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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학교 장년교과 보충교재(예언의 신 인용구들/Ellen G. White Notes)
(1) 이 자료는 대총회 안교부가 매기마다 안교 장년교과와 함께 매일의 공부 내용과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력과 신선한 관점을 얻도록 돕기 위해 출판하는 보충교재 [Ellen G. White Notes for the Sabbath School Lessons]-예언의 신 인용구들을 한글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직 한글번역본이 없는 예언의 신 인용구는 게시자가 번역함)
(2) [활용방법] 매일의 교과를 공부한 후, 그날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2024년 3기 – 마가복음>
제7과 제자들을 가르치심 [1]
(Teaching Disciples: Part I)
<8월 10일/안, 서론>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그들이 십자가를 질 때 오히려 십자가가 그들을 들어 올려서 그들에게 꿋꿋함과 용기를 주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리켜 보인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땅의 낮은 곳에서 들어 올려 하나님과 가장 즐거운 교제를 누리도록 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경험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확신인가! (화잇주석, 마 16:24)
◎ 자신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을 위하여 구원의 대가를 치루셨다. 저들은 모든 능력을 다하여 주님만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은 자신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래서 자기를 단장하는 욕구로 가득 차 있다. 저들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라는 말씀에 대하여 전혀 생각지 않는다. 자기만족은 저들의 시야에서 그리스도를 가려 버린다. 저들은 온유와 겸손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저들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따라서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많은 사람은 이름만 가졌을 뿐이다. 저들은 회심하지 않았다. 저들은 자기을 드러낸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배우기 위하여 그분의 발 아래 앉은 것처럼 저들은 굴복하지 않는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다. (1기별, 80)
◎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품성을 올바로 알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데 실패한다. 자아를 기만하고, 그 경고와 책망이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
성경은 완전하고 분명하고 명백하다. 진실한 그리스도 제자의 품성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우리가 우리의 참된 품성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기만당하지 않으려면,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떨어야 한다. 이기심과 자기 과신을 극복하려면 끈덕진 노력을 해야 한다. 자기기만의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자아를 철저히 살펴야 한다. … 그대가 어떤 위험을 향하여 달려가지 않도록 그대 자신의 마음을 진실하게 다루어라. 진심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희생을 헤아려 보고 갑주를 입으라. 모본이신 분을 연구하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처럼 되라. (5증언, 332)
<8월 11일/일, 분명하게 보기>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 갈릴리 지경을 넘어 우상숭배가 성행하는 지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제자들은 유대교의 지배 세력에서 벗어나 이교의 예배와 더욱 밀접한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 주위에는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미신의 풍습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이러한 것들을 봄으로 이방인에 대한 저희의 책임을 느끼게 되기를 바라셨다. 이 지방에서 유하는 동안 그분께서는 백성을 가르치는 일에서 물러나 더욱 전적으로 제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려고 힘쓰셨다.
그분께서는 그분 앞에 기다리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실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먼저 홀로 떠나가서 그들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로 돌아간 후에도 나눠 주기 원하는 것을 즉시로 전달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시기 전에 그분께서는 장차 임할 시련을 견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그분께 대한 저희의 믿음을 고백할 기회를 주셨다. (소망, 411)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
베드로는 열두 제자의 믿음을 대변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반대와 거짓 설명이 물론 저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아직도 그들을 크게 혼란케 하였다. 그들은 저희의 길을 분명히 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일찍이 받은 훈련의 감화, 랍비들의 교훈, 인습의 영향 등이 여전히 진리에 대한 저희의 견해를 가로막았다. 때때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귀중한 빛줄기가 그들을 비췄지만 자주 그들은 암중모색하는 사람들과 같았다. 그러나 믿음이 큰 시련에 부딪히기 전인 이날에 성령께서 능력으로 그들에게 임하였다. 잠시 동안 저희의 눈은 “보이는 것”에서 떠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후 4:18). 인성의 모습 이면에서 그들은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식별하였다. (소망, 411~412)
◎ 베드로가 고백한 진리는 신자의 신앙의 기초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영생이라고 선언하신 진리이다. 그러나 이 지식을 소유하였다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 진리는 결코 자신의 지혜나 우수함으로 베드로에게 계시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하늘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8). 오직 양자(養子)의 영께서만 … 하나님의 깊은 것을 우리에게 계시할 수 있으시다. …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시 25:14)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식별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증거였다(요 6:45). (소망, 412)
<8월 12일/월, 제자도의 대가>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구주께서는 돌아가셨다가 무덤에서 다시 부활할 것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 그리고 천사들도 나타나서 주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주고자 힘썼다. 그러나 제자들은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시적 해방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희망의 중심이 되어 있는 주님께서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셔야 한다는 생각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었던 말씀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시련의 때가 이르자 그들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음이 발견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그분께서 그들에게 미리 경고하지 않으신 것처럼 그들의 희망을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미래가 펼쳐졌던 것처럼 우리 앞에는 예언으로 미래가 분명히 펼쳐져 있다. 은혜의 시기의 끝과 환난의 때를 위한 준비에 관련된 사건들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마치 이 중요한 진리들이 그들에게 전혀 계시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될 영향력을 모두 빼앗아 버림으로 그들이 환난의 때 준비되지 못하게 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쟁투, 594)
◎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분의 바로 앞에 닥친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펼쳐 보이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였다. 구주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명령하셨다. 사탄은 베드로를 통하여 말하고 있었고 그로 유혹자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베드로는 사탄이 거기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기만자의 실재를 간파하실 수가 있었으며, 베드로에게 하신 그분의 책망은 진짜 그 원수를 책망하신 말씀이었다. …
사탄의 사업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려고 애쓰실 때 예수님의 용기를 꺾어 놓는 일이었고, 베드로의 말은 사탄이 듣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던 바로 그 말이었다. 그의 말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정 반대가 되는 말이었다. 이런 성질의 특징을 지닌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런 말들은 다 사탄의 선동으로 발해진 말이다. … 사탄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낙망케 하고 낙심시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생각을 해 낸 장본인을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신다. (화잇주석, 마 16:22~23)
◎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 아름다운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인식하면서 일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고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생애에 따르는 모든 환경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모본을 자신의 지침으로 삼을 것이다.
모든 참 되고 자아 희생적인 하나님의 교역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재물과 목숨을 기꺼이 바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라고 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도움이 요구되는 곳에 열렬하고 사려 깊은 조력을 아끼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동료들을 위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낸다. 그 참된 그리스도인은 봉사하다가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진주 보석들을 거두시기 위하여 오실 때에 그는 자신의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1기별, 86)
<8월 13일/화, 변화산 그리고 산 아래 사람들>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분과 함께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변화산의 경험에서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 거기서 예수님의 용모는 변화되어 해처럼 빛났다. 그의 옷은 새하얀 색이었으며 새하얀 빛을 반사하였다. 모세는 예수께서 두 번째 나타나실 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사람들을 대표하여 그곳에 나타났다. 죽음을 당하지 않고 변화되어 승천한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변화함을 입고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자들을 대표했다. 제자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예수님의 뛰어난 위엄과 그들을 덮고 있는 구름을 바라보았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 두려운 위엄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초기, 164)
◎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시옵소서.” 죄에 눌린 얼마나 많은 영혼이 그 기도를 반복하고 있는가. 그런데 동정이 많으신 구주께서는 이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신다. 우리를 하늘과 연결시키고 흑암의 권세와 겨루어 싸울 힘을 주는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 된 특성을 정복하고 아무리 강할지라도 모두 시험에 대항할 수 있는 방도를 그리스도 안에 준비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들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저희의 어쩔 수 없는 무가치함 중에도 긍휼하신 구주의 자비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도록 하라. 자신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쳐다보라. 사람들 가운데 거닐면서 병든 자를 고치고 사귀를 내쫓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에도 역시 능력 있는 구속주이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그러므로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라는 그분의 약속을 굳게 붙잡으라. 그분의 발아래 몸을 던지고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당신께서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으라. 그대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결코 멸망할 수 없다. 정대로 멸망할 수 없다. (소망, 429)
◎ 우리가 만일 초월하신 구주의 능력으로 구원과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사탄과 그 부하들의 세력과 악의에 놀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우리는 집에 빗장을 채우고 자물쇠를 잠금으로 악한 자들의 손에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 매우 주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힘과 수단으로는 그 공격에 저항할 수 없는 악한 천사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접근해 올지라도 거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은 별로 없다. 만일 사탄의 뜻대로 하게 한다면 그는 우리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우리의 육체를 망가뜨리고 고통스럽게 하며 생명과 재산을 파괴할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기쁨은 불행과 파멸에 있다. …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분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다. 능력이 뛰어난 천사들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파견된다. 악한 자는 하나님께 그분의 백성들을 둘러 진치고 있는 보호의 벽을 깨뜨릴 수 없다.(쟁투, 517)
<8월 14일/수, 누가 가장 크냐> 예언의 신 보충자료
◎ 한번은 제자들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크게 여김을 받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의 말이 주님의 귀에 들리게 하려 하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채시고 제자들에게 겸손에 대한 교훈을 주실 기회를 마련하셨다. 그 교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인 작은 무리뿐만 아니라 말세에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한 자들은 저희 형제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크게 평가될 사람들이 그들이 보기에는 작다고 생각되는 자들이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6~37).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귀한 교훈이 되는가! 자신의 길에 바로 놓여 있는 삶의 의무를 간과하고 어린아이에게조차 자비와 친절, 예의와 사랑을 베풀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성화, 55~56)
◎ 하나님께서 통치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영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신들이 하나님의 유산에 대한 주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이런 자기를 높이는 정신에 굴복하는 사람은 자신을 원수의 지배 아래 두게 된다. 만일 복음 사역자들이 그의 모든 생각과 상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는 그것들에서 돌아서서 그것들을 반대하며 마음속에 있는 비꼬는 말과 쓴소리를 사역자들과 사역에 쏟아붓는다. …
예수님께서는 순결하고 완전한 거룩한 삶을 통해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다. 하늘에서 가장 높임을 받으신 그분은 봉사할 준비가 가장 잘 되어 계셨다. 가장 존귀하신 그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분의 왕국에서 누가 가장 큰지에 관해 논쟁을 벌이던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다. (This Day With God, 192).
◎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 때때로 그분은 위대한 사업을 행하시기 위하여 가장 미약한 그릇을 택하신다. 이는 그분의 능력이 약한 사람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표준에 따라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표준을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크게 보이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께도 크게 보이고, 우리에게 작게 보이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께도 작게 보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재능을 평가하고, 우리의 일을 택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분을 위해 지도록 정해 주신 일을 짊어지고 그분께 나아가 쉼을 찾아야 한다. (실물, 363-364)
<8월 15일/목, 지옥에 떨어진 멀쩡한 사람> 예언의 신 보충자료
◎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영생을 위한 그리스도인 경주의 특징을 나타내는 성실한 목적이 다음과 같이 지적되어 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 시기, 악의, 악한 생각, 악한 말, 탐심,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이 불멸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성공적으로 경주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버려야 할 무거운 짐들이다. 죄악으로 인도하고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모든 습관이나 행위는 어떠한 희생을 하더라도 반드시 버려야 한다. …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45). 몸을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발이나 손을 잘라 버리거나 눈까지도 뽑아 버려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악을 버리기 위하여 얼마나 더 열심을 내어야 할 것인가! (행적, 312~313)
◎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똑같은 크기로 여기지 않으신다. 유한한 인간의 평가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의 평가에는 범죄의 등급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행동에 나타난 이런저런 잘못이 아무리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어떤 죄도 작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작은 것으로 여기고 처리하는 죄도 하나님께서는 큰 범죄로 간주하시는 바로 그런 죄가 될 수도 있다. 주정뱅이는 멸시받고 그의 죄 때문에 하늘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말을 듣지만, 반면에 교만과 이기심과 탐욕은 책망받지 않고 넘어간다. 그러나 이것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죄들이다. (5증언, 337)
◎ 영원 지옥설로 말미암아 초래되어 온 악은 사람의 마음으로 능히 헤아릴 수 없다.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고 동정이 넘치는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으로 어두워지고 공포로 가려졌다. 사탄이 하나님의 품성에 물들여 놓은 거짓된 색깔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우리의 자비로운 창조주를 두려워하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심지어 증오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인가? 강단에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온 세계에 퍼져 있는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무서운 견해는 수천 그리고 수백만의 회의론자와 무신론자들을 만들어 냈다.
영원 지옥설은 바벨론이 모든 나라에 마시게 하는 “진노의 포도주”라는 거짓 교리 중 하나이다(계 14:8, 17:2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들이 이런 이단설을 받아들이고 거룩한 단에서 그것을 전한다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 만일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증거를 버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가르쳤다는 이유로 거짓 교리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바벨론에 선고된 정죄를 받게 된다. 우리는 바벨론의 가증한 독주를 마시게 된다. (쟁투, 536~537)
<8월 1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우리 앞에 있는 과업” (청지기, 44)
세상은 경고를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이 일이 위탁되었다. 우리는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진리를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봉사 사업에서 필요하다면 생명 그 자체까지라도 즐겨 희생할 수 있는 희생정신을 가진 병사들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짧은 시간에 마쳐야 할 큰 사업이 있다. 우리는 이 사업을 깨닫고 충성스럽게 이를 실천해야 한다. 고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결정적인 노력을 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될 것이며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 묻은 깃발을 높이 들고 사탄을 대항해 싸우는 십자가의 군대에 가담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이 사업은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극기와 십자가가 인생의 모든 여정에 서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보화를 얻는 자들도 수고와 희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영원한 보상을 구하는 자들이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그것을 얻겠다고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 ““누가 가장 크냐”” (소망, 432–442).
가버나움으로 돌아갈 때 예수께서는 백성을 가르치던 잘 알려진 장소로 발길을 돌리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임시로 그분의 처소가 될 집을 조용히 찾으셨다. 갈릴리에서 더 머무는 동안 그분의 목적은 무리를 위하여 일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것이었다.
갈릴리 지방을 여행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다시금 그분 앞에 놓인 사건들에 대하여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려고 힘쓰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게다가 그분은 그분이 배반을 당해 원수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이상하고 엄숙한 예고를 하셨다. 제자들은 아직도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큰 슬픔의 그림자가 그들 위에 드리웠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경쟁하는 정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크게 간주될 것인지에 대하여 서로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이 분쟁을 예수님께 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다른 때와 같이 그분 곁에 바싹 접근하지 않고 뒤처져 갔으므로 저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갔을 때는 예수께서 그들보다 앞서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다 알고 그들에게 권면하고 훈계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저들이 마음을 열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조용한 시간이 이르기까지 기다리셨다.
그들이 동네에 도착한 직후에 성전세를 받는 자가 베드로에게 와서 “너의 선생이 반 세겔(성전세로 바치는 금액 – 난외 주석)을 내지 아니하느냐”라고 물었다. 이 세는 국가의 세금이 아니라 종교적인 기부금으로 모든 유대인은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바치게 되어 있었다. 그 세를 바치지 않겠다고 하면 성전에 대해서 불충실하다고 간주 될 것이었는데 랍비들은 이것을 매우 무거운 죄로 평가하였다. 랍비들이 만든 법에 대한 구주의 태도와 인습의 옹호자들에 대한 솔직한 책망은 그분이 성전의 봉사를 전복시키려고 한다고 비난할 구실을 주었다. 이제 그분의 원수들은 그분에 대해 의혹을 품게 할 기회를 포착했다. 세금 징수자가 쾌히 그 일에 협력하였다.
베드로는 세금 받는 자의 질문 가운데서 성전에 대한 그리스도의 충성에 관계되는 은근한 암시를 알아차렸다. 그는 선생님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한 열성으로 주님과 상의도 하지 않고 그분께서 세를 바치실 것이라고 성급하게 대답해 버렸다.
그러나 베드로는 질문한 자의 목적을 일부밖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세내는 것을 면제받는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약간 있었다. 성소 봉사를 위하여 구별되었던 모세 당시의 레위인들은 백성 가운데서 기업을 받지 못했다.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당시에도 여전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을 위하여 특별히 헌신한 자로서 취급받았으며 그들에게는 성전의 유지를 위한 연세(年稅)가 요구되지 않았다. 선지자들도 역시 면제를 받았다. 랍비들은 예수님에게 세를 요구함으로써 선지자나 선생으로서의 그분의 당연한 권리를 무시하고 일개 평범한 사람을 대하듯이 그분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세금을 거절하시면 성전에 대하여 불충(不忠)한 것으로 해석될 것이요 반면에 세를 바치시면 그분이 선지자가 아니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였으나 이제 그는 선생님의 신분을 설명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예수께서 세를 바칠 것이라고 수금하는 자에게 대답함으로 베드로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유포시키려고 애쓰는 그분에 대한 거짓된 관념을 사실상 인정하였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갔을 때 구주께서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라고 물으셨다. “타인에게니이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백성이 저희 왕을 위하여 납세(納稅)를 하지만 왕의 자녀들은 면세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분께 드리는 봉사를 유지하기 위한 요구를 받으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이런 의무를 행할 필요가 없으셨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면세된다면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 되는 그분에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
만일 예수께서 한마디 항의도 없이 성전세를 바치셨더라면 그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사실상 승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며 그분의 신성도 부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 요구에 응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주장을 하게 된 바탕에 대해서는 부인하셨다. 세를 지불할 돈을 준비하심으로 그분은 자신의 신적인 신분에 대한 증거를 보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분이므로 그 나라의 일개 시민처럼 세를 낼 의무가 없으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라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지시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신성을 인성으로 가렸지만 이 이적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이분이 바로 다윗을 통하여 선언된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0~12)라고 하신 그분이신 것이 분명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분이 세를 바칠 의무가 없음을 명백히 하는 한편 그 문제에 대해서 유대인들과 쟁론하지 않으셨는데 그 까닭은 유대인들이 그분의 말씀을 곡해하여 그분께 등을 돌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분께서는 세를 내지 않으심으로써 저들의 분노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려고 부당한 요구였지만 그 일을 행하셨다. 이 교훈은 제자들에게 크게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성전 봉사에 대한 저희의 관계에 현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기존 질서에 대해서 쓸데없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가능한 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오해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피해야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한 가지 원칙이라도 희생시켜서는 안 되지만 어느 때든지 할 수만 있으면 논쟁을 피해야 한다.
베드로가 바다로 나가고 그리스도와 제자들만 집에 있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다. 예수님 앞이라는 사실과 또 그분의 질문은 그들이 노중에서 다투던 동안에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그 문제를 보게 하였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양심의 가책으로 잠잠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죽을 것이라고 저들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들의 이기적인 야심은 그분의 이기심 없는 사랑과는 심한 대조가 되었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할 큰 시련에 대하여 대화하려고 애쓰셨다. 그들이 예수께서 그들에게 알려 주려고 하셨던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다면 그들은 쓰라린 고뇌와 절망을 면했을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사별과 낙담의 시기에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무엇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토록 똑똑히 말하였는데 그분이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리라는 사실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의 마음은 왕국이 건설될 것이라는 소망으로 다시금 불타올랐다. 이것이 그들로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일으키게 했다. 베드로가 바다에서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그에게 구주께서 하신 질문에 대해서 말했다. 마침내 한 제자가 감히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여쭈었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을 주위에 모으고 그들에게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는 제자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숙성과 감명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식별하신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왕국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 무지가 그들의 다툼의 표면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참된 원인은 더 깊숙한 곳에 있었다. 왕국의 성질을 설명함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얼마 동안은 저희의 분쟁을 진정시킬 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완전히 깨달은 후였을지라도 우월함에 대한 질문만 나오면 그 다툼은 재연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신 후에는 교회에 재난이 닥쳐왔을 것이다. 가장 높은 자리를 탐내는 분쟁은 하늘에서 대쟁투를 발발시키고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내려오시게 하여 죽게 한 바로 그 정신의 발로였다. 그분 앞에는 보좌를 두른 모든 천사보다 탁월한 영광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아침의 아들” 루시퍼의 환상이 떠올랐다. 루시퍼는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2, 14)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자고심 때문에 하늘 궁정에는 분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많은 천사가 추방되었다. 루시퍼가 진실로 지극히 높은 자와 같이 되기를 바랐다면 하늘에 있는 자신의 지정된 자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극히 높은 자의 정신은 이기심 없는 봉사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루시퍼가 원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지 그분의 품성은 아니었다. 루시퍼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가장 높은 지위를 구하였으니 그의 정신에 자극되어 움직이는 자마다 그와 같은 일을 행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간과 불화와 분쟁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지배권은 가장 강한 자의 전리품이 된다. 사탄의 왕국은 완력의 왕국이다. 사람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하거나 자신이 더 높은 자리로 오를 수 있는 디딤돌로 생각한다.
루시퍼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를 원한 반면 높임을 받은 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빌 2:7~8)셨다. 이제 십자가가 그분 바로 앞에 있었는데 그분의 제자들은 이기심 즉 사탄의 왕국의 원칙으로 가득 차서 저희 주님을 동정할 수 없었으며 그들을 위하여 그분께서 수욕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분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매우 부드러우나 엄숙한 어조로 옳지 못한 것을 시정하려고 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늘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원칙이 무엇인 것과 하늘 조정의 표준에 의하여 평가받는 참된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이셨다. 자만과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는 동기로 움직이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생각했으며, 그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하나님께 어떻게 보답할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받을 보수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사탄의 반열에 동참했으므로 하늘나라에서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었다.
명예에 앞서 겸비가 있다. 하늘은 침례자 요한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꾼을사람들 앞에서 높은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선택한다. 가장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가 하나님 사업에서는 가장 능률적인 사람이다. 하늘의 지성들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힘쓰는 자와 협력할 수 있다. 하늘의 도움의 필요를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자는 그것을 받기 위해 간구할 것이다. 그리하면 성령께서는 그가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심령을 튼튼하고 고상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통한 후 그들의 죄 가운데서 멸망해 가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일하러 나갈 것이다. 그는 사명을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았으므로 많은 학식과 지적으로 슬기 있는 자들이 실패하는 곳에서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성공을 위해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높일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제쳐 놓으신다. 주께서는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사업에서 제거된다고 하여 그 사업이 중지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욱 큰 권능을 가지고 전진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나라의 성질에 대해서 교훈을 받는 것으로 넉넉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나라의 원칙에 그들을 일치시켜 줄 마음의 변화였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불러 그를 제자들 가운데 세운 후 그 어린이를 그분의 팔로 친절하게 안으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 자기 부정, 신뢰하는 사랑은 하늘이 가치 있게 여기는 속성들이다. 이 속성들이 진정한 위대함의 특성들이다.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그분의 나라는 세속적인 위엄이나 외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이런 모든 구별이 예수님의 발아래서는 잊혀진다.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무지한 자가 계급이나 명성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모든 사람이 피로 산 영혼의 자격으로 서로를 대하며, 그들을 속량해서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를 모두가 다 의뢰한다.
진실하고 통회하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하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계층이나 재산이나 지적 위대함이 아닌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여부에 따라 사람들에게 그분의 인을 찍으신다. 영광의 주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을 만족히 여기신다. “주께서 또 주와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시 18:35)라고 다윗은 말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사 66:1~2)리라.
구주의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자아에 대한 불신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도 그 대답 중에 특별히 지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한 경우를 들어서 자기의 행동이 옳았는지 질문하게 되었다. 그는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그 일을 공개하였다. 그는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람을 제지함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주님의 명예를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것을 위하여 시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저희 잘못을 시인하고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들였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리스도와 친숙하다는 것을 보이는 자들은 아무도 배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과 사업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마음을 연 자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동기를 파악할 수 없었던 제자들은 이 사람들을 낙심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했다. 예수께서 더 이상 친히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고 저희 수중에 사업이 맡겨졌을 때 그들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정신에 빠지지 말고 저희 주께서 보이신 바와 같은 원대한 동정을 나타내야 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일에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정당화시켜 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교사이시므로 우리는 판단하거나 억제하지 말고 각기 예수님의 발 아래 겸손히 앉아서 그분에게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 영혼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관용하는 사랑을 드러내실 통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지닌 자들을 낙심시킴으로 그분께서 세상에 비추기를 원하셨던 빛줄기를 차단하지 말도록 얼마나 조심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이끌고 계셨던 사람에 대하여 한 제자가 보인 가혹함과 냉정함-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던 자를 요한이 금한 것과 같은 행동-은 그 발을 돌이켜 원수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영혼을 잃어버리게 하는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45)라고 부언하셨다.
왜 이토록 중대한 말씀을 하셨을까? 그 까닭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제자들이 저희 동료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하늘의 엄위(嚴威)하신 분께서 보이신 것보다 관심을 덜 보여서 되겠는가? 영혼마다 무한한 값을 치렀으므로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가게 하여 그를 위한 구주의 사랑과 치욕과 고뇌가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죄를 범하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마 18:7)다. 사탄의 충동을 받은 세상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반대하고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취하고도 여전히 이 일을 행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우리 주께서는 그분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분의 품성을 그릇 나타내는 자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신다. 따라서 무리는 기만을 당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된다.
죄에 빠지게 하여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습관이나 행습은 무엇이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버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영혼에 유익이 될 수 없다. 영원한 의의 원칙을 어기는 자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따를 수 없다. 그리고 한 가지라도 마음에 품은 죄는 품성을 타락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기에 넉넉하다. 몸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발이나 손을 절단하거나 심지어 눈을 빼버리는 일이 있거든 하물며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힘써야 할 것인가!
의문(儀文)의 제사에서는 제물마다 소금을 쳤다. 향을 피우는 것과 같이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만이 그 제사를 하나님께 가납 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관습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롬 12:1)고자 하는 자들은 다 구원하는 소금인 우리 구주의 의를 받아야 한다. 그때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 소금이 방부(防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 중에 죄악을 방지하게 된다(마 5:13).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즉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 경건의 모양만 있다면 선을 위한 능력은 조금도 없게 된다. 그런 생애는 세상에 구원하는 감화를 끼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그대의 활력과 능력은 그대가 나의 영을 받는 여부에 달려 있다.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려면 그대는 나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경쟁심, 이기심, 높은 지위에 대한 욕심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부를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부를 구하는 그런 사랑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회개하는 죄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에 그 눈을 고정하도록 하라. 그는 바라봄으로써 변화된다. 그의 공포는 기쁨으로, 의심은 소망으로 변한다.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오른다. 돌 같은 마음이 부서진다. 사랑의 조수가 심령에 밀려 들어온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신다. 우리가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를 아는 자이신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일하면서 멸시와 조롱과 경멸을 받고 그분의 사명을 성취하기까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쫓기신 모습을 볼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고 십자가상에서 고뇌의 죽음을 당하시는 그분을 보게 될 때 자아는 더 이상 인정받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냉담함과 무기력과 이기심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주님을 위해 진정한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사랑하는 그분을 위하여 시련이나 치욕, 박해를 견디기를 기뻐할 것이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믿음이 비록 약하고 그의 발걸음이 어린이의 발걸음처럼 흔들거릴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무도 낮게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은 모든 것, 그것이 교육이거나 품위거나 품성의 고상함이거나 그리스도인 훈련이거나 혹은 신앙의 경험이거나 간에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우리보다 은혜를 적게 받은 자들에게 빚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의 한도 내에서 그들을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 우리가 강하다면 약한 자의 손을 붙잡아 주어야 한다.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 영광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을 섬기는 것을 기뻐한다. 많은 좋지 못한 품성의 특성을 가진 불안에 떠는 영혼들이 그들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천사들은 언제나 자기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있다. 그들은 자아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하며, 가장 절망적인 환경에 처한 자들과 함께 있다. 그리고 이 봉사에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은 협력할 것이다.
이 작은 자 중 하나가 정복당하여 그대에게 잘못을 행할 때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힘쓰는 것이 그대가 할 일이다. 그가 먼저 화해하려고 힘쓸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의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온유한 심령으로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갈 6:1)며 실수한 자에게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그의 실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폭로함으로 그에게 모욕을 주거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죄나 실수를 공개함으로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일이 없게 하라. 종종 실수한 자에게 진리를 분명히 말해 주어,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고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는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지 말라. 그대의 모든 노력은 그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 되게 하라. 영혼의 상처를 치료할 때 가장 섬세한 접촉과 가장 세심한 감정이 필요하다. 갈보리에서 고난을 당하신 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만이 이 경우에 그 효력을 낼 수 있다.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으로 형제가 형제를 대우하되 성공하면 그대는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여 허다한 죄를 덮”(약 5:20)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노력해도 효과가 없을 수 있다. 그런 때는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의 연합된 감화로 먼저 간 사람의 감화로는 성공하지 못한 점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그 사건에 관계가 없으므로 더 공정하게 행동할 것이며 이 사실은 실수한 자에게 저희의 권면을 더욱 무게가 있게 해줄 것이다.
그래도 그가 저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 문제를 전체 신자 앞에 내놓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자로서 교인들은 범죄자가 회복되도록 연합해서 기도하고 사랑의 탄원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 그분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 방황하는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간구하실 것이다. 영감을 받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라고 말한다. 이 합동 제의를 거절하는 자는 자신을 그리스도께 묶는 끈을 끊음으로 교회의 교제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의 자비에서 끊긴 자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이전 형제들은 그를 멸시하거나 등한히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우리 안으로 인도하려고 힘쓰시는 잃어버린 양 중의 하나로서 친절과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도록 하라.
실수한 자를 취급하는 일에 대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교훈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레 19:17)라는 교훈을 더 구체적인 형태로 반복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의무, 곧 오류와 죄 가운데 빠진 자들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등한히 하면 그는 그 죄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막을 수도 있었던 죄악 때문에 마치 우리 자신이 범행한 것과 같은 책임을 진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을 지적해야 하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 자신이다. 우리는 그 잘못을 우리 사이에서 비평이나 비난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설혹 교회에 제출된 후에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실수에 대한 정보는 믿지 않는 세상에는 걸림돌이 될 뿐이며,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함으로 우리 자신도 해를 받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시정하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될 수 있는 대로 형제들의 비판에서 그를 보호하고 믿지 않는 세상의 비난에서는 더욱 그를 보호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 자신도 실수하므로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유하심이 필요하다. 그분께서 우리를 대해주시기를 바라는 대로 우리도 서로를 대접하라고 그분께서 명령하신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대는 하늘의 대사로서 행동하고 있다. 그대의 사업의 결과는 영원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큰 책임을 홀로 지는 것이 아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말씀을 순종하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함께 계신다. 교회의 회중에게 임재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그 수가 비록 적을지라도 그곳에 계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심으로 인성으로 제자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시련에 동참하며 그들의 고난을 동정하시고, 신성으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음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셨다.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하늘의 천사들은 사람들과 연합하여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자들과 동조하고 활동한다. 그리고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에 하늘의 모든 능력은 인간의 능력과 연합하기 위하여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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