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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의 허와 실
일제가 남긴 땅이름
모닥불이 소나기에 사그라지듯 식어버리는 국어순화운동 이야기
우리는 주기적으로 신문이나 방송에서 국어순화운동과 한글 전용론의 필요성에 대하여 많은 지면과
시간을 들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도 모닥불이 소나기에 사그라지듯이 식어버리고 어디를 가나 외국어 간판이 판을 친다.
‘큰 창자염’보다는 ‘대장염’으로, ‘허파병’ 보다는 ‘폐병’으로, ‘염통병’보다는 ‘심장병’으로, 수학시간에는 ‘두 변 같은 세모꼴’보다는 ‘이등변 삼각형’으로, 운동경기 중계방송에서는 ‘문지기’보다는 ‘골키퍼’로,
‘모서리차기’보다는 ‘코너킥’으로 하는 것이 교양인이 쓰기에 더 세련되어 보이는 모양이다.
마치 모서리차기는 홑바지저고리를 입고 뛰는 어설픈 동작으로, 코너킥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세련된
동작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대장염이나 위암은 사람이 앓는 병이고 창자염이나 밥통 암은 짐승들이 앓는 병쯤으로 생각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 우리 것을 천시하는 언어의 습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본다.
한 예로 ‘최고위원’이라고 하면 흡족해 하고 ‘으뜸위원’이라고 하면 왠지 조금 섭섭한 느낌이 드는 것이
라든지 ‘집’보다는 ‘댁’이, ‘고맙습니다’보다는 ‘감사합니다’가 더 높임말로 알고 있다든지 또 한길이나
큰길이라는 우리말을 두고 하필이면 대로大路라는 이름을 붙여서 강동대로, 송파대로, 올림픽대로 등
으로 부르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 많은 길 이름 중에서 우리말의 정취를 풍기는 이름은 아리랑 고개길, 노들길, 뚝섬길, 애오개길,
여의나루 등 전체의 약 2~3%에 불과하다.
‘웃긴내’(위에 있는 길다란 내란 뜻)를 ‘상장천上長川’으로, ‘여우내’(폭이 좁은, 살찌지 않은 여윈 내)가
‘여수麗水’로 변하였다.
땅이름 중에서 반드시 우리말로 바꾸어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본인들이 일본식
으로 지어 놓고 간 사람이름과 땅이름들이다.
일찍이 우리 문화를 섭취했던 일본 땅에는 우리말이 접붙여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일본 최고의 고전 시가집인 <만요슈万葉集>는 숫제 우리말로 불린 노래라지만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우리에게는 원래 일본식 사람 이름이나 땅 이름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식 땅 이름과 사람 이름들이 지금도 버젓이 쓰이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순자, 영자, 숙자,
옥자 등의 사람 이름과 중랑천, 중지도, 윤중제 등의 땅이름들이다.
사람 이름은 그 동안 세월이 흘러 늙어 죽으니 점점 줄어들고, 한편에서는 한글세대 문화권이 형성됨에
따라 순수한 한글 이름이 매년 5만 명씩이나 생겨나고 있으니 앞으로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만,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줄도 모르고 쓰고 있는 일본식 땅이름들이다.
‘중랑중학교’의 ‘중랑’은 초대 교장인 민범식 선생이 그 지역을 흐르고 있는 ‘중랑천’의 ‘중랑中浪’을
따서 지은 교명이다.
그 당시에는 서울의 지명과 하천 이름을 세심하게 살펴서 심사숙고하여 지은 이름이었다.
‘중랑’은 조선 정조 때의 ‘중랑포계中浪浦契’라고 기록되어 있는 단 하나의 자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원래 ‘량梁’은 좁은 물가나 바닷가의 물목이나 돌다리나 또는 물길을 막고 한군데만 터놓아
그곳에 고기 잡는 통발이나 발을 설치했던 곳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훈몽자회에도 량梁을 ‘수교水橋, 수언水堰’이라고 하여 ‘다리’ ‘물막이’ ‘보’ ‘방죽’을 뜻하고 있다.
‘량梁’은 들보나 다리를 의미하니 우리말의 ‘들’ ‘돌’ ‘달’의 한자 표음이다.
좋은 예로 서울 ‘노량’을 ‘노들’로, 이순신의 명량대첩의 ‘명량鳴梁’을 ‘울돌’로, 김포의 ‘손량孫梁’을
‘손돌’로 부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경남 거제의 가배량加背梁과 칠천량漆川梁, 경남 사천의 구라량仇羅梁, 충남 서천의
마량馬梁, 경남 남해 설천의 노량露梁 등의 지명에도 ‘랑浪’이라는 단어는 한곳도 찾아볼 수 없다.
중량中梁이 우리나라 지도에 중랑中浪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제작한 지도 이후부터이므로
일본식 지명 변경의 잔재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중랑천’은 ‘중량中梁천’으로, ‘중랑중학교’는 ‘중량中梁중학교’로 그 명칭을 고쳐야 한다.
아울러 삼랑진도 삼량진으로 고쳐 불러야한다.
또 중지도라는 단어를 보자. 중지도中之島는 일본말 나카노시마(中之島)를 한자로 적은 한국음으로서
일본 오사카 북쪽 덴마가와(天滿川)와 요도가와(舊淀川)의 하류에 있는 도지마가와(當島川)와 도사
보리가와(土佐堀川)의 사이에 생겨난 동서 35㎞의 길다란 섬과 가고시마현에 있는 화산섬, 그리고
시마네현의 도젠(島前)과 도고(島後)사이에 있는 섬의 이름들이다.
윤중제 역시 일본말 와주우테이(輪中堤)를 한자로 적은 한국음으로 와주우(輪中)란 에도 시대(江戶時代 :
1603~1867년)에 홍수를 막기 위해 온 마을을 둑으로 둘러쌓아 물막이를 이룬 강의 내리막 어귀에 있는
마을들의 이름이다.
와주우테이의 ‘테이’는 와주우에 쌓은 둑이란 말로서 우리말의 방죽, 강둑, 방천둑과 비슷한 것이다.
중지도와 윤중제라는 단어는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서기1861년)나, 신기철, 신용철씨가
지은 1974년도 판 <새우리말 큰사전> 등에도 없는 말이며, 1982년판〈우리말 국어사전〉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2세들의 교육 장소인 중랑 초등학교, 중랑 중학교, 윤중 초등학교, 윤중 중학교의 이름이 일본말에서
기인된 것임을 알고서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무신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윤중중학교를 개명하기 위하여 여론을 일으켰을 때 교육 당국의 뜨뜻미지근한 반응도 문제였
지만 한술 더 뜬 것은 학부모들의 반응이었다.
우리아이가 졸업한 후에 바꾸라는 주장이었다.
그 말대로 기다린다면 신입생들이 계속 들어오니 영원히 바꿀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런 줄 몰랐어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바꾸어 우리 아이 졸업장에는 윤중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들어가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해야 옳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졸업卒業’이라는 말도 일본말에서 온 것이다.
‘필업畢業’이다.
10여 년 전에 유관순열사 후손에게 이화여고 명예졸업장을 드린 적이 있다.
아마 유관순의 영혼은 일본식의 ‘졸업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 고쳐지지 않고 있는 일본식 단어가 이것뿐이랴!
‘계단’ ‘경례’ 등 일상용어를 비롯하여 ‘물리’ ‘화학’ ‘삼각함수’ 등의 수학이나 과학 분야의 전문 학술
용어에도 그대로 포진하고 있다.
또 우리말이 서구화된 경우도 많은데 예를 들면 ‘존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할까 두렵다’는 ‘없어질까
두렵다’로, ‘정확성에 방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로, ‘폭넓은 논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폭넓게 논의 할 수 있다’로 표현하면 될 것을 굳이 국적불명의 괴상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이상규 전 국립 국어원장이 지적한 대로 ‘한국형 메티클러스터 육성을 위해 홍릉 바이오 헬스클러
스터를 조성하고 ~ 아이디어부터 마케팅까지 전 주기를 지원하는 바이오 헬스 비즈니스 코어센터를
운영한다.’ 라는 식의 문장은 우리의 언어 소통을 막는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개구리가 미지근한 물에 편안해하다가 결국 죽어가듯이 우리의 사고가
서서히 외국 사고에 젖어버리게 한다.
좋은아침!, 좋은하루! 라는 아침인사도 굿모닝의 다른 말이 아니다.
예전의 <한국 문학전집>에 나오는 아름다운 우리 문체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지금 우리는 외부적인 요인보다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외국사고와 일제 식민 사고로부터 먼저
벗어나는 정신 운동을 펼쳐야 할 때이다.
광복 70년이 지났는데도 역사 광복이 안 되어 2세들의 교육기관인 학교의 이름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더 지탄받아야 할 일이다.
알아야 면장
‘알아야 면장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때의 면장은 군수郡守나 면장面長이라는 직함이 아니라 담장을 마주하고 있다는 면장面墻이다.
이 말은 공자가 자기 아들 백어(자사의 아버지)에게 학문을 익혀야 담장을 마주한 것 같은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공부에 힘쓸 것을 당부한 말이다.
우리말 땅이름도 서글(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또 세월의 흐름에 따른 발음변화로 인하여 원래 지니고
있던 고유의 의미와는 다른 뜻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앞의 전통적인 우리 땅이름과는 또 다른 입장에서 땅이름의 허실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땅이름을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길잡이가 될 것이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주로 특색 있는 이름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읽다보면 누구나 <땅이름 면장面長>쯤은 하게 될 것
이다.
조령과 철령
옛 우리 땅 간도間島는 ‘사이섬’ ‘새섬’이 변한 땅이름이다.
즉 사이섬이 ‘간도間島’로, 새섬이 ‘조도鳥島’와 ‘신도新島’로 변하고 또 새섬이 쇠섬, 소섬으로 변하여
‘금도金島’와 ‘우도牛島’로 변하였다.
조령鳥嶺도 문경사이재, 문경새재이다.
철령도 사이령이 쇠령이 되어 철령鐵嶺이 되었다.
또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내인 ‘사이내’는 ‘쇠내’가 되어 ‘금천金川’이 되기도 한다.
철원도 ‘사이벌’ ‘새벌’이 쇠벌이 되면서 철원鐵原이 되었다.
즉 철령이나 신령新嶺, 조령, 새령, 쇠령이 모두 같은 어원이다.
금곡도 샛골, 사이골인데 쇳골로 발음이 변하면서 금곡金谷이 된다.
또 사이마을은 새마을이 되어 신촌新村이 되기도 한다.
새마을 사업도 신촌사업이 되는 셈이다.
또 새말은 급기야 샘말, 샘골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사이’가 ‘사슴’이 되어 ‘녹도鹿島’가 된 경우도 있다.
태백시 추전역도 싸리재라고 하는데 싸리재는 사이재이다.
그것이 변하여 싸리나무 밭이 되고 추전역杻田驛이 되었다.
해발 85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기차역이다.
‘쇠령’은 또 ‘금령金嶺’이 된다.
용인의 경전철역 김량장金良場역도 바로 ‘사이령’ ‘새령’ ‘쇠령’ ‘금령’에서 나온 말이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금’이라는 발음과 ‘령’이라는 발음이 잘 안되어 ‘금령’을 ‘김량’ ‘김랑’이라 하였다.
이 사이령에 있던 시장이 지금의 ‘김량장’이다.
일본에 의하여 ‘금’이 ‘김으로, ’령‘이 ‘량’ ‘랑’으로 바뀐 경우이다.
금포가 김포로, ‘중량교’가 ‘중랑교’가 된 것도 같은 이유이다.
김포는 ‘사이내’가 ‘새내’로, ‘새내’가 ‘쇠내’로, ‘쇠내’가 금포金浦로, 금포가 김포金浦로 바뀌었다.
김포는 포, 검포로 큰 나루라는 뜻이 있다.
조선시대에 양재동 말죽거리에도 파발마를 띄우던 금령역이 있었다.
상도동과 봉천동 사이에 있는 고개도 사이재, 살피재인데 어감이 좋지 않다고 주민들이 건의를 하여
지금은 봉천고개로 바꾸었다.
그러나 우이동은 사이동이 아니라 맞은편의 인수봉, 만경대, 백운대가 겹쳐 보이는 것이 소의 귀를 닮아
‘우이동牛耳洞’이 된 경우이다.
삽교는 ‘사이다리’ ‘좁은 다리’ ‘샅다리’이다.
‘사다리’도 좁은 다리이다.
‘사타구니’ ‘사타리’ ‘샅다리’에서 온 말이다.
한편 그 지역의 특산물을 나타낸 지명도 있다.
울산 ‘방어진’은 방어가 많이 잡히던 곳, 방어마을이다.
장생포의 장생長生은 긴 생물, 고래를 의미하니 즉 장생포는 고래마을이다.
달구벌과 반월성 그리고 서울과 쇠불
대구의 달구벌은 닭벌의 변음이고 달성공원은 ‘닭구공원’이며, 월성도 ‘닭성’ ‘달구성’이다.
월성과 달성은 같은 뜻이다.
원래 야생 닭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닭은 ‘달욱達旭’ ‘달구’이며 해를 돋아나게 하는 새이다.
김알지의 탄생지인 계림鷄林도 ‘닭벌’ ‘달구벌’이다. 또 다른 설은 경주 월성이 초승달 같다하여 신월성이라 하고 반월성은 반달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밖에 포천에 고구려성인 반월산성이 있고 개성에는 고려성인 반월성이 있다.
포천은 고구려 때 ‘마홀馬忽’이다.
‘마’는 물이며 ‘물골’이다.
한내라는 큰 물길을 안고 있는 지역이다.
연천도 고구려 때 ‘마련현麻連縣’이며 ‘마’역시 물이다. 여기저기 물길이 연결되는 곳이다.
서울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벌판 새벌이 서벌, 서라벌, ‘서울’이 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또 새울타리의 ‘새울’과 눈울타리의 ‘설울’에서 서울이 되었다고 한다.
또 삼각산의 ‘세뿔’에서 ‘세불’ ‘서불’ ‘서울’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국가의 성립 조건 중에서 중요한 것이 쇠를 다루는 풀무 병기창의 설치이다.
쇠로 무기를 만드는 대규모 대장간 시설이 없으면 수도가 아니었다.
이 대장간이 ‘쇠를 다루는 불간 즉 ’쇠불간‘이다.
이 ‘쇠불’이 ‘쇠벌’이 되어 경주의 ‘금성金城’이 되었다.
즉 ‘쇠불’이 쇠벌, 서벌이 되어 서라벌이 되었고 그 ‘쇠불’이 서불, 서울이 되었다.
즉 수도 ‘서울’은 대장간인 쇠불 병기창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라는 말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농사에서 중요한 것이 농기구 제작이고 국방의 주요조건이 병장기의 제작이기 때문이다.
상고시대의 수도首都이름은 ‘부도符都’라고 하였다.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그 당시는 제기 같은 그릇이 없었으므로 음식을 담을 도구가 없었다.
그저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천제를 지내던 시대였다.
그 후 도자기를 구워 제기로 사용한 시대의 수도 이름을 ‘도하陶河’라고 하였다.
흙 반죽을 하고 물레를 돌리려면 풍부한 물이 필수조건이므로 도요지는 원래 강을 끼어야 발달할 수
있다.
‘도하’는 도요지가 있는 곳이다.
여기서 ‘하’는 물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넓은 벌판이라는 뜻이 있다.
백두산의 관문인 ‘이도백하二道白河’라는 말도 넓은 벌판이라는 말이다.
쇠불 대장간이 갖추어지면서 수도가 부도에서 도하로, 도하에서 서울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국학박사 반재원
훈민정음연구소장, 한배달부회장, 한국땅이름학회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