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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산성[南固山城] 275m 전북 전주
산줄기 : 호남고덕단맥
들머리 : 서서학동 산성공원
위 치 전북 전주시 동서학동(東棲鶴洞)
높 이 275m 북장대
사적 제294호. 폭 3.4m. 높이 1.2m. 길이 5.3km.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남고산의 주봉인 고덕산(高德山)의 이름을 따서 고덕산성이라 하였고, 그 길이는 8,920자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901년 견훤(甄萱)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축성하였으므로 견훤산성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를 1811년(순조 11)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수축하여 남고진(南固鎭)을 두었다. 당시 이 성은 전주의 남동쪽에서 남원·순창 행로인 2갈래 길을 좌우로 거느리고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여기에는 화약 4,320근, 궁노(弓弩)·궁기(弓機) 각 50좌(坐), 노시(弩矢) 1만 개, 장창 100자루, 군량미 6,006섬 등이 항상 비축되었고 산성별장 1명, 장관(將官) 22명, 군졸 1,340명 등이 상주하였다.
지금은 대부분의 석축이 허물어지고, 천경대(千景臺)·만경대·억경대 등 3봉우리가 천연의 요새를 이루었음을 말해 준다. 이 봉우리들에는 각각 가로 세로 약 10m의 장대(將臺)터가 있으며, 성터 안에는 관성묘(關聖廟)·남고사와 서문터 옆에 최영일(崔英一)이 찬(撰)하고 이삼만(李三晩)이 쓴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가 있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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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전주 남고산성
그날의 완산주는 어디로 가버렸나
가는 세월이라는 것이 가끔 실감나지 않을 때가 있다. 아파트 주차장 앞 잔디밭에 연 노란 서양 민들레가 소담스레 피어 있다. 신기하다! 신기해. 소한 대한 엄동설한 추위를 이기고 피어난 민들레꽃송이들. 나는 영하의 추위에도 내려 쌓이는 눈발에도 아랑곳없이 시들지 않고 꽃을 피우는 가녀리면서도 강인한 그 생명력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워 피어난 꽃송이를 만져본다. 봄날 오후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이 부드러움은 어디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일까?
아직도 멀리있는 줄 알았던 봄이 저만큼 와서 내 눈에 밟히는 듯한 환영 속에 종합경기장 정문 앞에 도착하자 그리운 얼굴(김태우, 홍현희, 김형곤, 진재언, 양순덕, 신영주, 고숙자)들이 민들레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녹두길과 기린로를 지나 남고산성 길에 접어들고 삼경사 앞에서 동서학동 시의원동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석환 시의원 내외와 만난 시간은 10시30분쯤이었다.
개축한 지 얼마되지 않아 새옷을 입은 듯 낯설어보이는 남고산성의 남문 수구부문에는 지금은 석축만 남아있지만 전주부사에는 남문이 홍예문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여기부터 천경대로 오르는 성길은 가파르다. 한참을 오르자 견훤이 샇았을 당시의 것인지 조선시대 말의 것인지 모르는 오래된 바위에 세월의 이끼가 그대로 끼어있다. "남고산성의 성곽 가장가리는 등산시 덜어질 염려가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전주시장 백" 이라는 팻말이 보이면서 발길은 천경대(千景臺)에 닿는다.
천경대의 봉우리 밴치에는 먼저 온 등산객들 여나믄 명이 앉아 있고 온고을 전주는 흐릿한 안개속에 어슴프레하기만하다. 내가 올라온 그 길을 돌아다 보면 만경대 너머 억경대가 보이고 성벽 아랫자락 남고사는 나무숲들 속에 숨어있다.
우리가 올라온 남고산성 뿐만이 아니라 성곽은 원래 맹수나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흙, 나무, 벽돌 등으로 높이 쌓아올린 담장과 같은 장애물을 말한다. 또한 성곽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성과 외성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성은 내성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곽은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축조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기원전 1~2세기 경부터 이러한 시설물들이 나타났다. <사기(史記)>를 보면 한(漢)이 위씨조선을 공격하는 부분에 위씨 조선의 도심인 왕검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성곽을 쌓는 기술은 곧 국가발전의 척도로 여겨질 만큼 국가 차원에서 중요시했던 것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세 나라 모두가 국가 차원에서 국가의 중요인물을 책임자로 내세운 다음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집하여 성을 쌓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국가에 성을 쌓는 전담부서를 두어 성을 축조하였다.
성곽은 대체로 성곽을 축성한 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는데 나무를 땅에 가로 세로로 단단하게 엮어 방어시설을 설치한 것이 목책성이고 흙으로 쌓은 토성, 돌로 쌓은 석성,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하여 축조한 토석혼축성, 벽돌로 쌓은 전축성 등으로 분류되며 산성, 평지성, 평산성, 장성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산성은 산의 정상부나 사면을 이용해 적으로 하여금 많은 힘을 기울여 공격하게 하고, 아군이 적을 내려다보며 수성하려는 의도에서 축조된 것의 총칭이다. 산성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잘 발달되었다. 산성은 평상시에 군창을 두고 여기에 곡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두며, 적이 침입하여 오면 평지의 주민들은 모두 산성으로 들어오게 하여 농성하는 것인데, 때로는 성과 다른 성을 연결하는 통신용 작은 보루도 산성의 범주에 넣고 있다.
현재 중부 이남의 지역에만 약 1,200여 개 이상의 산성터가 남아 있어서, 우리나라가 산성의 나라라고 할 만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규정짓고 보존해온 것임을 실증하고 있다.
산성기행의 첫 번째 답사지인 남고산성은 전라북도 전주시 동서학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2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는 3,024m로 현재 성문지와 장대지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다. 일명 견훤산성 혹은 고덕산성이라고도 불리는 남고산성은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 산성이다. 이 성은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이 이곳에 입보하여 왜군을 막을 때 수축하였다. 그 뒤 1811년(순조11년)에 관찰사 이상황이 중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가 관찰사로 부임한 뒤 완성한 것이다. 남북에 장대가 있으며, 문은 동쪽과 서쪽에 있었다. 서쪽에는 암문이 하나 있었고,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있었으며, 특히 천경대, 만경대와 같은 절벽이 있는 자연적 요새를 이용하였다.
1911년 발간된 <완산지>에는 남고산성이 완성되고 진이 설치된 시기가 181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경대에서 산성 안을 내려다보니 보상이 거의 다 끝났는데도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민가 몇 채들 속에 관성묘가 보인다. 성을 따라 길을 나서자 남고사에서 들리는 불경소리가 들린다.40여m쯤 내려갔을까. 이석환 의원은 움푹진 곳을 가리키며 이곳이 남고산성에 있던 세 개의 암문 중 한곳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암문은 성의 구석지고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 놓은 비밀문이다. 정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지만 평시에는 성벽과 다름없이 막아 두었다가 전시에는 적의 눈을 피해 구원요청을 하거나 적을 기습하는 전술상 통로라고 볼 수 있다.
남고산성을 따라 가는 길은 고덕산으로 가는 등산로이다. 역사 속에서 고구려의 불교가 백제의 당으로 망명해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고덕산은 그들이 내려와 지었다는 경복사터를 품에 안은 채 저만치 있고 남측성벽 끝 포루가 있던 곳에서 고덕산으로 가는 길과 억경대 가는 길이 나뉘는데 성벽을 바라보며 가기 위해 아랫길을 택한다.
드디어 산성촌에서 대성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이른다. 이 지점쯤에 남고산성 동문이 있었다는데 흔적조차 없고 동쪽 성벽 끝 부분에 있었을 것이라는 포루 역시 상상속에나 있을 뿐이다.
앞서가던 이석환 의원은 무명봉을 지나며 "이곳이 남고산에서 제일 높은 봉인 북장대(275m) 보다 0.5m가 높은 곳인데도 상봉으로 불리지 않고 이름도 없습니다" 고 이야기한다. 여정은 어느새 북장대에 이른다. 건너편에 치명자산이라 불리는 승암산이 보이고 후백제 견훤의 별궁터라고 알려진 동고산성이 있다.
견훤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마을 갈전2리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자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전설을 지닌 진훤(견훤)은 청년시절 군인의 길을 택했고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한 뒤 그가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은 892년이었다.
진훤은 북원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양길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며, 900년 완산(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게 되었다. 전주성 밖을 나와 열렬히 환호하는 백제 유민을 향하여 진훤은 크게 외쳤다. "나는 지금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사무친 숙분을 풀려 온 것뿐이다."
진훤은 나라 이름을 당당하게 백제의 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백제' 라고 선포했다. 후백제란 이름은 후세의 역사가들이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지었던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진훤은 대왕을 칭하면서 정개라는 연호를 반포하였다.
중국의 오월국 그리고 후당과 교류를 맺으면서 큰 세력을 형성하며 삼한 통일을 염원했던 큰 뜻은 아들과의 내분으로 막을 내리고 "가련토다. 완산 애기 애비 잃고 눈물짓네" 라는 참요만 남기고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나는 북장대 정상에 쓰여진 무덤 옆에 몸을 누인다. 이 포근함, 나 역시 어느날 이렇듯 포근함 속에서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갔으면 좋으련만... 햇살은 구름 위에 숨고 날은 봄날처럼 포근하다.
억만가지가 보인다고 하는 억경대에 올라서니 빼곡이 들어선 아파트 숲 건너로 완산칠봉이 보이고 더 멀리 황방산이 흐릿하게 펼쳐져 있다. 이곳 억경대에서 곧바로 내려가면 좁은목 약수터가 있는데 지금은 남원으로 순천으로 가는 길이 사통팔달로 뜷려 있지만 옛날에야 전주천변에 작은 소로길만 있었을 것이다. 내려가는 성벽 길은 가파르고 성 안쪽 남고사에서 목탁소리가 들린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고사지의 본래터에 세워진 남고사는 보덕화상의 수제자였던 명덕화상이 창건하였다. 원래는 남고연국사(南固燕國寺)라고 하였으나 뒷날 남고사(南高寺)라고 하였다가 다시 남고사(南固寺)로 변한 것으로 추정되다.
천천히 내려간 남고사로 오르는 길이 있고 성벽 옆에 남고진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조금 가파른 돌계단 길을 오르면 만경대에 이른다. 전주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뵈는 봉우리인 만경대가 있다.
"천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을 그릇치게 하누나. 하늘 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을 바라보네."
포은 정몽주가 이 시를 남긴 이유를 전주 사람들은 아래와 같이 알고 있다. 고려 말에 이성계 장군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 황산에서 왜구들을 크게 물리친 일이 있었다. 그 전투가 유명한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이다.
왜구들을 무찌른 이성계가 전주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오목대에서 전승의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베풀면서 고려를 엎고 조선을 개국할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때 종사관으로 함께 참석했던 정몽주가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당시 서울인 개경을 바라보며 지은 시가 지금도 돌벽에 그대로 남아 있어 보는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고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양광, 전라 경상도로 순찰사가 되어 왜구를 무찔렀던 때가 1380년이었는데 정몽주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성계가 무사했을 리가 있었겠는가? 다만 나라가 자꾸 황혼녘에 접어드는 것을 느낀 정몽주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생각하며 지은 시가 조선시대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인 결과일 것이다.
만경대의 바위 벽에는 '만경대' 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바로 아랫 부분에 포은 정몽주의 시가 새겨져 있어 700여 년 전의 그 날을 생각케 할 따름이다. 만경대에서 나문 터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기 이를 데 없고 서암문터에는 지대석 두어 개 남은 위에 새로 쌓여진 돌들이 생경하게 있을 뿐이다. 산성별장 이신문의 영세불망비가 망부석처럼 서있고 여정은 관성묘로 향한다. 이석환 의원의 말에 의하면 관성묘 부근에 남고진 관아가 있었고 개울 건너에 화약고가 있었다고 한다. 관성묘 입구에는 하마비가 서있다. '대소인원을 막론하고 이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 는 하마비를 지나 돌 계단길을 오른다.
천천히 걸어서 당도한 충경사는 이정란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전주에서 7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남고산성과 만경대 등에 복병을 배치, 고바야가의 침입을 막았던 공로로 충경공이라는 시호를 얻었던 인물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머지막 여정지 오목대에 도착한다. 태조 이성계가 그의 친척인 전주 이씨들에게 개선잔치를 베풀었다는 오목대에는 고종의 친필어각이 있지만 오목대에는 강릉의 경포대나 삼척의 죽서루와는 달리 옛 사람들의 시 한 편도 걸려 있지 않다. 전주 팔경이나 전국을 읊은 옛시들을 한글과 한문으로 써서 걸어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규보는 "인물이 변호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고국의 풍이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박하지 않고 모두가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동거지가 본뜰 만하다" 하였던 전주는 현재 문화관광도시를 모색하면서 성공적인 월드컵 경기를 위해 매진하고 있지만 TV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신검이 혁명의 깃발을 들고 일어서고 견훤과 금강이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날의 완산주는 어디로 가고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한 전주시가지는 흐릿한 안개 속에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으니 구천을 떠도는 견훤의 넋이 있다면 지금 어디쯤에서 이 전주를 굽어보고 있을 것이며 이 시점에서 나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가?
*교통
호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주까지 05:30~20:40까지 5~10분 간격으로 있으며 우등은 14,200원, 일반은 9,700원이다.
시내버스는 상관이나 관촌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전주교대 지나 내리면 남고산성이 지척이다.
산성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은 3시간 정도 걸린다.
*잘 데와 먹을 데
전주에는 숙식할 곳이 많고 동서학동 사무소 바로 옆에 만남식당(063-288-7039)의 백반과 팥칼국수가 값도 싸고 맛이 있다. 콩나물국밥집은 삼백집, 왱이집, 다래가든 등이 있고 가족회관, 성미식당의 비빔밥이 맛이 있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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