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구원을 점검하라
"과연 나는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 공부도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질문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나에게진정한 구원의 은혜가있는가?
1. 단지 교회에 다니고 봉사를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설득에 의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겠다고 즉석에서 고백하고, 전도자의 기도를 따라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당신은 이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라는 말이 선포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양식의 전도 메시지를 듣고 고백을 하면 구원얻은 백성이 된다는 것인가?
물론 그리스도인이 되는데에는 고백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True Christian)이 되기 위해서는 고백뿐만 아니라 진정한 은혜의 표식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날 한국 교회는 신앙고백과 신앙고백에 대한 진정한 표식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많은 비난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2008년 11월)의 신문 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는 믿을 만한 기관이 아니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교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은혜와 구원의 표식이 나타나는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극소수로 전락했고, 거의 이름뿐인 명목적인 그리스도인이 넘쳐나고 있다.
저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현재 한국 교회가 교인들 대해서 진정한 구원의 표식을 살피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들은 한 영혼이 진정으로 거듭났는지, 구원의 은혜가 분명한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교인들이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식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자기부정, 인내, 겸손, 순종,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선순위, 죄를 미워하고
그것과 싸우는 것 등이 진정한 구원의 은혜에 대한 표식이다.
2. 단지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하였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가 있다.
사도행전 8장 13절에서 마술사 시모은 빌립 집사의 살교를 듣고, 또한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서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른 설교자 빌립집사를 전심으로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의 신앙고백은 피상적이었으며, 그의 마음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큰 자라고 불렀다(행8:9). 육신적이고도 교만하며 높아지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으며, 단지 고백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시몬 베드로의 권능의 사역을 보고는, 하나님의 은사를 돈을 주고 사려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마음에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어 높이고자하는 욕망이 가득하였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그렇게 제안하였던 것이다.
오늘 날 예수를 믿느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피상적인 지식에 근거해서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는 육신적이고도 세상적인 이유와 목적 때문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이제 자신의 신앙고백이 참된 것인지를 점검하기 위해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면 것과 벌거벗을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이상의 말씀들은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신앙고백을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에 대한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고백과 함께 그 증거와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있는 "건강과 부의 복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봉사함으로써 세상적으로써 복을 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분명한 백성이요, 구원받은 백성으로 여긴다.
이렇게 피상적인 지식과 육신적인 마음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때문에 한국 교회는 점점 경건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세상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럼으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 진정한 믿음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떠한 표식을 동반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표식을 구체적을 나타내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살길이다. 따라서 자신이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를 정검하고 살피는 운동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3.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은 것으로 자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사도행전 8장 13절 이하에 기록된 마술사 시몬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예수를 믿고자 하여 세례도 받았고, 빌립 집사와 베드로와 요한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에게 성령의 은사를 돈을 주고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그가 비록 세례를 받았지만, 그의 심령 속에 여전히 탐욕과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를 돈 주고 사려는 제안으로 인하여 그의 심령 속에 있는 죄악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를 가리켜 '구원과 관계없는 사람'(21절 참고)이라고 말하였다. 즉, 시몬이 받은 세례가 그에게 자동적으로 심령의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바울은 외적인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롬 9:27)
4.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죄 용서함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체험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은 체험들로 인한 거짓 확신과 용서에 대한 헛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그림자나 뜬구름을 잡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할 뿐 하나님의 위대함과 거룩과 순결과 엄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성도 느끼지 못한다(시 50:21 참고).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성을 못 느낀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 (계명, 죄, 심판, 용서)에 대해서도 문제 될 것이 거의 없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고 죄가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며, 단지 구하기만 하면 용서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과 순결함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죄와 죄성에 대해서도 모르며, 용서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오늘날에는 복음이 일반적으로 외쳐지고 있다. 그래서 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용서할 준비를 하고 계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용서함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은 다르다. 죄 용서함을 믿음으로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죄에 대한 질책으로 인하여 심령이 평안하지 못하다.
그때마다 '나는 용서받았다' 혹은 '구원받았다'라고 자기 암시를 하거나 심리적으로 확신을 주는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단지 자기 설득이나 자신의 의견에 불과하다. 거짓 평안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복음으로 죄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죄용서함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죄에 대한 성령의 더 깊은 질책과 책망으로 인하여 결국 자기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할 때까지 부르짓고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빛을 받게되며(갈 1:16), 이 빛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원리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라는 구절을 남용한다. 그러나 같은 요한일서 3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죽음으로 죽으신 것은 죄를 없이하기 위함이지, 우리가 마음껏 죄를 지어도 문제될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보지도 못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육신적 만족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그들에게는 계명을 지키거나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려는 마음도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거나 죄를 용서해 주신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겔37:23).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14).
"예수께서 이르시데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그리스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게 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라 그녀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시편 116편 1절과 5-7절을 읽어보면 용서받은 사람들에게서 사랑과 존경과 감사가 넘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1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여호와께서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5-7절).
죄의 용서에 대해서 개념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죄를 미워하거나 죄와 싸우는 심각성이 없다. 오히려 그 영혼은 죄를 짓는 일에 용기를 낸다. 죄를 가지고 파도타기를 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4절 의하며, 그들은 경건하지 못한 자이며, 은혜 아래에서 죄를 짓는 방탕한 자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남용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은혜의 교리를 알면서도 죄를 방임하고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로마서 6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용서에 대한 믿음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죄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보존해 주는 능력이 된다. 또한 이러한 용서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적 순종 가운데 살게 만든다.
디도서 2장 11,12절 말씀을 읽어보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용서에 대한 개념만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평안함이 없다. 물론 일시적인 기쁨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속적인 것은 아니다.
잘못된 근거에서 나온 스스로의 확신은 잘못된 목적을 낳는다. 그 뿌리가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죄의 용서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교만하게 되고 만다.
5. 구원의 체험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구원의 체험이 아닌 것을 구원의 체험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영적 체험들 중에는 거짓 체험들이 많다. 거짓 체험이라는 것은 성경의 근거가 없는 체험을 말한다
이러한 거짓 체험은 매우 주관적이며 감정적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러한 거짓 체험을 가지고 자신이 회심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구원의 체험은 매우 구체적이며, 그 영적 깊이가 깊다. 그것은 일회적이거나 일시적인 체험들이 아니다.
성경의 예를 들어 보자. 마태복음 13장 20절에는 돌밭의 비유가 언급되어 있다. 말씀을 듣고 기쁨을 체험을 하지만, 돌밭은 구원받은 자의 심령이 아니다. 그들은 말씀 때문에 환란과 핍밥이 일어나면 그 말씀을 버리는 자들이다. 돌밭의 심령이 체험한 것은 매우 감정적이고도 일시적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영적 체험에 대해서 이렇게 피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구원의 체험이 아닌 일시적이고도 흥분적이며 감정적인 체험에 치우쳐 있고, 교인들에게 진정한 구원의 체험을 통하여 나오는 거룩을 보기 힘들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체험들은 거룩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반드시 거룩성이 나타나야 한다. 거룩성이 나타나지 않는 수많은 교인들의 체험은 감정적이고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러한 일시적인 체험을 구원의 체험으로 믿고 사는 교인들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구원의 체험에 대해서 무지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영적 체험들을 동반하는지를 깨달아야 하며, 또 그러한 것들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6. 여전히 죄 속에 있으면서 칭의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죄 속에 있으면서 칭의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일시적인 체험과 함께 한국 교회에 널리 퍼진 또 하나의 잘못된 구원에 대한 이해가 있다. 자신이 의롭다 여김을 받았으므로 이제 구원을 받았으며, 시간만 흐르면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다.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을 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구원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성화에 힘쓰지 않으며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지도 않는 모습이 쉽게 발견된다. 구원에 있어서 칭의만 있으면 되고, 성화는 선택적인 것으로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이해는 도덕률 폐기론주의에 해당되는 오류에 속한다. 이것은 성경적 구원의 이해에서 벗어난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잘못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을 지적한다.
로마서 6장 1절 이하에서는 구원의 체험이 있는 자는 더 이상 죄에 대해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을 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구원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아직 새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요한일서 2장 4절에서는 그들을 일컬어 진리를 모르는 자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죄 용서함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죄와 싸우게 만들며, '자기를 깨뜻하게'(요일 3:3)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구원을 도덕폐기론 방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으며, 그로 인하여 여전히 죄의 습관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실 그들에게는 아직 구원의 은혜가 없는 것이다(요일3:6 참고).
7. 예정교리를 잘못 이해하여 구원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가지기도 한다.
도덕률폐기론주의자(Antinomians) 가 구원을 이해하는 바와 비슷하게, 예정의 교리를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이기 때문에 자신은 결국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교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또는 예정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생겨난 반대 현상으로, 하나님의 예정교리를 믿지 않고 모든 것이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물론 둘 다 잘못된 견해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그 일이 성취되고 일어날 때까지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지식이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성취되었을 때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구원을 이룰 만한 어떤 공로도 없음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에 속하였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 그 거룩함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비로서 알 수 있다. 에베소서 1장 4,5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예정의 목적이 우리의 거룩함(성화)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예정된 백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의 회복이 분명하게 나타난다(골 3:10 엡4:24 참고). 그리고 구원의 은혜가 분명하여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 나타나는 성도를 예정된 백성이라고 일컫는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에 의해서, 즉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정교리는 칼빈이 지적한 것처럼 감사의 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러한 예정교리를 남용하고 옹호하고 있다. 그것을 여전히 육신적이고도 세상적인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방편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예정교리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교인들에게서 거룩과 성화를 기대하기가 힘들어 졌다. 이렇게 구원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을 망하게 할 것이다.
8. 계명을 지키고 도덕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계명을 지켜왔기 때문에 스스로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누가복음 18장 18절 이하에 예수님에게로 나온 부자 청년 관리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여 예수님을 떠났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 청년이 사실 외적으로는 계명을 지켰지만 자신의 속에 있는 탐욕, 특히 재물을 우상으로 삼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얼마든지 도덕적이고도 흠 없는 사람으로 치장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의 심령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탐욕과 더러운 생각들을 주님 앞에서 숨길 수는 없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거나, 혹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였다는 이유로 자신이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어떤 사람은 경건의 규칙들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기고 한다. 그러나 예배를 자주 드리고 기도를 많이 하며 봉사를 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등 모든 경건의 의무를 다하더라도 그것이 구원을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다음의 말씀들은 그 이유를 말해 준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9.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교회 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제자훈련을 받았으며 성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24장 22절에는 벨릭스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본문에서는 바울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바울의 강론을 들으면서 죄에 대한 질책이 일어났지만, 예수를 믿지는 않았다. 즉,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과 믿는 것이 별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26장 28절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또한 선지자의 말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26:27)라고 말한 것이다.
이때 아그립바 왕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그가 이미 그리스도를 믿은 도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설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지만, 지식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구원의 지식은 그로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굴복하게 하며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매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10.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봉사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직분자로서 교회에서 봉사한 것을 근거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때로는 뛰어난 봉사를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하여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모습이 적지 않게 언급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22, 23절을 보자.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에서 주를 찾는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으며,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였고, 권능를 행하였으며, 매우 부지러한 종들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적지 않은 수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게 굴복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광과 이득을 위해서 일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여 수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께서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능력 있는 직분자로 교회를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에서 떠나 있으며 그 목적이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러한 것들이 오히려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없음을 증거할 뿐이다.
11.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가르친다고 해도 구원받은 자가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주께서 왜 사역자들을 모른다고 하셨을까?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다면,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였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닌가?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으며, 심지어 가르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은혜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할지라도 그 지식이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지식이라면, 거기에는 구원의 은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 2장 19절에 언급된 지식이 바로 일반적 지식이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일반적인 지식은 단지 사색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는 지식이다. 그러나 구원의 지식은 은혜와 믿음과 사랑이 동반된 것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구원의 지식의 효과는 다음과 같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그러므로 만약에 당신이 성경과 하나님이 대해서 안다고 하다라도 일반적 지식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직 진정한 그리스도 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많은 성경 지식이 있으므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의 은혜가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장을 살펴보자.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헤롯 왕에게 메시야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를 물어보았다. 이에 헤롯 왕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질문하였고, 그들은 한결같이 유대의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성경지식은 정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서 경배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적용되는 지식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였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롬 2:17-18)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경건이 나타나는 구원의 지식이 아니었다. 단지 머리에만 가득 차 있는 정보에 불과했던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지식은, 시편 111편 10절 말씀과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참된 영적 이해'가 있는 것이다.
12. 종교적 열심이 크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종교적 열심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도 있다. 즉, 그러한 종교적 열정이 하나닝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닌 경우이다.
사도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충성을 가지고 있었다(행 9:1)). 그런데 그 열심은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는 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가 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열심과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즉, 사울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혈기가 등등하였지만, 이러한 열심은 지식이 없는 열정으로 결국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었들 뿐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예수께서 자주 책망하셨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대단한 열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열심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열심이었다. 즉, 믿음이 없는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구원과 상관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더우기 종교적 열심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과 동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구원의 은혜와 관계가 없다. 그리고 고집과 자기주장에서 비롯된 종교적 열심도 구원의 은혜와 상관이 없다.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은 제사 드리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드린 것이기에 참으로 구원받은 백성의 제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를 판단할 때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심의 목적과 동기가 올바른지를 점검해야한다. 그리고 그 열심이 올바른 지식 가운데서 나오는 것인지를 확인하여야 한다.
13.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이적과 기사를 베푼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구원의 증거는 아니다
자신에게 성령의 은사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많은 이적과 기사를 베풀었기 때문에 자신은 확실하게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비롯해서 전 세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 중 하나가 오순절 운동 혹은 은사운동이다. 많은 교회들이 은사를 추구하고,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역을 하고 있다. 전 세계의 북음주의 교회의 80페센트가 오순절 운동에 동참하고있다.
그런데 규모나 숫자적으로 볼 때는 강력한 운동인데도, 이 운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미미하다.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보면 오히려 실망스러운 때가 더욱 많다.
교회 안에서도 은사는 있지만 성령의 열매를 보기 힘든 경우가 너무나 많다. 소위 성령의 은사는 넘치지만 구원의 은혜가 불확실한 경우가 너무 흔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은사 운동에 열심인 교회의 교인 수는 엄청나지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성령의 은사는 있지만 구원의 은혜가 없는 위선자 혹은 유사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영적 현상은 일찍이 청교도 시대에 가장 경계하였던 영적 운동이기도 하다.
성경적으로보면, 앞에서 살펴본 마태복음 7장 23,24절의 경우 선지자 노릇하였던 그들은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은데도 구원받은 백성이 아닐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성경은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속에 구원의 은혜가 없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
그 한 예로, 민수기 24장 16절 이하와 민수기 31장 16절에 등장하는 발람 선지자가 있다. 그는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기도 하였지만, 구원의 은혜와는 관계없은 거짓 선지자였다.
그리고 사무엘상 10장 10절과 15장 26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울 왕도 구원의 은혜를 가지고 있다 않았지만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신약성경에도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의하면, 가롯유다는 열두 사도 가운데 있으면서 귀신을 쯫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복음 22장 3절에 의하면, 그에게는 구원은 은헤가 없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면서도 구원의 은혜가 없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일반적인 은혜로서 일시적이요 임시적이며 기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3:8참고). 그래서 구원의 은혜가 없는 사람도 성령의 은사를 소유할 수는 있는 것이다.
반면, 구원의 은혜는 특별한 은혜로서 영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처럼 설교하고 천사처럼 기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의 신실성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전 13:1,2참고).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반드시 구원의 은혜를 학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14. 겉으로는 신실해 보이는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체험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서, 외형적으로는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하며 직분도 가지고 있고 신실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교회에서 존경받기도 하고, 그 직분을 행하면서 자신이 믿음의 백성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결정적인 경우에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결국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로 증명된다.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구원의 믿음에는 분명한 기초와 근거가 있다. 진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와 그위에 임하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구속주 하나님에게 절대적을 의존해서 얻는 구원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기초이며 근거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초와 근거가 없이 외형적으로 종교 행위를 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육신의 정책으로 교회를 이끄는 사람들이 많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 교회가 세속화되는 데에 이들이 주된 요소가 되고 있다.
이렇게 기초가 부실하거나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며, 교회를 인본주의, 세속주의로 물들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어지럽히고 더럽힌 죄가 추가되어서,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이러한 부류에 대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먼저 열 처녀 비유의 말씀을 보자(1-13절). 어리석은 다섯 쳐녀는 분명히 신랑을 기다렸으며, 등도 준비되어 있었고 등 안에 어느 정도의 기름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기름이 부족하여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즉,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사실상 외형적으로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었으며, 단지 기름이 부족한 것 때문에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외형적으로는 거의 부족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였는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외형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신앙인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들이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다는 것이며, 그 등 안에 어느 정도의 기름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확신과 믿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는 것은 신앙고백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무도 행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어리석은 다섯처녀들이 지혜로운 다섯처녀와 함께 나아갔다는 것은 교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성도 간의 적극적인 교제도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어리석은 다섯 처녀도 신랑을 맞으러 나아갔다는 것은 그들도 그리스도를 찾고 구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들에게는 기름이 떨어져 가고 있었으며, 결국 기름을 구하러 간 사이에 닫힌 문이 두 번 다시 그들에게 열리지 않았다.
이것은 교회에 출석하고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하였지만 생명에 이르게 하는 회개와 진정한 구원의 믿음이 없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경우에 해당된다. 즉, 은혜의 기름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기본적인 것이 불충분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얼마든지 그렇게 가장한 채로 교회 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가 확실한 근거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
마태목음 25장에 나오는 또 하나의 비유 말씀인 양과 염소의 비유를 살펴보자(31-46). 여기에서 양은 구원받은 천국 백성을 의미하고, 염소는 구원받지 못한 지옥 백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염소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를 돌보고 구제도 하였다고 주장하며 호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국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완벽한 하나님 백성인 그들이 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15. 성경을 오해하거나 곡해하여서 구원을 넓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구원을 넓게 이해하여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간적으로 더 넓게 생각함으로써 확신을 갖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는 네 종류의 밭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구원을 넓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네 종류의 밭 모두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설명하시기 전에 구원 얻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령 상태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신다. 구원 얻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이 완악하고 귀는 듣기에 둔하며 눈은 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허락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결국 그리스도로 인하여고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 13:15 참고).
이처럼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은 회심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의 결론으로 좋은 밭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열매 맺는 자가 구원받는 자"(마 13:23 참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결국 좋은 밭을 설명하기 전에 말씀하시는 세 종류의 밭은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다.
길가의 밭은 말씀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부주의하며 말씀을 취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돌밭은 말씀을 듣고 어떤 인상을 받지만 지속적이지 못한 사람들로서, 일시적 구원에 해당된다. 가시밭의 경우는 세상의 염려와 부자가 되는 유혹에 이끌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은 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6장 8절에서는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다.
누가복음 8장 12-15절 말씀을 비교해 보면 앞의 세 종류의 밭이 구원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에서는 돌밭의 경우를 복음을 배반하는 자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밭과 같음에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성경을 오해하거나 곡해하여서 구원을 넓게 생각하는 경우는 고린도 전서 10장 1-5절에 나오는 광야에서 멸망받은 사람들에 대한 적용이다.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2-4절 참조).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5절 참조).
그런데 구원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보다 넓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에 언급된 광야에서 멸망받은 사람들도 구원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비록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였지만 세례를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과 이어지는 11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러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성경은 멸망이라는 단어를 계속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은 악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6절참조). 우리를 깨우치기 위한 본보기인 것이다(11절참고).
따라서 이 말씀은 영적인 특권들을 누림에도 영생에는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다. 그들은 위선자이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도 계속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신앙고백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여 구원을 넓게 이해함으로써 영적으로 느슨한 삶을 조장하는 견해를 경계해야 한다.
김홍만목사/『당신의 구원을 점검하라』/지평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