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빨치산, 남부군 45사단장 남원의 황의지(黃義智) <3회>
백선엽 장군에게 들려준,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황의지의 인생역정
- 수필가 서호련
남원 반선마을을 떠나기 전 나는 생존의 유일한 구 빨치산 출신인 황의지(黃義智) 씨를 만나 파란만장했던 그의 경력을 들을 수 있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무인다운 눈빛과 체격을 갖고 있었다.
전북 빨치산 주요 지휘자의 하나였던 그는 악몽 같았을 백야전사 토벌 작전의 주인공인 나를 만나고는 어색한 표정이었으나 둘 다 노년기에 접어든 세월 덕분인지 이내 속 얘기를 털어 놓았다.
백선엽장군의 이야기이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지리산 뱀사골. 반선 주차장에서 매표소를 지나면 오른쪽에 현대식 2층 상가 건물이 일자로 서 있고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전적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지리산에서 군경과 빨치산 사이에 벌어졌던 또 하나의 전쟁을 연상시키는 것이라고는 이 기념관이 유일하다.
지난해 나는 이곳에 들려 새로운 감회를 맛보았다. 전시실 유리상자 안에는 각종 귀순 권고 전단, 공비들의 장비 책자 등이 전시 돼 있었고 벽에는 백 야전사 백 일 토벌작전의 단계별 작전 요도가 낯 있는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지난 79년 건립된 이 기념관이 뱀사골과 심원계곡이 만나는 이곳에 자리한 것도 우연이 아닌 듯했다. 반선은 바로 김지회와 홍순석이 사살된 곳이었고 뱀사골은 오랫동안 빨치산들의 주요 아지트가 됐던 곳이었다. 전적기념관 밖에는 고 이승만 대통령의 「충혼」이란 휘호가 새겨진 충혼각이 서 있고 한켠에는 나와 최치환씨의 공적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55년 5월30일 서남지구 전투경찰 사령부가 토벌작전 중 숨진 군경 6,333 위의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남원의 광한루원에 세웠던 이 충혼각은 87년 6월 6일 이곳으로 이전됐다.
우연히 순시 차 청주에 들렀다 급보를 전해 받았던 제주 4.3사건. 밤잠을 거르면서 진압 작전을 구상했던 여수 14연대 반란, 김지회의 구례 습격, 5사단장으로 공비 토벌을 진두지휘하던 시절, 백야전사의 작전, 참모총장 시절 백 전투사령부의 끝내기 토벌 작전 등 내가 직·간접으로 맺었던 빨치산과의 악연이 눈앞을 스쳤다.
그것은 승리한 자의 감개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직·간접으로 빨치산 토벌에 관계한 오랜 기간 동안 내가 특별히 잘못을 저질러 자책하는 심정이 든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싸움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되도록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었다. 내 가슴 한켠에서 문득 피어났던 어두움은 피할 수도 있었을 동족간의 대결 속에서 그토록 많은 생명이 사라져 간 상황에 대한 원초적인 슬픔에 가까웠다.
왜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가. 주전선 뒤편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전쟁에서 양쪽으로 죽어간 그 숱한 죽음만큼 이념이란 소중했던 것인가.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분출됐던 그 극단적인 증오를 다스릴 순 없었던 것인가. 나는 이 같은 물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순창 태생인 그(황의지)는 44년 징병1기로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 전선에 투입됐던 인물이었다.
다음은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징병 소집 통고를 받고 나는 바로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나 때문에 공출 압박을 심하게 받고 일본놈 순사들로부터 갖은 시달림을 받을 부모님 생각에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힘으로야 쬐그만 일본놈 순사 한두 명을 때려 뉘이기는 일도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전선에 투입돼 남경에까지 갔다가 독일 패망 후 만주로 이동해 관동군에 합류했다. 일본군은 조선인에 대해 항상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옷을 차려입고는 갈 수 없도록 했다. 나는 탈출을 기도하다가 문 밖을 나서는 순간에 되잡혔다.
8.15해방은 나와는 무관했다.
9월 15일, 관동군 무장 해제 시 함께 무장 해제당한 나는 곧바로 소련으로 끌려갔다. 하바로프스크에서 18일 동안을 더 들어가 쿠즈바스 탄전 지대에 이르렀다. 거기서 꼬박 4년 동안 나는 광부로 지냈다. 비록 포로의 몸이었지만 혹독한 식민지 생활을 겪었던 나는 처음 대하는 소련의 모습에 크게 감명 받았다. 간수들은 자주 욕지거리를 하기는 했으나 한 번도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다. 일본 순사들이나 헌병들에게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나중에 내가 본명을 버리고 황학소(黃學蘇)라는 이름을 택한 것도 바로 소련에서 배우자는 뜻이었다.
48년 말, 포로 송환선을 타고 상륙한 곳이 흥남이었다. 흥남여중에서 동포들의 환영과 함께 정치사상 교육을 받았다. 북한 당국은 북한 땅에 남아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나는 한시바삐 해방된 고향에 가고 싶었다.<황의지 진술 계속>
♨출처/남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