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세인 산맥으로 통하는 서부가도의 입구에서 나이트 테일이 마차로 병사들을 유인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레슬레인과 에릴로크는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는 자신들의 마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엄청난 숫자의 기병들이 말을 달리며 마차를 추격하고 있었다.
"저들이군."
"이제 조금 남았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에릴로크가 잔뜩 긴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나이트 테일이 목숨을 걸고 마련해 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 이제 조금 남았군."
나이트 테일이 모는 마차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서부가도를 가로질러 리세인 산맥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 뒤로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300기의 기병이 뒤를 쫓았다. 곧장 따라잡힐 듯 보였지만 기병들은 쉽사리 마차를 따라잡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 추격전을 펼치는 마차와 기병들은 레슬레인과 에릴로크가 숨어있는 곳을 지나쳐 지나갔고 두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멀어져가는 기병들을 지켜봤다.
"조금만 더 멀어지면 출발하는 겁니다."
"그래. 혹시 남아있는 기병은 없을까?"
"글쎄요. 신께서 도우시길 바랄 밖에요."
"막연하군."
레슬레인이 기병들이 멀리 사라진 걸 확인하고는 씁쓸한 얼굴로 말을 몰아 리세인 산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에릴로크도 비슷한 기분으로 뒤따랐다.
"이렇게 느긋이 갈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에릴로크의 재촉에 두 사람은 길을 재촉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차를 뒤쫓고 있지만 곧 저들은 마차를 따라잡아 저 마차가 미끼였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면 저들이 추격해 오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서둘러 산길을 달리던 레슬레인의 눈에 어렴풋이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워지자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말을 탄 두 사람의 기병이었다.
"저건?"
"남은 자들이 있었군요."
레슬레인과 에릴로크가 잔뜩 긴장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기사들이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누굴까? 한번 가서 만나봐야 겠군."
레슬레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고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전하, 위험하십니다."
"걱정말게. 어차피 우리가 저들을 이기고 지나갈 수는 없어."
"하지만...."
레슬레인은 에릴로크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카멜을 향해 다가왔다. 그런 레슬레인을 보며 카멜은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의 의도를 깨닫고는 말에서 내려 그를 맞았다.
"소신 카멜 드 베텔 테오린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기사의 예를 올리는 상관을 바라만 보던 나이트 라피노르는 어찌할 줄을 몰라 당황하다가 결국은 카멜을 따라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훗, 날 잡으러 온 자 치고는 너무 정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테오린 백작."
레슬레인은 전에 카멜을 만난 적이 있어 그와는 안면이 있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제 앞에 계신 분은 이 나라의 태자전하가 분명하니까요."
"그렇다면 날 이렇게 잡아가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지금 이것은 태자전하와 대등한 위치에 계신 또 다른 분의 명령. 그러니 부당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훗, 그런가?"
레슬레인은 마치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 이 일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한 투로 말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것은 아닌지 곧 다시 카멜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그를 향해 물었다.
"그렇다면 날 레스킨 앞으로 끌고갈건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레슬레인은 정말 뜻밖의 말에 놀라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단순히 확인해 볼 생각으로 물어본 것 뿐.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괜히 기대를 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레슬레인은 다시 방향을 돌려 물었다.
"그럼 날 레스킨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인가?"
"네, 전하. 전 전하를 그냥 보내드릴 생각입니다."
"그냥 보내어 준다고?"
"나이트 테오린 님. 그 무슨?"
레슬레인과 나이트 라피노르의 입에서 동시에 질문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카멜은 나이트 라피노르의 말은 무시하고 레슬레인의 질문에만 간략하게 대답해 주었다.
"네, 전하. 보내드릴 겁니다."
카멜의 대답에 레슬레인은 얼빠진 얼굴로 카멜을 바라봤다. 설마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이야. 이런 상황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테오린 백작, 그렇다면 레슬레인 전하께로 돌아서겠다는 뜻이오?"
뒤에서 듣고 있던 에릴로크가 끼어들었다.
"아니오, 셀릭 공작. 난 단지 내 자신의 뜻에 의해 이 분을 보내어 드릴 뿐. 이 분을 따를 생각은 없소."
"그렇다면 자신의 주군을 배신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누가 나의 주군이라는 말이오?"
카멜의 음성은 차갑지는 않았지만 단호했다. 그의 본심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에릴로크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아실루트의 기사들 중 하나인 내가 주군으로 모시는 분은 단 한분 뿐이오. 그건 바로 이 아실루트의 국왕 폐하시오. 하지만 지금 이 아실루트에는 아직 국왕폐하께서 계시지 않소. 두 분 중 한 분이 국왕이 되시면 저의 주군이 되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지금 제가 주군으로 인정하는 분은 계시지 않소."
"그렇다면 그대가 레스킨을 따르는 이유는 뭔가?"
카멜의 대답에 레슬레인이 카멜을 똑바로 쏘아보며 물었다.
"기사는 주군에게 충성하며 자신의 가족과 영지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저의 장인이 되시는 로제트 후작께서 레스킨 전하께 충성을 바치고 계시기에 가족된 자의 의리상 그 분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대는 레스킨을 따르고 있는 자로서의 의무로 날 그의 앞으로 데려가야 정상이 아니겠나?"
"훗, 전하께서는 제가 전하를 그냥 보내드리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으신가 보군요. 하지만 대답을 해 드리자면 여기서 전하를 모셔가는 것은 기사로서 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사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건가....."
카멜의 대답에 레슬레인은 이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는 은근한 눈빛으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카멜을 내려다봤다.
"그대의 호의 고맙게 받아들이지.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아닙니다. 이번 일은 단지 저의 기사로서의 긍지와 신념을 위한 행동일 뿐입니다."
"그대의 뜻이 어떠하던 내가 그대에게 빚을 졌다는 것만은 변함이 없소. 어찌했든 그대의 뜻이 그러하니 난 길이 바빠 이만 실례를 해야겠소. 그럼."
레슬레인은 카멜의 곁을 슬쩍 돌아 그의 뒤쪽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카멜을 경계했다.
한편 카멜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나이트 라피노르의 눈은 안타까움으로 물들어갔다. 이번 내전에서 최고의 공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눈 앞에서 날려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트 테오린 님!"
"그대로 있으라. 나이트 라피노르!"
레슬레인이 카멜의 곁을 돌아 뒤로 간 순간 카멜의 고성이 울렸다. 나이트 라피노르의 돌발적인 행동을 막기 위함이었다.
한편의 퍼포먼스를 약간 떨어진 상황에서 지켜보던 에릴로크도 레슬레인이 무사히 그들을 통과하자 곧장 레슬레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카멜에게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테오린 백작, 고마웠소. 내 이 빚은 절대 잊지 않겠소."
이렇게 카멜을 통과한 두 사람은 잽싸게 말을 몰아 서부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산길이라 그렇게 빠른 속도는 낼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비록 카멜이 이들을 보내어 주기는 했지만 그 마음이 언제 변할지 알 수 없었고 나이트 테일을 쫓아간 기병들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카멜도 그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멜은 곧장 나이트 라피노르를 달래주어야 했다.
"나이트 테오린 님. 이건...?"
"그만하게, 나이트 라피노르."
카멜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이트 라피노르의 말을 잘랐다. 무슨 말을 할 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트 라피노르는 아직 할 말을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는 기사로서 이런 식으로 적장을 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그건 아니지만...."
"우린 아실루트의 기사이네. 레스킨 전하의 기사가 아니란 말이네. 우리들로서는 더 뛰어나신 분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 좋을 것이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되어서는 더 뛰어난 분을 가릴 수 없을게 아닌가."
카멜의 말에 나이트 라피노르는 수긍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반박도 해 볼 수가 없었다. 묘하게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이트 라피노르는 씩씩거리며 분을 삭힐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내 결정이 후회가 되지 않아야 할텐데...'
카멜은 멀리 사라져가는 두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히 한숨을 쉬며 혼자 상념에 잠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