냐?
아난: 아니옵니다.
부처님: 아난아, 그러므로 이 명색의 인(因)이 되고 집(集)이 되며 근본이 되고 조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식(識)이니라. 왜 그런가? 식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若有問者 名色有何緣 當如是答 緣識也 當知所謂緣識有名色 阿難 若識不入母胎者 有名色成此身耶 答曰 無也 阿難 若識入胎卽出者 名色會精耶 答曰 不會 阿難 若幼童男童女識初斷壞不有者 名色轉增長耶 答曰 不也 阿難 是故當知是名色因․名色習․名色本․名色緣者 謂此識也 所以者何 緣識故則有名色)
아난아 만일 누군가가 식에도 조건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식도 조건을 갖는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만일 누군가가 식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명색을 조건으로 삼는다고 답해야 하느니라. 이른바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만일 식이 명색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말해 식이 명색을 세우거나 명색에 의지하지도 않았는데 식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겪겠느냐?
아난: 아니옵니다.
부처님: 아난아 그러므로 이런 식의 인이 되고 집이 되며 근본이 되고 조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명색이니라. 왜 그런가?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한다.
아난아 이것이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하고, 식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있음”의 의미이니라.
(阿難 若有問者 識有緣耶 當如是答 識亦有緣 若有問者 識有何緣 當如是答 緣名色也 當知所謂緣名色有識 阿難 若識不得名色 若識不立․不倚名色者 識寧有生․有老․有病․有死․有苦耶 答曰 無也 阿難 是故當知是識因․識習․識本․識緣者 謂此名色也 所以者何 緣名色故則有識 阿難 是爲緣名色有識 緣識亦有名色) - <中阿含經>, 대정장1, pp.579c~580a.
12연기에서 3번째 지분인 '식(識)'이, 남녀의 Sex하는 모습을 보고서 여인의 태 속에 들어와 임신되는 과정을 묘사한 경문입니다. 이 경문에서는 먼저 "식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이 있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즉, 남녀가 Sex를 하고 있고, 여인이 가임기라고 하더라도 '식(識: 전생에 죽은 귀신의 찰나생멸하는 마음)'이 그 자리에 와 있지 않으면 수정란이 생겨도 그냥 배출되며, 명색으로 자라나지 못한다(식이 없으면 명색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 명색을 조건으로 삼아 식이 존재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즉, 남녀가 Sex를 하고 있고 '식(識: 전생에 죽은 귀신의 찰나생멸하는 마음)'이 그 자리에 와 있어도 여인이 가임기가 아니기에 명색(초기 태아의 심신 복합체)으로 자라날 수정란이 생기지 않으면, 그 식이 여인의 자궁에 안착하지 못하여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상의 경문에서 보듯이 12연기설에는 '식'의 입태와 자궁 속에서의 성장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또 <중아함경>의 다음과 같은 경문 역시 죽은 귀신이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가 임신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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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께서는 찬탄하시어 말씀하시었다.
"착하고 착하다. 나는 너희들을 바르게 건너주려고 끝까지 사물의 이치를 알아 괴로움도 없고 흥분도 없으며, 언제나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 법에 대해서 바른 지혜로 알고 바른 지혜로 보며, 바른 지혜로 깨닫게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이전에 '나는 너희들을 위해 법을 설명하여 끝까지 사물의 이치를 알아 괴로워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언제나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 법에 대해서 바른 지혜로 알고 바른 지혜로 보며, 바른 지혜로 깨닫게 하리라.'고 말한 것이니라.
다시 3사(事)가 모이어 비로소 어머니 태에 들어간다.①아버지 어머니가 한 곳에 모이고, ②어머니가 [배란기가 되어] 가득한 정자(精)를 참고 견디며, ③향음(香陰, 전생에 죽은 귀신의 마음 = 식[識])이 이미 와 있는 것이다. 이 3사가 서로 모이어 비로소 어머니 태에 들어가며, 어머니 태는 열달 동안 가지고 있다가 다시 낳는다. 낳은 뒤에는 피로써 기르나니, 피란 이 거룩한 법에서는 어머니 <젖>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 다음에는 모든 근(根)이 갈수록 커지고 갈수록 성취되니, 밥이나 보리가루를 먹게 되고, 소유(蘇油)를 몸에 바른다. 그는 눈으로 빛깔을 보아 좋은 빛깔은 즐겨하고, 나쁜 빛깔을 미워하며, 몸을 세우지 않고 못된 마음만 생각하여, 마음이 해탈하고 슬기가 해탈하는 참 모양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게서 생기는 착하지 않은 나쁜 법은 멸하고 다하여 남음이 없지 않고, 털리고 무너져 남음이 없지 않나니, 이와 같이 귀·코·혀·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뜻으로 법을 알아 좋은 법은 즐겨하고 나쁜 법은 미워하며, 몸을 세우지 않고 못된 마음만 생각하여, 마음이 해탈하고 슬기가 해탈하는 참 모양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게서 생기는 착하지 않은 나쁜 법을 멸하고 다하여 남이 없게 하지 못하고, 털리고 무너져 남음이 없게 하지 못한다.그는 이와 같이 미워하고 미워하지 않는 감각을 따라 혹은 즐거워하고, 혹은 괴로워하며, 혹은 괴로워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 감각을 즐겨하고 구하고 집착해서 그 감각을 받아들이고, 그 감각을 즐겨하고, 구하고 집착해서 그 감각을 받아들인 뒤에, 만일 즐거움을 깨달으면 이것을 수(受)라 한다. 그래서 수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시름·슬픔·울음·걱정·괴로움의 번민이 생기게 되며, 이리하여 이러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기게 되느니라." (전자아함경 번역문에서 일부 오역 수정)
世尊歎曰:「善哉!善哉!我正御汝等,於畢究竟無煩無熱,恒不變易法,正智所知、正智所見、正智所覺,因此故我向者說,我為汝說法,畢究竟不煩熱,恒不變易法,正智所知、正智所見、正智所覺。復次三事合會入於母胎,父母聚集一處、母滿精堪耐、香陰已至。此三事合會入於母胎,母胎或持九月十月便生,生已以血長養,血者於聖法中,謂是母乳也。彼於後時諸根轉大、根轉成就,食麤飯麨蘇油塗身,彼眼見色,樂著好色、憎惡惡色,不立身念少心心解脫、慧解脫,不知如真,所生惡不善法,不滅盡無餘,不敗壞無餘。如是耳、鼻、舌、身、意知法,樂著好法、憎惡惡法,不立身念少心心解脫、慧解脫,不知如真,所生惡不善法,不滅盡無餘,不敗壞無餘。彼如是隨憎不憎所受覺,或樂或苦或不苦不樂,彼樂彼覺求著受彼覺,彼樂彼覺求著受彼覺已,若樂覺者是為受,彼緣受有有,緣有有生,緣生有老死,愁慼啼哭憂苦懊惱可得生,如是此淳大苦陰生。
여기서 말하는 '③향음(香陰)'은 산스끄리뜨어로 gandharva(乾達婆:楗達婆, 건달바), 빠알리어로 gandhabba의 번역어인데, 앞에 인용했던 12연기에 대한 경문에서 '명색'의 조건인 '식(識)'을 의미합니다. 즉, '향음', '간다르바', '식' 모두 소위 '전생에 죽은 귀신의 마음'입니다. 물론 영혼과 같이 실체가 있는 마음이 아니라, 찰나생멸하면서 상속하는 마음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각자 자기의 뇌 속에서 '찰나생멸하는 나의 식의 흐름(自相續, 자상속)'이, '나의 주의(Attention)'에 수반되어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또 초기불전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는 이런 수태의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세존께서는 경에서 “세 가지 일[三事]이 화합하여 어머니의 태에 들어가게 된다. 부모가 함께 염심(染心)이 있어서 화합하고 어머니의 몸이 알맞으면서 병이 없는 이때와 건달바가 바로 그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 건달바는 그때에 두 가지 마음[二心]이 상호교대로 앞에 나타나 어머니의 태에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세 가지 일이 화합한다고 함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건달바의 셋이 화합하는 것이다.
부모가 다 함께 염심이 있어 화합한다고 함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같이 음욕과 탐내는 마음을 일으켜 함께 합쳐서 만나는 것[合會]을 말하며, 어머니의 몸이 알맞으면서 병이 없는 이때[是時]라고 함은 어머니가 탐욕을 일으켜 몸과 마음이 즐거운 것을 몸이 알맞다고 한다.
지율자(持律者)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탐욕을 일으키므로 해서 몸과 마음이 혼탁(渾濁)해지는 것이 마치 봄ㆍ여름철의 물이 혼탁해져 흐르는 것처럼 스스로가 지닐[自持] 수 없는 것을 몸이 혼탁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배가 깨끗하며 풍(風)ㆍ열(熱)ㆍ담(痰)이 더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병이 없다[無病]고 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9개월 동안이나 10개월 동안에 태아를 맡아 지니면서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是時]란 모든 모읍(母邑)에는 더럽고 좋지 못한 일이 있다. 달마다 항시 핏물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만일 지나치게 많으면 너무 습하기[稀濕] 때문에 수태할 수 없고, 이것이 너무 적어도 건조하기 때문에 역시 수태하지 못한다. 만일 이 핏물이 적지도 많지도 않으면서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아야 비로소 수태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이때라고 하는 것이니, 이 중유가 태 안에 들어가는 때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핏물(血水)이 맨 나중에 두 방울 남아있고 아버지의 정수(精水)가 맨 나중에 한 방울 남아 있다가 차츰차츰 어울려야 비로소 수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건달바가 바로 앞에 나타나 있다고 함은 곧 중유가 이곳에 나타나 있는 것이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면서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다.
이 건달바는 그때에 두 가지 마음이 상호교대로 앞에 나타나 어머니의 태에 들어간다고 함은 건달바가 태에 들어가려 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 사랑과 성내는 두 가지 마음이 상호교대로 앞에 나타나고 일으켜 비로소 태에 들게 되는 것이다.
만일 남자의 중유이면 태에 들어가려 할 때 어머니에 대해서는 사랑을 일으키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성을 내면서 ‘만일 저 장부(丈夫)가 이곳에서 떠나면 나는 이 여인과 교회(交會)해야 겠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한 뒤에는 뒤바뀐 생각이 생겨서 그 장부가 이곳에서 멀리 떠났다고 보고 이윽고 자신이 여인과 화합한다고 보게 되며 부모가 교회하면서 정(精 = 정자)과 혈(血 = 난자)이 나올 때에는 곧 아버지의 정수(精水 = 정액)를 자기 것이라고 여긴다. ...
世尊經中作如是說。三事和合得入母胎。父母俱有染心和合。母身調適無病。是時及健達縛正現在前。此健達縛爾時二心展轉現前入母胎藏。此中三事和合者。謂父及母并健達縛三事和合。父母俱有染心和合者。謂父及母俱起婬貪而共合會。母身調適無病。是時者。謂母起貪身心悅豫名身調適。持律者說。由母起貪身心渾濁。如春夏水渾濁而流。不能自持名身渾濁。母腹清淨無風熱痰互增逼切故名無病。由此九月或十月中任持胎子令不損壞。言是時者。謂諸母邑有穢惡事。月月恒有血水流出。此若過多由稀濕故不得成胎。此若太少由乾稠故亦不成胎。若此血水不少不多不乾不濕。方得成胎名為是時。是中有者入胎時故。謂母血水於最後時餘有二滴。父精最後餘有一滴展轉和合方得成胎。及健達縛正現在前者。謂即中有此處現在前。非於餘處非前非後。此健達縛爾時二心展轉現前入母胎藏者。謂健達縛將入胎時於父於母愛恚二心展轉現起方得入胎。若男中有將入胎時於母起愛於父起恚。作如是念。若彼丈夫離此處者我當與此女人交會。作是念已顛倒想生。見彼丈夫遠離此處。尋自見與女人和合。父母交會精血出時。便謂父精是自所有。見已生喜而便迷悶。以迷悶故中有麁重。既麁重已便入母胎。自見己身在母右脇向脊蹲坐。爾時中有諸蘊便滅生有蘊生名結生已。若女中有將入胎時。於父起愛於母起恚。作如是念。若彼女人離此處者我當與此丈夫交會。作是念已顛倒想生。見彼女人遠離此處。尋自見與丈夫和合。父母交會精血出時。便謂母血是自所有。見已生喜而便迷悶。以迷悶故中有麁重。既麁重已便入母胎。自見己身在母左脇向腹蹲坐。爾時中有諸蘊便滅生有蘊生名結生已。諸有情類多起如是顛倒想已而入母胎。唯除菩薩將入胎時。於父父想於母母想。雖能正知而於其母起親附愛。乘斯愛力便入母胎。餘隨所應義如前說。
여기서 말하는 중유(中有)는 중음신(中陰身)이라고도 하는데, 앞에 인용한 <중아함경>에서 말하는 '식' 또는 '향음(건달바)'과 마찬가지로 '전생에 죽은 귀신의 마음 흐름'을 의미합니다.
이상으로 <중아함경>의 경문 두 가지와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경문 한 가지를 소개했는데, 부처님의 친설에 가장 가깝다는 초기삼장은 물론이고 대소승의 어떤 불전을 찾아보아도 '윤회'를 부정하는 경문은 없습니다. 질문에서 "향봉스님이라는 분이 윤회는 없다라고 주장"하신다고 쓰셨는데, '윤회는 없다'는 것은 향봉 스님 당신 개인의 주장일 뿐이고 불전의 가르침과 무관합니다. 그리고 향봉 스님이 서양학자들의 불교학을 거론하시는데, 근대 불교학 초창기 서양학자들의 경우 대부분 가톨릭이나 개신교 같은 기독교 신자들이었기에, 자신들의 종교관에 비추어 볼 때 절대로 윤회를 수용할 수 없었기에 견강부회 하듯이, 억지 이론을 많이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불전의 경우도 '윤회'를 언급한 경문은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멋대로 평가절하하기도 하고, 부파불교에서 12연기에 대해 태생학적으로 해석한 것 역시 후대의 조작이라고 억지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위의 <중아함경>의 경문에서 보듯이 초기불전에 실린 12연기에 대한 설명은 철저하게 윤회설과 태생학(Embryology)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향봉 스님께서 윤회는 불교 이전의 바라문교의 사상이 불교에 들어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향봉 스님의 주장이 아니라 서구 불교학자 가운데 일부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서구 학자들이 불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바라문교의 윤회관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관과 전혀 다릅니다. 바라문교의 성전 가운데 하나인 우빠니샤드를 보면 '5화2도설'이란 게 있습니다. 서구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 5화2도설이 불교 윤회관의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5화2도설은 참으로 황당무개한 윤회관입니다. ( 2도는 천도(천신의 길)와 조도(조상의 길)를 의미하고, 5화는 2도 가운데 조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시체를 화장한 연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영혼이 다시 여인의 몸으로 들어오는 5단계의 과정이고, 합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화란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깨끗이 화장하게 되는데, 화장 시 나오는 빛을 따라 천상(天上=天道)에 태어나는 고귀한 자가 있는가 하면, 연기를 따라 계속되는 윤회의 길인 조도(祖道)를 따라 태어나는 이도(二道)가 있는데 ① 달에 들어가 (月入), ② 비가 되어 내려옴 (降雨), ③ 食物(곡식)의 씨앗이 되어, ④ 남자가 먹으면 정자(精子)가 되고, ⑤여자와 잉태하여 태어나서 자라면, 또 그러한 5화 2도의 길을 계속 반복하여 태어난다고 하였다. (웹사이트 게재문 인용)
여기서 보듯이 사람이 죽어서 화장을 하면 그 영혼이 연기를 타고서 하늘로 올라가서 달로 갔다가, 비가 올 때 비와 함께 땅으로 내려와서 곡식 속에 들어가고, 그 곡식을 남자가 먹으면 그것이 정자가 되어 여인에게 임신하게 하여 환생한다는 허무맹랑한 윤회설입니다. 불교 이전의 인도에는 이런 윤회관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는 윤회설(찰나생멸하며 상속하는 식의 흐름이 계속 이어진다는 무아 윤회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 발견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재직했던 곰브리치 교수의 연구 결과입니다.)
향봉 스님께서 "힌두교, 바라문교의 윤회설이 불교에 들어온 것이고,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시 않았다."는 식으로 주장하신 것은, 당신의 이론이 아니라, 초창기 어설픈 서구학자들의 책에 나온 잘못된 얘기를, 스님께서 언젠가 알게 되셨고, 이를 새삼스럽게 주장하신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또 향봉 스님께서 정자 하나하나가 생명체라고 주장하시면서 "수억마리 정자중 단 하나의 정자만 생존한다면서 그게 윤회가 없다는 증거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위에 인용한 경문에서 보듯이 정자는 아직 인간이 아닙니다. 정자는 그저 움직이는 DNA 덩어리일 뿐입니다. 난자 역시 생명체가 아닙니다. 그냥 DNA 덩어리일 뿐입니다. 식물의 경우 낱낱 세포가 DNA로 이루어져 있지만, 불교적 의미에서 '생명체(중생)'이 아니듯이(천상, 아수라, 인간, 아귀, 축생, 지옥의 육도 윤회의 세계에 식물 세계는 없습니다), 정자나 난자 모두 식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체가 아닙니다. DNA 덩어리에 귀신(물론, 실체가 있는 영혼이 아니라 찰나생멸하면서 상속하는 마음의 흐름)이 붙어야 생명체입니다.
그리고 율장을 보면 부처님께서도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란이 되어야 인간으로 간주합니다. 스님들의 구족계 가운데 가장 중한 것이 '직접적인 성교', '사람을 죽임', '(그 당시 5전 이상의) 많은 돈을 훔침', 깨달았다는 망어'의 4바라이죄(승단에서 추방하며 재출가도 금지)인데 이 가운데 사람을 죽이는 '살인'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 가운데 '낙태'에 대한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재가의 여인이 어떤 비구니 스님에게 낙태를 부탁했는데, 이 비구니 스님이 그 부탁을 들어주어 낙태를 하게 했더니, 그 소식을 들은 부처님께서 꾸짖으시면서, 지금은 몰라서 그런 일을 했기에 추방하시 않지만, 앞으로 낙태를 도운 스님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기에 승단에서 추방한다고 최초로 계목을 정하셨다고 합니다.
즉, 임신이 되어 수정란이 성장을 시작해야 인간, 또는 중생인 것이지, 임신 전의 정자는 인간도 아니고, 생명체도 아닙니다. 정자 하나하나가 인간이라는 것 역시 불전의 가르침과 무관한 향봉 스님 당신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 이외에도 향봉 스님의 주장 중에는 불전의 가르침과 무관한 당신 개인의 생각이 적지 않습니다. 불교의 '중도'를 설명하시는데, 동아시아 한문의 '中'자로 풀이하십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중도'의 의미를 알려면, 원래 인도불교에서 '중도'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불전에 실린 '중도'라는 용어가 어떤 상황에서 쓰인 것인지, 여러 자료를 참조한 후 '불교의 중도'는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중'자의 의미에 대한 향봉 스님의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느끼셨을 겁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향봉 스님의 유튜브 대담 영상과 관련하여 본 게시판에서 질문이 올라왔기에 답변을 한 적이 있는데 아래에 링크를 소개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jB9/525
향봉 스님께서 삶과 죽음의 문제, 종교의 문제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말씀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모든 말씀이 불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를 올바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문(聞) → 사(思) → 수(修)'의 3단계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티벳불교에서 특히 강조하는 공부 방법입니다. 먼저 불전의 가르침을 정확히 배우고(聞), 가르침이 옳은지 분석적으로 생각해 본 후(思), 실제 수행과 실천을 통해 가르침을 체화(修)하는 것입니다.
향봉 스님의 경우 불교에 대해 당신 스스로 생각(思)은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聞)의 단계가 철저하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즉, 불전의 가르침과 무관하거나 상반된 주장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향봉 스님의 주장은 당신의 사상일 뿐이지 불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복덕과 지혜의 두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복혜양족존(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를 구족하신 존귀한 분)이라고 하듯이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분은 부처님이십니다. (참고 - 양족존은 원래 '두 발 달린 중생 가운데 최고인 분'을 의미합니다.)
이와 달리 아라한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지혜는 갖추었으나 복덕이 적고, 천신이나 전륜성왕은 지혜는 없으나 복덕이 많다고 합니다.
향봉 스님은 복덕이 많은 분 같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참고로, 티벳불교 겔룩파의 교과서 격인 <보리도차제론>에 의하면 "수행자가 자신의 인격, 무욕(無欲), 정진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역시 10악(惡) 가운데 탐욕에 속한다고 합니다.
초기불교 윤회설을 다루는 빅쿠 아날라요의 저서 《Rebirth in Early Buddhism and Current Research》에 달라이라마 스님과 반테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 두 분이 서문을 쓰셨더군요. 윤회와 환생이 초기불교 시기부터 불교의 고유한 교설이었음을 밝히는 학술서에 티벳불교와 테라와다 불교를 대표하는 어른 스님들이 서문을 쓰셨다는 점에 많은 의의가 담겨있을 것 같습니다..
인도불교는 물론이거니와 현세지향적이라는 동아시아불교에서도 윤회설이 명시적으로 부정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오늘날 한국불교는 가장 기본적인 윤회관마저 정립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 같아 참담합니다. 잘못된 지식과 낡은 이론에 의지하여 함부로 윤회를 부정하는 성직자/학자들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적당히 세속화된 주장이면 무조건 찬동하고 보는 대중들을 보면서, 종단과 학계가 좀 더 책임감을 갖고 바른 견해 확립에 앞장서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진심으로 대학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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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교수님 말씀을 듣다보니,
식에 의존해서 명색이 있고, 명색을 의존해서 식이 있다는 이 말씀이 참으로 압권임을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식 따로 명색 따로가 되어,
명색하면 식이 따라와 함께하지 않고, 식하면 명색이 따라와 함께하지 않아서
식 없이 명색이 있고 명색 없이 식이 있을 뻔하였습니다.
다시 돌아보아도 참으로 절묘한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우 합장합니다._()_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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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의 명쾌한 글을 읽으면서 앞이 환해지는 느낌입니다.
오래 도록 강건하시고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