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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리라
25: 20-22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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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13 ~ 17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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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출애굽기의 구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한 경로입니다. 동시에 출애굽기의 의미는 모든 인류와 개인의 구원의 경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장에서 6장까지는 출애굽을 위한 준비입니다.
7장에서 12장까지는 바로의 대면과 대결 그리고 10가지 재앙입니다.
13장에서는 출애굽을 결행합니다.
14장에서는 출애굽이 마무리됩니다.
15장에는 모세와 미리암의 출애굽 찬송이 나옵니다.
16장에는 광야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는 장면입니다.
20장에서 24장까지는 십계명을 주시고 율법을 설명하십니다.
25장에서 마지막장인 40장 까지는 성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막의 내용은 출애굽기에서 가장 깁니다. 백성들에 대한 구원은 순간이지만 구원 후의 신자들의 삶의 길은 길고 지속적인 것을 가르칩니다.
성막은 그 길이가 100규빗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50미터입니다. 너비는 50규빗 즉 25미터입니다. 60만이나 되는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작은 집입니다. 성막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등대와 떡 상과 분향단이 있었습니다. 법궤 안에는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두 돌비가 있었습니다.
성막이란 히브리말로 ‘미쉬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거처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하나님의 집이 성막입니다. 성막의 전승이 성전으로 이어집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하나님의 거처였습니다.
시편 11:4에는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라고 합니다. 하박국 2:20에는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7:46에는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 다윗이 하나님께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다고 합니다.
성전은 오늘의 교회로 전승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교회는 하나님의 속죄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에 오지 않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니 아무데서나 예배하자고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하고, 세상에 가서 섬겨야 진정한 예배입니다. 둘 중의 하나라도 빠지면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교회에서의 예배를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신자의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캐나다의 종교사회학자인 레지널드 비비(Bibby)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출석하지 않는 교인이 진정한 교인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자는 출석이라는 기본 의무를 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교회에 관해서는 휴가 중이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원하지만 교회는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현대인의 세속적 교회관을 극복해야 합니다.
반면에 현재 미국의 교회들은 주류교단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교단을 떠납니다. 점점 독립교회가 많아집니다. 이런 추세는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 질서와 영적 변화에 대해 교단들이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이 조금 새롭게 해보려고 하면 교단이 제동을 겁니다. 교단이 개교회의 성장과 변화를 제재하기 일수입니다. 교단이 개 교회의 성장을 발목 잡습니다. ‘교단성에 어긋난다’, ‘헌법에 위배 된다’,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후가 되면 교단의 붕괴를 가져올 조짐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어야 합니다. 교회 예배가 다시 부활되어야 하고, 교회의 변화가 시대를 이끌어야 합니다.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막 안의 속죄소에서 하나님께서 “거기서 내가 너희와 만나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를 만나시겠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만남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좌절인데 만나주신다니 다시 희망이 있습니다.
일전에 세종로에 일이 있어서 나갔습니다. 교보문고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카메라 폰으로 연시 찍어대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는가 했더니 어느 배우가 일인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영화 쿼터를 회복하라는 시위였습니다. 유명 배우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만나기를 원합니다. 오래 전에 강원도 어느 지방에 갔습니다. 그랬는데 교회의 어느 어린이가 TV에서 본 목사님이 왔다고 저에게 사인해 달라고 해서 해 주고 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만나니 좋아합디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리라는 성막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성막에서 만나주십니다.
출애굽기 25:22에는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하십니다.
성막의 속죄소 위에 두 그룹 사이에 속죄의 피를 붓는 곳에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모세와 만나십니다. 이 속죄소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모형이 속죄소입니다.
그래서 성막은 회막(The Tent of Meeting)이라 불립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천막입니다. 만나시는 속죄소는 자비의 보좌가 되었습니다. 법궤 위의 속죄소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표시입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다음 하나님을 만나길 싫어했지만 가죽 옷을 입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 3:21). 가인과 아벨은 각각 자신이 가꾼 제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 4장).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돌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세 이후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십니다. 만나서 할 일을 일러주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시는 한 방편이 성막입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할 말이 있는데 “만나서 말해줄께”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전화로 하지 않고 왜 만나서 하겠다고 합니까? 중요한 말은 만나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도 소홀하게 넘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나서 모세에게 말해 주시려고 속죄소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얼굴을 대한다’ 혹은 ‘만나다’라고 하는 것은 ‘화해’를 뜻합니다. 만나기 전에는 문제가 많지만 만나면 모든 얽혔던 문제가 풀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는 모습입니다. 만나지 않고는 막힌 담을 헐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만나시고 말씀하십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신비가는 “자기 내면의 깊이를 파고 들어간 그 깊이가 신의 깊이와 만나는 장소다. 사람의 내면에는 내오의 심소가 있고 그 정점에 신적 불꽃이 있어 이것으로 신과 사귀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자신 속에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로 성전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최상의 기도란 거룩함을 사모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만남이 없는 기도는 참 기도가 아닙니다. 최상의 말씀 묵상이란 말씀 속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남이 없는 묵상은 참 묵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행동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일전에 기독실업인회를 열심히 섬기는 어느 분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이 분은 아주 순박하고 좋은 신앙을 가진 분입니다. 작은 사업을 하지만 꿈이 크고, 신앙으로 감당하려고 애쓰는 분입니다. 이 분이 저에게 와서 요즘에 너무 사업이 어렵다고 하면서 그래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축복의 기회라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이런 때에 신앙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미래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좋은 스승을 한 분 소개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아기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이런 기도를 합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교회를 만나고, 좋은 책을 만나게 해달라고 합니다.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저를 찾아온 이 분은 좋은 스승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꼭 좋은 스승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은 성막에서 우리를 만나십니까? 이 곳이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만남의 장소입니다. 교회에 오시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교회에 오셔서 하나님을 꼭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 478장 2절의 가사를 보세요.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못 위로해주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로다”. 하나님을 만나면 쉼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평화가 시작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만나시면 죄를 용서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속죄소에서 사람을 만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속죄소에서 만나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 받습니다. 죄 사함을 얻게 됩니다. 속죄소란 헬라어의 ‘헬라스테리온’ 즉 화목제물이란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좋은 상사를 만나면 중요한 것을 얻습니다. 바로 기회(chance)와 변화(change)입니다. 좋은 사람만 만나도 얻는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면 얼마나 큰 것을 얻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 놀라운 체험을 우리 모두가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유머의 핵심 목표는 아이스브레이크(ice break) 곧 인간관계의 벽을 허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목표는 월브레이크(wall break) 즉 신인관계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신문에 이런 얘기가 났습니다. 미국에 월마트라는 보통 사람들의 백화점이 있습니다. 경영혁신을 통하여 미국에서 굴지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월마트가 벽지 파는데 인줄 아는 부잣집 자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월마트가 벽을 만드는 백화점이면 안 되겠지요. 벽을 허무는 가게가 되어야 하고, 벽을 없이하는 백화점이 되어야 합니다.
‘다모클레스의 칼’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모클레스는 주전 4세기의 시칠리아의 시라쿠스를 다스리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신하였습니다. 그는 참주에게 아첨조로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디오니시오스는 그 신하가 아첨을 잘 하는 것을 알고 잔치에 초대하여 한 올의 말총에 매단 칼 밑에 신하를 앉히고 음식을 먹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행복과 위기는 항상 함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을 생과 사 사이에서 조롱하지 않습니다. 이미 왕이신 하나님의 신하인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친구들이 침상 네 귀에 줄을 매달아 예수님께 내려 고침을 받게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이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을 때에 예수님은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곧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검은 말과 흰 말이 항상 공존하고 있답니다.
흰 말과 검은 말 가운데 어느 말이 이길까요? 힘이 센 말이 이긴답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있지.” 손자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누가 이겨요?”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단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나쁜 늑대에게 끊임없이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는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 그 먹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좋은 말씀을 듣고 죄 사함을 받으면 우리 속에 좋은 늑대가 자라고 이기게 됩니다.
결론
한 전문의에게 병원에서 긴급 호출을 하였습니다. 내출혈로 위급한 한 소년이 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의사는 자동차를 몰고 급히 병원으로 갔습니다. 자동차가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노란 모자를 쓰고 검정 점퍼를 입은 괴한이 권총을 들이대며 자동차를 강탈해 갔습니다. 의사는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예상보다 1시간 늦게 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소년은 의사가 도착하기 5분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강도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년을 살릴 수도 있었는데….” 의사는 아쉬워했습니다. 그런데 중년의 아버지가 소년의 주검을 끌어안고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노란 모자를 쓰고 검정 점퍼를 입은 이 소년의 아버지는 의사의 자동차를 강탈해 간 노상강도였습니다.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아들까지 죽게 합니다. 아담이 그랬고 아비의 죄악을 삼사 대까지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들 죽게 하셔서 우리 모두를 살게 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자기 고통을 자초합니다. 이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를 죄를 사하셔서 살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3:12에는 말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합니다.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가서 만나고 죄 사함을 받고 죄 없는 사람으로 삽시다.
히브리서 7:25에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함을 얻는 사람으로 삽시다.
이 전에서 하나님을 만납시다.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갑시다. 하나님께 나아온 자들은 하나님을 만나신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죄 사함을 받은 줄 믿습니다. 이 전을 주신 것을 기뻐하고 이 전을 사랑하세요.
만남과 사함이 있는 우리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