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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보스니아는 1908년 이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가 된 곳이지만, 그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벗어나 세르비아에 속하길 원하고 있었다. 오스티리아는 게르만족, 세르비아는 슬라브족으로 분류되는데 두민족은 항상 갈등관계에 있었다. 황태자 부부가 방문한 날은 세르비아에서 민족 행사가 있는 기념일 이었다. 그런 날에 지배국인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보스니아를 방문한 것이 세르비아인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황태자 부부는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대학생이 쏜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황태자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는 ,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결국 유럽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터진 것이다. 선전 포고 소식을 접한 유럽의 여러 나라는 자국과의 이해관계를 계산하느라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전쟁이 확산 되는것을 막아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쟁의 불길은 끝내 잡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공격했다. 러시아가 바로 군대를 동원해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나섰다. 러시아와 세르비아는 같은 슬라브민족으로서 러시아의 개입은 당연한 것이었다.이에 독일은 같은 게르만족인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러시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프랑스도 군대를 동원해 독일을 공격하면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동안 전쟁을 막아 보려고 애쓰던 영국은 더 이상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일이 주도권을 쥐는 것을 막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당시 독일군참모총장 슐리펜은, 만약 전쟁이 일어나 러시아와 프랑스가 손을 잡으면, 상황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상했다. 그는 러시아 군이 독일 동부 지역까지 도착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동부에서는 최소한의 방어전으로 러시아군의 속도를 늦추게 하는 대신,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는 서부 전선에서 신속하게 전투를 마감해야 한다는 작전을 세워 두었다. 그의 계획대로 전쟁은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 동부 전선과 프랑스를 상대로 하는 서부 전선, 두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슐리펜에 이어 독일 참모 본부를 지휘하던 몰트케는,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어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사흘 만에 벨기에까지 공격하였다. 그러나 벨기에가 워낙 강력하게 방어를 하는 바람에, 벨기에를 통과하기까지 무려 12일이나 걸리고 말았다.
프랑스 군 총사령관 조프르 장군은 5개 군을 독일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독일군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적에 정면으로 맞섰지만, 막강하게 밀려오는 독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한 채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독일군이 파리 근처 마른 강까지 진격해 오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던 조프르 장군은, 영국군과 함께 반격하기 시작했다. 마른 강까지 오는 동안 계속되는 전투에 지친 독일군은,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짧은 기간에 프랑스를 점령하겠다는 독일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때부터 독일군은 참호(전쟁터에서 몸을 숨기면서, 적과 싸우기 위해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를 파고,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5년 동안 대치하였다. 이로써 양측 모두 전력 손실이 너무 커 정면 승부는 어려워졌다. 이제 전쟁은 장기전으로 들어섰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처음에는 러시아군이 승세를 잡아 독일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지휘 본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러시아 군의 전력이 점점 약화 되었다.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군의 위협이 사라지자, 독일은 러시아에 밀려 퇴각하던 오스트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폴란드 서부로 보냈다. 그곳에서 만난 독일과 러시아군은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 때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도 밀리고 있었다. 처음에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침공에 성공했던 오스트리아 군은, 강력하게 대항하는 세르비아 군의 반격을 막아내지 못해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전쟁 당시 독일은 영국에 비해 해군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해전에서 크게 싸우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영국은 독일 함선들을 파괴시킨 뒤 북해를 봉쇄하였다. 이로써 독일은 해상 보급로를 차단 당했다. 식량이 부족한 독일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마침내 영국과 독일의 해군은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 앞바다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독일 함대가 포격을 퍼붓자, 타격을 입은 영국군 정찰 함대는 주력 함대 쪽으로 후퇴했다. 독일 함대가 계속해서 영국군을 추격하였고, 두 나라의 주력 함대가 맞붙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독일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고, 영국은 북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양국은 서로 승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어찌 되었든 유틀란트 해전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양측이 전면전을 벌인 유일한 해전이었다. 유틀란트 해전에서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한 독일은, 1917년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들어갔다. 북해에서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그 해역을 지나는 모든 선박에 대해 경고 없이 무차별로 공격한 것이다. 그 해 3월, 독일의 공격으로 미국의 상선이 침몰당해, 많은 미국인들이 희생되었다. 그러자 4월 6일, 그동안 경제적인 원조만 하면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로써 전쟁은 독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참전하자 연합군은 영국을 중심으로 다시 반격을 펼쳤고,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러시아는 1917년 3월에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물러나고, 레닌 중심의 혁명 정부(볼셰비키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쟁에서 빠졌다. 독일에서는 군항인 킬에서 전쟁에 식상한 수병들이 출항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 여파가 커지면서 베를린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빌헬름 2세가 물러나고, 더 이상 전쟁을 치르기 어려워진 독일은 11월 11일에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여 동안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렸다. 이 전쟁에서 처음 등장한 잠수함, 항공기, 탱크, 대공포, 독가스, 기관총 등 각종 신무기들로 인해 전사자만 천만 명이 넘었다. 전쟁 후 연합군 측은 파리 강화 회의를 열어 참전국들의 이해관계를 정리하였다.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전후 세계 질서의 기본 원칙에 관한 14개 조항을 주장했다. 그 결과 1920년 1월에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맹이 창설되었다. 전쟁에 패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었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다시 프랑스에게 양도해야만 했다. 또 패전국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생제르맹 조약으로 인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면서 해체되었고, 영토가 예전의 10분의 1로 줄었다. 오스만 제국도 세브르 조약으로 인해, 영토의 반 이상을 내놓아야 했다. 1922년, 독일편에 섰던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1923년에 지금의 튀르크 공화국이 들어섰다.그러나 패전국 독일에 대한 가혹한 책임을 물린 것과 ,승전국에 속하면서도 보상을 챙기지 못한 이탈리아 문제는, 더 큰 전쟁의 불씨를 남기는 결과를 낳았다. 제1차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조직된 국제연맹은 미국의 불참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은 독일·이탈리아·일본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의 연합국 간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해결되지 않은 분쟁이 다시 폭발한 것으로,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이었다. 유럽 대륙 전역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전세계의 바다를 무대로 전쟁이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뻗치는 결과를 낳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000만~5,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동시에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국민의 굴욕감과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 바이마르 공화국을 괴롭힌 사회 혼란 및 정치 불안은, 극렬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지향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초래 했다.
뛰어난 웅변술의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하여 독일이 서약한 베르사유체재와 대공항 이후 정권을 잡은 것이다. 히틀러는 군대를 대량 모집하여 취업률을 올렸고, 전쟁 자금난과 국가 민족의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지목하여, 독일 게르만족의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 이전부터 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뿌리 깊어 제1차,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을 혐오하였고, 이는 유대인 혐오 정책이 호응을 얻은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과 집시, 슬라브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유대인 족보라는 걸 만들어 할아버지가 유대인이어도 증손자를 잡아가는 정책을 펼쳤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막노동이나 생체 실험을 하고 병들면 총살을해버렸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동성애자와 장애인도 있었다. 그 이유는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가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33년, 독재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은밀히 독일을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 강국들이 독일 재무장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를 주저하는 것을 이용하여, 히틀러는 1936년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군사적으로 행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36년말, 이미 에티오피아에서 침략행위에 들어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는, 로마와 베를린을 잇는 '추축'을 선언했다. 이듬해 이탈리아는 독일과 일본이 1936년에 맺은 반코민테른 협정에 참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1936년부터 스페인 내란에 개입했다. 1938년 3월 히틀러는 독일군을 보내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병합되었다. 1939년초 히틀러는폴란드를 침공·점령하기로 결심했다. 폴란드는 독일이 공격해올 경우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원조를 보장받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든 폴란드를 침략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련이 서쪽의 인접국가가 침략당하는 것에 반발할 가능성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는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여, 모스크바에서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동서로 나누어, 폴란드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서부를 독일이 갖고, 나머지 2/3에 해당하는 동부를 소련이 접수한다는 데 합의했다. 영국과 폴란드가 정식으로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며칠 연기했다. 그러나 그를 제지하려는 서양 열강의 외교적 노력을 무시하겠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1939년 8월 31일 , 마침내 히틀러는 이튿날 새벽 4시 45분에 폴란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침공은 명령대로 시작되었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가 독일편에 가담하여 참전하고 프랑스 함락이 임박한 1940년 ,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미국의 물자를 폭력과 맞서 싸우는 세력에 제공하겠다"고 선언한다. 프랑스가 함락된 뒤, 그는 이 정책에 따라 독일과 싸우는 영국을 도왔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낡은 구축함 50척을 영국의 일부 대서양 기지와 교환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미국의 잉여 전쟁물자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또한 그는 영국이 미국에 군수품을 주문하는 절차를 간편하게 해주었다. 영국은 지불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미국에 의지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은 끌어모을 수 있는 달러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전쟁물자를 미국에 주문했다. 처칠은 1940년 12월 루스벨트에게 무기 대여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군수 물자와 식료품 및 의류를 민주주의 국가(특히 영국)에 제공해달라고 제의했다. 루스벨트는 동의했고, 미국 의회는 1941년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무기대여법은 어떤 나라의 방위가 미국 안보에 긴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 나라 정부에 방어 물자와 용역 및 정보를 넘겨줄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도 대통령의 재량에 맡겼다.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이 법률 덕분에, 루스벨트는 '폭력과 맞서 싸우는 세력'에 물질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정책을 사실상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의회는 원조 자금도 너그럽게 인정하여, 1941년 11월까지 총액이 거의 13조 달러에 이르렀다. 독일이 프랑스·영국과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소련은 안심하고 핀란드 일부와 발트 3국(발트 해 동쪽에 있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을 병합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독일은 강력한 저항에 막혀 영국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유럽을 손에 넣은 뒤, 소련을 기습하려던 검은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계획했던 공격 시점인 1943년보다 2년이나 앞당겨 소련을 향해 총구를 겨눈 것이다. 독일은 먼저 발칸 반도에 있는 헝가리·루마니아·슬로바키아를 공격하여 독일군에 합류시켰다. 또 불가리아를 추축국에 가담시켜 군사력을 강화한 뒤,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까지 점령해 버렸다.
마침내 1941년 6월, 히틀러는 150여 개 사단, 300만 명으로 구성된 병력을 동원해 소련 공격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그 당시 소련은 독일보다 2~3배나 많은 탱크와 항공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독일의 앞선 기술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식 장비였다. 결국 소련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앞세운 독일군에 힘도 써보지 못하고, 모스크바 인근까지 내어 주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고 결정한 소련은 영국과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독일군이 점령하고 지나간 지역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또 독일의 공격이 예상되는 지역에 있는 다리와 철도를 파괴하고, 식량을 불태우는 등 독일군의 진격을 완강하게 저지했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다가왔고, 겨울 군복을 지급 받지 못한 독일군은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다. 결국 독일은 모스크바 공격을 포기하고,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방향을 바꿔 스탈린그라드를 목표로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곳에서도 소련의 반격을 받아 고립될 위기에 처했고, 결국 소련 점령을 포기한 채 철수하기 시작했다.
추축국 가운데 하나인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또 일본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인도차이나를 공격한 뒤, 독일·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미국은 ABCD 포위진(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4국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 붙인 포위진)을 형성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경제적 압박을 당하게 된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였다. 미국은 영·프 연합군이 철수한 이후, 엄청난 물량을 영국에 지원하면서 참전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 이런 미국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자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제 전쟁은 유럽을 넘어 태평양까지 확산돼,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소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물리친 것을 계기로 연합군의 반격이 거세졌다.
1942년 초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는 사이, 영국은 다시 군대를 재정비하여 독일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했다. 미국은 폭격기 편대를 이용하여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였다. 또 태평양의 미드웨이 섬과 여러 섬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태평양 전쟁(1941~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즈음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체포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새 정부와 비밀 협상을 맺고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던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였다. 결국 1943년 9월, 연합국에 항복한 이탈리아는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이에 독일은 무솔리니를 구하고 로마를 점령하였지만, 1944년에 다시 연합군에게 로마를 내어 주고 말았다. 추축국 가운데 하나인 일본은 중·일 전쟁(1937~1945)을 일으켜 대륙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1944년 6월 ,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15만의 연합군은 노르망디(프랑스 서북부 해안에 있는 지방) 상륙 작전을 감행하였다. 영국과 캐나다 군은 동부 해안으로, 미국군은 서부 해안으로 상륙하여 독일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 공군은 프랑스 동쪽 센강과 남쪽 르와르 강에 있는 다리들을 폭파하여, 독일군의 병력 지원을 차단하였다. 연합군은 힘든 전투를 벌인 끝에 캉 항과 셰르부르 항을 점령하였고, 그 기세를 몰아 독일군을 더욱 강하게 공격하였다. 결국 연합군의 공격에 독일군은 무너지고 말았고, 29만이 넘는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연합군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는 동안, 독일군부의 고위 간부들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이로써 독일의 전력은 더욱 약해졌고, 1944년 8월 25일에는 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하였다. 그 해 9월에 드골 장군은 프랑스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소련이 발칸 반도 위쪽으로 이동해,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를 통해 독일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독일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 틈을 타, 1945년 1월에 독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자, 히틀러가 서부 전선에 있던 부대를 서둘러 동부 전선으로 보냈다. 그렇지만 독일군이 소련의 진격을 막지 못했고, 소련군은 부다페스트까지 점령해 들어갔다. 이때 영국과 미국 공군은 폭격을 강화하여 독일의 동부 전선의 교통 중심지들을 파괴하면서, 소련군의 진격을 도왔다.
1945년 4월 22일, 마침내 소련군이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이에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고, 그 뒤 독일은 5월 7일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유럽에서의 공식적인 전쟁은 막을 내렸다. 독일이 항복한 후에도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남겨 두고 있었다. 미국은 사이판·필리핀·이오지마·오키나와 등을 차례로 점령한 뒤,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9일, 미국은 일본 도쿄에 야간 공습을 감행했다. 이로써 미국은 육군을 상륙시키지 않아도 일본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뒤 미국은 일본의 다른 대도시들에 대해서도 야간 공습을 감행하였다.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 모인 연합국 대표들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전쟁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고 이를 거절하였다. 결국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다. 게다가 소련이 8월 8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해오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전 세계를 피로 물들게 했던 제2차 세계 대전이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실로 5천만 명의 생명이 희생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다. 2차세계전쟁으로 야기된 엄청난 파괴와 살상에 대한 반성으로 국제사회는, 세계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고 국제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국제연합이란 국제기구를 설립했다. 국제연맹을 계승한 것으로 유엔(UN)이라고 한다. 국제협력의 대원칙은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에 있으며, 국가 간의 평등 및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하여 상호우호 증진에 힘쓰고, 국제협력을 통하여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도적 제반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둔다는 것이었다. 본부는 미국 뉴욕에 있다.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에 많은 전쟁물자를 공급해 부를 축적하였고, 유럽을 도와 전승국이 되면서, 유럽을 뛰어넘어 명실상부한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