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라기에서 알곡으로!
누런 황금물결이 바람에 일렁인다.
봄부터 못자 리에서 싹이 튼 볍씨들이 누런 껍질 속에 탐스러운 알곡을 키워가고 있다.
풍요롭고, 평화롭고, 자유가 충만하다.
갑자기 황금벌판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엔진소리. 그 기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벼들이 쓰러져간다.
벼를 베는 기계는 누렇게 익은 볍씨들을 사정없이 훑어 버리니 벼들이 맥없이 떨려 나간다.
이렇게 떨려 나간 벼들은 방아 찧는 기계에 빨려 들어가 처참하게 짓이겨진다.
곧이어 껍질이 벗겨지고 흰 살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가는 절망의 자리에서 방아 찧는 기계는 하얀 알곡들을 쏟아낸다.
여름 내 내 햇볕과 바람과 물 … 자연이 빗어낸 작품이다.
기계 뒤쪽에서는 싸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벼가 익다가만 불량한 알곡들이다.
알곡들은 곡간(穀 間)에 들여져 양식이 되고, 싸라기들은 돼지 밥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루카 21,25)
평화롭던 세상에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께서는 추수를 시작하시기 위해 낫을 휘두르신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떨려 나갈 것이다.
알곡이 짓이겨져 껍질을 벗듯, 모든 사람이 철저하게 하느님 앞에서 살아온 삶이 발가벗겨질 것이다.
이때 의인은 곳간(庫間)에 들어가게 되고, 악인은 사탄의 밥이 될 것이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누가 알곡이고 누가 싸라기인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 사람”(루카 21,34)은 싸라기이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 사람”(루카 21,37)은 알곡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그날’은
알곡에게는 축복의 날이고 싸라기에게는 저주의 날이다.
그날이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싸라기입니다.
그날이 기다려집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알곡입니다.
며칠 전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깨어 준비한 알곡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날입니다.
그들은 시험을 치르고 평화와 기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 방탕한 생활을 하다 준비 없이 시험을 치른 학생들에게는 혹독한 심판의 날입니다.
그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능시험에 실패했더라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 년간 깨어 준비하면 내년에는 알곡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내내 방탕하게 생활하다 싸라기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선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불타는 지옥에는 재시험이 없으니까요.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깨어 기도하며 그날을 준비합시다.
그러면 알곡이 되어 주님의 환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 희년이 시작되는 이 대림절에 저희들이 싸라기에서 알곡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을 수 있는 복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아멘.
손광배 도미니코 신부 간석2동 본당 주임
대림 제1주일 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