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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6) 김범우 토마스의 유배지
다블뤼 주교 “김범우 유배지는 충청도 동쪽 끝의 단양” 기록
- 위 문서는 김범우의 손자 김동엽 가에 전해온 것으로, 김동엽이 근래에 밀양으로 유락해 들어왔고, 그가 그간 균청둔감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했음을 적고 있다.
김범우의 입교와 정약용 집안
김범우(金範禹, 1751 ~1786) 토마스는 1786년에 유배지인 충북 단양에서 죽었다. 111년 뒤인 1897년에 편찬된 「경주김씨 정유보(慶州金氏 丁酉譜)」에는 김범우가 1787년 7월 16일에 죽었다고 해서 사망연도에 차이가 난다. 하지만 동생 김이우와 이승훈은 그가 1786년에 죽었다고 했고, 다블뤼도 「조선순교사비망기」에서 “이 나라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단양의 아전들은 그가 2년 뒤, 다시 말해 1786년에 사망했다고 말한다”고 하여 1786년 사망 사실을 확인하였다.
김범우는 부친 김의서(金義瑞, 1721~1774)와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의서는 첩에게서 2남 1녀를 더 두었다. 서자인 김이우(金履禹, ?~1801)와 김순우(金順禹, 1775~1801)가 그들이다. 복자 김현우(金顯禹, 1775~1801)의 이름은 족보에 보이지 않는데, 김순우는 김현우의 고치기 전 이름이다.
김범우의 집안은 증조 대부터 역관직을 수행했다. 증조 김익한(金翊漢, 1646~1720)이 수역(首譯)으로 연행을 다녀왔고, 부친 김의서도 종 5품 역원판관(譯院判官)을 지냈다. 김범우는 영조 49년(1773) 역과 증광시에 2등으로 합격해서 한학우어별주부(漢學偶語別主簿)가 되었다. 아버지 김의서가 1762년에 간행된 경주김씨 족보 편찬 비용을 모두 감당했으리만큼 그의 집안은 상당한 경제적 부를 갖추고 있었다.
김범우가 1784년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이벽, 정약용 형제와의 교분을 통해서였다. 김범우와 정약용은 척분이 있었다. 정약용의 서모(庶母) 우봉 김씨(1754~1813)는 다산이 12살 나던 해에 20세로 아버지 정재원의 측실이 되었다. 그녀는 당시 어머니를 잃고 투정만 부리던 어린 다산을 각별하게 보살폈고, 그녀에 대한 정약용의 애틋한 정은 「서모김씨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에 자세하다.
김두현의 정리에 따르면, 다산의 서모는 김의택(金宜澤, 1690~?)의 서녀(庶女)였다. 그녀의 숙부 김성택(金聖澤)은 김범우의 증조부 김익한(金翊漢)의 손녀에게 사위로 들어갔다. 게다가 김범우의 재당숙 김취서(金就瑞)의 처가 다산의 서모와는 5촌 간이었다. 이래저래 얽히고 설킨 혼맥을 통해 김범우는 이벽, 정약용 등과 이웃하며 가깝게 지내다가 1784년 교회 출범기부터 신앙생활을 함께 시작했다.
-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
단양(丹楊)과 단장(丹場)
1785년 김범우가 귀양 간 곳이 어딘지를 두고 오랜 논란이 있어 왔다. 김범우의 도배지(徒配地)는 충청도 단양(丹楊)이지 밀양의 단장(丹場)일 수 없다. 밀양부 단장면(丹場面) 법귀리(法貴里) 7통 3호로 명시된 호구단자가 김범우 후손가에서 발견되고, 1989년 단장면(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사기점길 50-100)에서 김범우의 무덤을 찾았다고 알려지면서, 김범우의 유배지가 단장이라는 주장은 더 큰 힘을 얻어왔다. 이는 나아가 김범우의 단장 유배를 계기로 경남 지역에 천주교가 널리 퍼졌다는 논리로까지 확대되었다.
동생 김현우는 공초에서 형 김범우의 도배지가 충청도 단양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다블뤼 주교도 「조선순교사비망기」에서 ‘충청도 동쪽 끝의 단양(Taniang)’이라고 썼다. 만에 하나 김범우가 단장 쪽으로 귀양을 왔다면, 유배지를 단장이라 할 수 없고 밀양이라고 썼어야 한다. 귀양지는 행정 단위의 고을 이름으로 하지, 면 단위로 적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1757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밀양부에 단장면이 없다. 1834년 김정호가 정리한 「청구도(靑丘圖)」의 밀양부 지도에도 단장면은 없다. 그러다가 1870년 즈음에 와서야 앞선 두 지도에 실린 중삼동면(中三同面)을 단장면으로 개칭하였다. 결국, 김범우가 유배 갈 당시 밀양부에는 단장면이란 지명 자체가 없었고, 김동엽이 하동면에서 이사할 즈음에야 중삼동면을 단장면으로 새로 고쳐 불렀다는 뜻이다. 김범우의 단장 유배설은 어떻게 보더라도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김범우의 손자 김동엽(金東曄, 1795~1877?)의 후손가에 전해오는 호구단자와 간찰 문서에 그가 아무 연고 없던 밀양에 정착하게 된 과정이 잘 나타난다. 이들 자료는 손숙경이 엮은 「중인 김범우 가문과 그들의 문서」(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간, 1992)에 수록되어 있다. 집안에 전해온 7건의 호구 단자를 보면 1854년부터 1867년까지 작성된 4건의 문서에서 김동엽의 최초 밀양 주소지는 단장면이 아닌 하동면(下東面) 굴암리(掘岩里) 또는 구암리(龜巖里)였다. 김동엽은 1870년에야 단장면 법귀리로 이사했다. 증손자 김영희(金穎凞, 1840~1905) 대인 1898년의 호구단자에는 다시 성주군(星州郡) 금수면(金水面) 덕산리(德山里)로 거주지를 옮겨, 이후 대대로 이곳에 살며 성주 문중을 이루었다.
단장은 김범우가 단양에서 사망하고 68년 뒤인 1854년에 손자 김동엽이 밀양으로 옮겨가 하동면 굴암리와 구암리에서 1869년까지 15년간 살다가 1870년에 다시 옮겨간 주소지였다. 김동엽의 부친 김인구(金仁, 1768~1800)는 김동엽이 6세 때인 1800년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떴다. 족보에 김범우의 부친 김의서 위로 3대의 묘가 모두 경기도 양주군 성산리 선영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보아, 1786년 당시 김범우의 시신 또한 아들 김인구가 운구해서 선산에 모셨을 것이다. 한편 김동엽이 아들 김영희(金穎凞,1840~1905)를 46세에 얻은 것을 보면, 부친 김인구의 사후 이때까지 상당히 굴곡진 삶을 살았으리란 짐작이다.
손자 김동엽의 밀양 정착 이유
척제(戚弟)인 역관 진계환(秦繼煥)이 김동엽에게 보낸 편지 7통이 남아 있다. 진계환은 본관이 풍기(基)로, 그의 조모가 김동엽의 고모 할머니였다. 1849년 5월 18일자 편지는 서울의 진계환이 당시 동래에서 내부관(萊府館) 전차비관(專差備官)을 맡고 있던 김동엽에게 보낸 것이다. 1849년과 1852년의 다른 편지에는 수신인을 유원관(柔遠館) 김주부(金主簿)로 썼다. 앞서 내부관은 동래부 유원관을 줄인 표현이다. 유원관은 당시 동래 초량 왜관에 조선 관리가 제반 사무의 처리를 위해 머물던 관소(館所)로 성신당(誠信堂)의 동편에 있던 건물 이름이었다. 김동엽은 1849년에서 1854년 밀양 이주 직전까지 동래 왜관에서 문서 관리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진계환은 1849년 5월 10일의 편지에서 자신이 동래부사에게 김동엽을 비장전령(裨將傳令)으로 쓰게끔 청탁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김동엽이 당시 맡고 있던 유원관의 보직을 옮겨달라고 진계환에게 부탁했던 듯하다. 하지만 이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1852년 8월 2일자, 정봉조(鄭鳳朝)가 보낸 편지에도 김동엽은 여전히 유원관에서 근무 중이었다.
1854년 즈음에야 60세의 김동엽은 밀양으로 이주했다. 고문서 중 「소록(小錄)」에 본영(本營)이 소유한 밀양 둔답(屯畓)의 감관(監官)으로 김동엽을 천거하면서, “균청둔감(均廳屯監) 김동엽은 수십년 동안 문하에서 가깝게 지낸 사람으로 일을 잘 알뿐 아니라 십분 부지런하고 야무진데, 근래 본부(本府)에 유락해 온 정상이 불쌍히 여길만하다”고 한 언급이 보인다.
김동엽이 밀양으로 오기 전 동래 왜관에서 4년 이상 일했고, 그전에도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균역청에 속한 둔전의 감독 직임을 맡아왔다는 뜻이다. 위 글에서 진계환은 김동엽이 근래에 밀양부에 유락(流落), 즉 흘러들어왔다고 했다. 그의 밀양 이주가 밀양 발급 호구단자가 시작되는 1854년 경이었음을 의미한다.
김동엽은 이때 왜 밀양으로 이주했을까? 김동엽이 진계환의 주선으로 세도가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의 전장(田場)을 관리하는 집사 노릇과 함께 둔답 감관 일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밀양을 두고 “낙동강을 끼고 바다와 가까워서 한양의 역관 무리들이 이곳에 귀중한 재물을 많이 쟁여두고 왜국과 교역하여 이익을 얻는다”고 썼다.
밀양 정착 이후, 막상 김동엽은 진계환의 끝없는 요구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경제적 압박마저 몹시 심했다. 1856년 4월, 늦게 본 아들의 혼사를 치른 김동엽은 선혜청에 상납해야 할 둔세(屯稅) 200냥조차 보내지 못했다. 진계환은 1856년 4월 25일의 편지에서 이 일로 펄펄 뛰며 분개했다.
1857년 10월 26일의 편지에는 김좌근 대감의 회갑을 맞아 밀양 특산의 연죽(煙竹) 즉 담뱃대 1백 개를 기일에 맞춰 만들어 보내란 요구도 나온다. 김동엽은 이마저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진계환은 더 화를 내며, 밀양 환도(環刀) 5개를 대마도로 보내 옻칠을 해오게 하고, 왜숙복(倭熟鰒), 즉 일본산 삶은 전복 100개, 고래 고기 7~8근, 왜토장(倭土醬), 그리고 일본제 찬합 2개를 구해 함께 올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밖에도 왜통(倭桶), 풍로(風爐), 찬합(饌盒) 등의 일본 물품을 구해 바치라는 내용의 편지가 이어진다.
돈 문제로 오간 편지를 보면 해당 물품은 대금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1856년 4월 22일과 4월 25일, 1866년 8월 3일의 편지에는 다시 구암(龜巖) 또는 구남(龜南)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1854년 밀양 이주 후 굴암리에서 2년 뒤 다시 구암리로 옮긴 것이다.
어쨌거나 김동엽의 밀양행은 김범우와는 상관이 없다. 설령 김동엽이 선대의 묘소 중 김범우의 묘소만 경기도 양주군 성산리 선산에서 단장으로 굳이 이장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점은 김동엽이 단장에 자리 잡은 1870년 이후로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김동엽은 당시 76세의 고령이었고, 경제적 여유도 전혀 없었다. 김동엽은 1879년 이후 세상을 뜬 아내 파평 윤씨를 밀양이 아닌 경기도 양주군 신혈리(神穴里: 지금 서울의 은평구 뉴타운 지역)에 묻었는데, 이는 이때까지도 그가 한양 쪽의 선대 선영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정리한다. 김범우가 귀양 가서 죽은 곳은 충청도 단양이다. 김범우의 손자 김동엽이 4년여에 걸친 동래 근무를 거쳐 밀양부 하동면에 정착한 것은 1854년이고, 이후 단장면으로 이사한 것은 김범우 사후 84년 뒤인 1870년의 일이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7) 서양 배에 오른 현계흠 플로로
영국 해군 배에 오른 현계흠, ‘대박청래’ 근거를 제공하다
- 현계흠이 부산 동래에 내려왔다가 용당포에 정박한 영국 해군 탐사선을 방문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현계흠의 사형 이유
현계흠(玄啓欽, 1763∼1801) 플로로는 족보명이 현계온(玄啓溫)이고 자는 사수(士秀?)로 알려져 있다. 1800년 당시 그의 집은 명도회의 6소(所) 중 한 곳이었고, 윤지헌이 상경했을 때 현계흠의 집에 머물던 주문모 신부와 만난 일이 있다. 현계흠은 한양 서부 관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남부 회현방(會賢坊)의 선혜청 인근 장흥동(長興洞)에 있었다. 오늘날 회현동 일대다.
그에 관해 남은 기록이 대단히 소략한 것과 달리 당시 교회에서 그의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학징의」 속 이합규의 공초에 따르면 현계흠은 김범우의 서제(庶弟) 김이우의 집에서 당시 교회의 집행부라 할 중심인물들과 모여 서학 공부를 같이 했고, 주문모 신부를 모셔와 강습하는 자리에 늘 함께했다. 홍필주의 집에서도 현계흠은 최필제, 최창현, 이합규, 황사영 등이 함께하는 모임에 빠지지 않았다. 그와 동당(同黨)으로 거명된 사람은 한결같이 당시 교회의 지도자급 인물들이었다.
「추안급국안」에 나오는 1801년 10월 11일 자 옥천희와 황사영의 대질 심문에서, 옥천희는 “작년 10월에 너를 남대문 안 현가의 약포(藥)에서 보았다”고 했다. 이를 통해 현계흠이 당시 남대문 안 회현동에서 약포를 운영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사학징의」에는 이상하게도 현계흠의 공초 기록이 통째로 빠지고 없다.
황사영은 현계흠을 최필제, 최필공과 함께 중인 중에 두드러진 인물로 꼽았다. 1801년 4월 6일 포도청에 자수한 그는 배교를 다짐하고 석방되었다. 이후 9월 황사영의 체포 이후 「백서」에 나오는 서양 배에 올랐던 교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당사자로 지목되자 10월 10일 다시 체포되었다. 「일성록」에 따르면, 현계흠은 1801년 10월 15일에 의금부에 끌려가 황사영과 대질 신문하였고, 1801년 11월 2일에 의금부로 끌려가 곤장 30대를 맞았다. 이틀 뒤인 11월 4일에 2차 신문이 있었고, 다음날인 11월 5일에 바로 사형에 처해졌다.
「조선왕조실록」 1801년 11월 5일 기사는 이렇다.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정황이 더욱 드러났다. 사학하는 무리들이 서양 배를 청해오는 데 어지러이 참여하고 간섭하여 밤낮으로 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바랐다. 이국(異國)의 선박이 동래로 표류해 정박했다는 말을 듣고는 따라가서 이를 보고 십자를 그어 보였다. 이것은 바로 사교(邪敎)들이 서로를 탐문하는 방법이니, 이것으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였다. 주문모의 글과 황사영의 흉서가 발각되기에 이르렀는데, 모두 동래에서 배를 탐문한 것과 똑같은 얘기를 써놓았다.” 이 내용은 다블뤼의 「조선순교사 비망기」에도 나온다. 결국 황사영이 「백서」에서 주장한 대박청래의 한 근거를 현계흠이 제공했고, 백서의 내용과 작성에도 그가 개입되어 있었음을 밝힌 것이다.
현계흠ㆍ김범우 집안의 혼맥과 주변 인물
천녕(川寧) 현씨 집안은 역과 98명, 의과 46명의 합격자를 배출한 중인 명문이었다. 주로 왜역(倭譯)으로 특화되었고, 동래와 밀양 등지에 거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동의보감」의 전래 이후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고, 그 처방에 나오는 다른 약재에 대한 수요가 남달랐다. 이밖에 앞서 김동엽의 예에서도 보듯 각종 일본제 물건에 대한 조선 상류층의 기호도 높았다. 이에 따라 천녕 현씨는 역관과 의관으로 구성된 가문의 인맥을 동원하여 동래 왜관과의 사무역(私貿易)을 통해 치부하였다.
천녕 현씨 현계흠의 집안과 경주 김씨 김범우의 가문은 층층의 혼인 관계로 맺어졌다. 김의서(金義瑞)는 네 아들 중 첫째인 김범우와 둘째 김형우, 셋째 김관우의 배필을 모두 천녕(川寧) 현씨(玄氏) 집안에서 맞아왔다. 김범우와 김관우는 현재연(玄載淵, 1701∼1753)이 장인이다. 현재연의 두 딸과 김범우 형제가 나란히 결혼하여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현재연은 현계흠의 숙부이니, 현계흠은 김범우의 사촌 처남이다.
한편 현계흠 자신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은 약계(藥契), 즉 약방을 운영하거나 약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유독 많았다. 그의 사위 손경무(孫景武)가 그렇고, 사위와 4촌 간인 복자 손경윤(孫景允) 제르바시오와 그의 동생 손경욱(孫敬郁) 프로타시오도 약국을 운영했다. 의원 집안의 허속(許涑)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이밖에 인근에서 약방을 운영하던 최창현, 최필공, 최필제, 손인원, 김계완, 정인혁 등과도 가까웠다.
또 「사학징의」에는 현계흠의 일에 연루되어 붙들려온 동생 현계탁(玄啓鐸)과 6촌 노선복(盧先福)이 나온다. 현계탁은 「천녕현씨세보」에는 이름이 빠지고 없다. 현계탁은 사학에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형의 정상(情狀)을 알고도 숨겨 감춘 죄로 증산(甑山)에 유배 갔고, 성이 다른 6촌 노선복(盧先福)은 사학 책자를 받아온 죄로 길주(吉州)로 유배 갔다. 두 사람은 모두 동래에 살고 있었다. 이들 또한 동래에서 일본과의 사무역과 관련한 일, 특별히 약재 관련 거간 노릇을 생활의 방편으로 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황사영의 1801년 10월 10일의 2차 심문에서 심문관이 “현계흠의 동생이 동래에 와서 머물렀던 것도 또한 사학 때문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황사영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 같은 날 1차 심문에서는 성이 노가(盧家)인 사람과 현계흠의 집은 동래에 있었다고 했다. 이로 보아 현계탁과 노선복 또한 천주교 신자였음이 분명하다. 이 시기 동래 지역에 이미 천주교 조직이 들어왔었다는 뜻이기도 해서, 특별히 의미 있는 기록이다.
- 현계흠이 탔던 영국 배 프린스 윌리엄 헨리호의 함장 브로우튼의 초상화.
영국 배 프린스 윌리엄 헨리호에 오르다
현계흠은 1797년 8월 아우 현계탁(玄啓鐸)이 살던 동래에 갔다가 용당포에 표박(漂迫)한 영국배를 보았다. 이때 현계흠이 동래까지 동생을 찾아간 것은 약재를 공급, 전달하는 등의 업무 외에 교회와 관련된 모종의 일이 있었을 것이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몇 해 전 대 서양의 상선 1척이 우리나라 동래에 표류하여 정박했습니다. 한 교우가 배에 올라가서 자세히 보았는데, 돌아와 하는 말이 이 한 척의 배로 우리나라 전선(戰船) 100척과 대적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라는 언급을 남겼다. 이 교우가 바로 현계흠이다.
이 이야기는 널리 퍼졌던 듯, 그리피스(Wil liam E. Griffis)가 1882년에 펴낸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에서도 부산 용당포의 어떤 사람이 배에 승선하여 구경한 뒤, “이와 같은 배가 한 척만 있으면 조선의 전선 100척쯤은 쉽게 무찌를 수가 있다”고 말한 죄로 관가에 투옥되어 형을 받았다고 썼다.
당시 동래의 용당포에 정박한 배는 윌리엄 로버트 브로우턴(William Robert Broughton, 1762∼1821) 함장이 이끌던 87톤급 영국 해군 탐사선 프린스 윌리엄 헨리호였다. 승선 인원이 고작 35명뿐인 스쿠너선으로 길이가 18파(27.54m), 너비가 7파(10.71m)밖에 안되는 소형 선박이었다. 그러니 이 배로 조선 전함 100척을 무찌를 수 있다고 본 현계흠의 언급은 과장이 다소 심하다.
브로우튼은 1804년 런던에서 「북태평양탐사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North Packfic Ocean, 1795∼1798)」를 출간했는데, 이 항해기 속에 당시의 정황이 자세하다. 브로우튼은 1797년 8월 24일(양력 10월 13일)에 부산 용당포에 표착하였다. 이들은 9일간 포구에 머물다 9월 2일에 조선을 떠났다. 표착 이튿날인 8월 25일 아침 용당포 해안에는 호기심에 가득 찬 주민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배 둘레에도 사람을 가득 실은 소형 선박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이날 오후 조선 관리가 승선해서 문정(問情)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정조실록」 1797년 9월 6일 자 기사에는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 1739~1798)의 보고에 “역학(譯學)을 시켜 나라 이름과 표류 경위를 물었지만 한어(漢語), 청어(淸語), 왜어(倭語), 몽고어(蒙古語)를 모두 알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한 내용이 나온다.
관리가 떠나고 나서, 오후에 이들이 조사를 위해 잠깐 상륙했다가 배로 돌아왔을 때 배 위에는 조선인 방문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방문객들은 소금에 절인 생선과 쌀, 김 등을 선물로 주고, 항아리와 물통에 물을 담아 배에 전달해주는 등 호기심에 가득 차서 호의를 베풀었다. 현계흠은 이때 무리의 틈에 끼어 승선했을 것이다. 현계흠은 자신이 배에 오르기 전에 성호를 그어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보여서 배에 올랐다고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일 경우 배에 남아있던 영국 선원이 그의 태도를 보고 호기심을 느껴 그와 그의 일행을 배에 오르게 했을 수 있다.
조선을 떠나던 날인 9월 2일의 기록은 이렇다. “우리 친구 4명이 찾아와 우리가 출항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했다. 나는 친구 1명에게 권총과 망원경을 선물로 주었다.” 9일간의 체류 동안 보여준 조선인의 호의가 그들을 ‘우리 친구’라고 부르게 했다.
어쨌거나 무역과 관계된 업무차 동래의 아우 집을 방문했던 현계흠은 우연한 기회에 1796년 주문모 신부의 사목 보고와 조선 신자 대표들이 청원서에다 요청했던 서양 배를 직접 눈으로 목격했고, 성호를 그어가며 배에 올라 이들과 소통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황사영의 「백서」에 기재되면서, 뒤늦게 그는 의금부로 불려가서 심문 후 즉각 처형되었다.
현계흠 집안의 신앙은 현계흠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더 큰 불빛이 되어 타올랐다. 조선 교회 총회장의 직분을 맡아 활동하다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현석문(玄錫文, 1799~1846) 가롤로가 그의 아들이고, 성녀 현경련(玄敬蓮, 1794∼1839) 베네딕타가 그의 딸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8) 이합규와 서소문 신앙공동체
교리 가르치고 세례 베푼 ‘교주’… 「사학징의」 전체에 49회 등장
- 이합규는 황사영과 함께 당시 서울 교회를 대표하는 평민 지도자였고, 서소문 인근 사창동 신앙 공동체를 이끌던 수장이었다. 사진은 서소문 순교 성지 순교자 현양탑. 가톨릭평화신문DB.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준 걸출한 교주
「사학징의」 중 한신애 아가타의 공초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자 교우 중에 가장 높은 자는 중인으로는 이용겸(李用謙: 이합규)과 김심원(金深遠)이고, 양반 중에서는 정광수와 황사영 진사입니다.” 정복혜는 또 “이합규(李逵, ?∼1801)는 교주라 불렸고, 밤중에 혹 불러오기도 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서울의 남자 교우 중에 서열이 가장 높은 네 사람 중 중인 신분으로 이합규와 김심원 두 사람을 지목했다. 그런데 막상 이합규는 교회사의 여러 기록에 누락되어 오늘날까지 실제 위상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용겸은 이합규의 다른 이름이다. 「추안급국안」 속 황사영의 공초에서는 이동화(李東華)라는 이름으로도 나온다. 이용겸, 이합규, 이동화는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워낙 비중이 높고 노출된 인물이어서 검거될 때를 대비해 여러 이름을 썼던 것으로 본다.
이합규는 「사학징의」의 공초에서 “저는 본래 반민(泮民)으로 도리어 사술을 배워 부녀자를 모아 남몰래 가르쳐 꾀고, 도처에서 세례를 주고, 주문모를 높여 받들어 김이우와 강완숙의 집에 맞아들여 한 세상을 속여 미혹시킨 죄는 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의금부의 「형추문목」에는, 이합규가 천주교도 중에서도 교초(翹楚), 즉 걸출한 사람으로 일컬어졌음을 말하면서, 붙잡힌 뒤에도 공초를 바칠 때 주문모 신부의 호칭을 다른 이들처럼 ‘주가(周哥)’나 ‘주한(周漢)’ 또는 ‘문모(文謨)’라 부르지 않고 깎듯이 ‘주교주(周敎主)’로 호칭한 일로 따로 추궁을 받았다. 그는 배교하지 않았고, 1801년 4월 2일에 처형되었다.
「사학징의」 전체에 그의 이름이 49회 등장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당시 교계에서 그의 비중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교주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신부를 대신해서 곳곳을 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기까지 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서 수행한 교주의 한 사람이었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교주라고도 했지만, 교종(敎宗)이란 호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
교주는 지도급 신자 중 신부를 대신해 세례를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을 두고 일컫던 표현인 듯하다. 주문모 실포 사건 이후 신부의 행적을 극비에 부쳤으므로 전국 각지에서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던 신자들에게 직접 세례를 줄 수가 없었다. 이에 가성직 제도 당시처럼 그 역할을 위임받은 이른바 교주들이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학징의」에서 실제 교주란 호칭으로 불린 사람은 주문모 외에 유항검, 김범우, 덕산 송복명(宋福明), 최창현, 이합규 등이 있다.
서소문의 사창동과 현방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4월 2일(양력 5월 14일) 증거자 6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었다. 정철상 가롤로, 최필제 베드로, 정인혁, 이합규, 운혜와 복혜라는 두 여자였다. 끝의 네 사람은 공문서로 보존된 결안을 통해서만 확인되는데 그들의 본명은 알 수가 없다”고 썼다. 다블뤼의 비망기나 약전 중에 정인혁과 이합규, 윤운혜와 정복혜에 대한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합규는 지금껏 위상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합규는 서소문 인근 사창동(司倉洞)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사창동은 오늘의 서소문동으로 인근에 선혜청의 새 창고가 있어서 신창동(新倉洞) 또는 사창동으로 불렸다. 선혜청은 남대문과 남대문시장 사이의 중구 남창동에 있었다.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이 바로 선혜청 창고가 있던 자리다. 창동과 북창동, 남창동 같은 지명이 모두 이 창고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합규의 부친 이인찬(李仁燦)도 열심한 신자였다. 이인찬은 전복(典僕)이었다. 전복이라 함은 조선 시대 각사(各司)와 시(寺), 성균관(成均館)ㆍ사학(四學)ㆍ향교(鄕校) 등에 딸려 잡역을 맡아 하는 공노비(公奴婢)를 일컫는다. 「사학징의」에서 목수 이춘홍(李春弘)은 이인찬을 현방(懸房)으로 불렀다. 현방은 국왕이 허가하여 국가가 공인한 소고기를 살 수 있는 곳이다. 도살한 소를 매달아 팔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그를 현방이라 부른 것에서 이인찬이 성균관 반민(泮民)만의 특권인 도우(屠牛) 즉 소 도살과 소고기 판매 등의 일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혹 현방은 반민(泮民)과 같은 의미로 썼을 수도 있다. 반민들은 공노비의 특수 신분이었음에도 자신들의 한시집인 「반림영화(泮林英華)」를 펴낼 만큼 식견이 높고 자부심도 있었다.
이합규의 신분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복(典僕)’ 또는 ‘반복(泮僕)’으로 나온다. 그는 성균관에 소속된 공노비였다. 1782년 11월 2일 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반예(泮隷)는 생업이 없는 궁한 백성과는 조금 다르다. 대개 현방에 기대는 바가 있기 때문일 뿐이다”라고 했다. 이들은 현방을 통해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이들 부자가 실제로 현방을 운영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반민의 현방 운영 특권을 활용해 사창동에서 생계를 꾸려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창동 인근의 신앙 공동체
「사학징의」 속 등장인물 중 이합규 일가가 특별히 많다. 아버지 이인찬과 어머니 김조이, 외숙 김득호(金得浩), 외숙모 정분이(鄭分伊), 누나인 동녀(童女) 이득임(李得任), 정분이의 6촌 언니인 동녀 박성염(朴成艶) 등이 모두 이합규의 집안이거나 가까운 인척이었다. 동녀가 둘이나 포함되었을 정도로 모두 열심한 신자 집단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사창동 인근에 모여 살며 작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다. 외숙 김득호는 서소문 안에서 짚신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박성염은 4촌 형부인 선혜청 사령의 집 행랑채에 살고 있었다. 여기에 이합규에게서 세례를 받은 간지대 정복혜와 그녀의 오빠 정명복(鄭命福), 이합규가 혈당(血黨)으로 지목한 최봉득(崔奉得)과 이름을 모르는 김가(金哥: 김계완?) 등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사창동 구역의 신자들은 오늘날 남대문시장 자리에 해당하는 선혜청(宣惠廳)에 속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혜청 서리 조신행(趙愼行), 선혜청 사고지기(私庫直) 김춘경(金春景)의 처 유덕이(柳德伊)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존재를 통해 평민들이 중심이 된 사창동 신앙 공동체의 윤곽이 어렴풋이 잡힌다. 다산의 서제 정약횡과 그의 아내인 진사 한영익의 여동생도 사창동에 살고 있었다.
인근에는 현계흠의 약방을 비롯해 천주교 약방 카르텔이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었고, 과부들의 공부 모임 등 단위 조직으로 운영되던 소규모 공동체도 적지 않았다. 사창동과 회현동 등 남대문과 서소문 일원은 당시 천주교 명도회 조직이 가장 활성화된 구역이었다. 그리고 이 구역을 책임진 평민의 우두머리가 바로 이합규였다.
정약종의 책롱 사건으로 일제 검거령이 내렸을 때, 강완숙은 황사영과 이합규, 김계완 세 사람을 용호영의 김연이 집으로 긴급 대피시켰다. 이합규는 황사영과 나란히 교회를 위해 보호해야 할 인물 1순위에 들어 있었다. 이들이 검거될 경우, 조선 교회가 받을 타격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이합규는 각처를 돌아다니며 교리 교육을 전담했다. 특별히 그는 여성들과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한 교리 교육을 맡았다. 그의 강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문으로 된 「삼본문답(三本問答)」 1권과 언문 1권, 「진도자증(眞道自證)」 2권, 한글본 「성교일과(聖敎日課)」 2권을 바탕으로 교리 교육을 진행했다. 그의 교리 지식수준이 상당했다는 뜻이다.
사학매파 3인방 정복혜, 김연이, 윤복점 중 정복혜가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포교와 연락책의 역할을 맡았던 사학 매파 위에 이합규가 있었다. 한신애가 자기 집안의 노복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려고 굳이 이합규를 밤중에 청해온 것을 보면, 사학 매파가 감당하기 힘든 부분을 이합규가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합규는 최필제를 통해 입교했다. 「사학징의」의 공초에서 이합규가 자신의 혈당이라고 지목한 사람이 여럿 있다. 최필제, 김현우, 이국승, 정복혜, 한신애, 정광수, 현계완, 변득중, 이인채, 곽진우, 정명복의 관련 기록 속에 이합규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는 당시 교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이합규는 2월 초에 형조와 포청의 검거령을 듣고 김이우의 집에서 은신할 일을 모의했고, 강완숙에게 편지로 상의하자, 강완숙은 황사영이 먼저 피신해간 용호영 김연이의 집으로 이들을 보냈다. 며칠 뒤 검거망이 바짝 죄어오자 이들은 최가의 집과 이인채, 곽진우의 집을 거쳐, 반촌으로 달아났다. 3월 1일에 외숙 김득호 내외가 상황을 알아보려 반촌으로 이합규를 찾아갔고, 이튿날 강완숙의 여종 소명이 합류했다. 이합규는 이때 기찰 포교들에게 부친 이인찬과 함께 검거되어 형조로 끌려갔고, 세 사람은 간신히 달아났다. 이합규는 한 달 뒤인 4월 2일에 처형되었다.
이합규는 황사영과 함께 당시 서울 교회를 대표하는 평민 지도자였고, 서소문 인근 사창동 신앙 공동체를 이끌던 수장이었다. 주문모 신부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수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의 교리 교육을 맡아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주문모 신부에 대해서만은 주교주(周敎主)로 깎듯이 예를 갖춰 대답했고, 끝내 배교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의 신분 때문이었을까? 여러 사람의 공초가 이합규의 교회 내 위상을 가지런히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의금부에서조차 그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함께 달아나 숨었던 황사영이 붙잡히지 않았음에도 그를 바로 죽이고 말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가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 자료집’과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명단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은 너무 한 처사다. 당시 그의 위상이 결코 그렇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