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 나오는 아리아 '그대의 찬손'을 왕년의 대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가 부릅니다
맨 밑에는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부르는 '그대의 찬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용음회 칼럼 애독자 여러분들께!
드디어 이 연재물도 오늘로써 19편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따뜻한 애정으로 이 컬럼을 읽고 들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베를리오즈,비제,생상스드뷔시,말러 등이 빠진 것이 자못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지요.
차이코프스키 등 빠뜨려서는 안될 작곡가들은 용음회 칼럼에 이미 아래와 같이 올려놓았음을 말씀드리오니 즐감들 바랍니다.
# 313 그리그
# 315 드보르작
# 316 차이코프스키
# 317 포스터
# 318 나폴리 민요
# 321 아일랜드 민요
차기 구상하고 있는 연재물은 <멋진 음악과 함께 떠나는 대화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옥같은 음악을 들으며 다빈치,미켈란제로,렘브란트,모네,고흐,피카소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다시한번 애독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 부탁립니다.
* 루카
[ 베르디의 진정한 후계자, 자코모 푸치니(1858~1924) ]
토스카나 지방이라면 이탈리아 西岸,피렌체를 主都로 한 아르노 강 유역의 일대를 말합니다. 출렁이는 구륭들의 기복 속에 이탈리아 소나무와 실백편의 숲, 올리브와 포도나무가 자라는 경사지, 비옥한 들판 등이 어우러져 이탈리아에서도 경치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 높습니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내려오는 고속도로가 토스카나 지방에 들어서서 비아레조를 지나 피렌체를 향해 내륙으로 꼬부라지면 곧 루카로 내려서는 인터체인지가 나옵니다.
루카는 온 도시가 성벽으로 빙 둘러싸여 있습니다. 위풍있는 중세 때의 이 성벽은 이탈리아에 지금 남아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힙니다. 나중에 지배권은 잃었지만 중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도시 국가의 하나로, 다음에는 상업 중심지로 발전해 왔습니다.
* 루카로 가는 길, 푸치니가 말년을 보냈던 비아레조가 왼편에 보입니다
1805년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 엘리자가 루카의 통치자가 되어 나폴레옹 광장을 중심으로 많이 거리를 개조했다고 하지만 성문을 들어서면 도시의 창연한 고취(古趣)가 옛날의 영화를 말해 줍니다. 루카는 중세 때 토스카나의 수도였습니다.
지금 인구 12만의 이 도시는 옛날과 거의 마찬가지로 집들이 다닥다닥 숨 답답하게 밀집해 있습니다. 여러 방향으로 제멋대로 꼬부라진 많은 '비콜리(골목길)'들이 迷路같습니다. 그러면서도 군데군데 壯麗한 중세 건축물들이 위풍당당하여 그 수가 40개를 넘습니다.
* 중세건축물이 밀집되어 있는 루카
여기가 자코모 푸치니의 고향입니다 .이 도시에서도 가장 오래된 지역의 중심은 미켈레 광장. 이 광장에서 푸지오 街라는 좁다란 골목길을 접어들면 그 30번지에 푸치니의 생가가 있습니다. 벽이 다 헌 빨간 벽돌의 4층 집입니다.
* 푸치니 생가
입구의 기념판은 1924년 푸치니가 죽자 30일 만에 내건 것입니다. 푸치니 일가는 이 15세기 때 건물의 3층 전부를 쓰고 있었고, 또한 3층이 기념관이 되어 있습니다. 방들은 넓고 천장이 높습니다. 육필 악보와 편지들, 푸치니가 걸치던 외투와 의자, 그리고 그가 직접 쓰던 피아노 등이 놓여 있습니다. 푸치니가 루카의 파치니 음악원에 다닐 때의 작품도 여기 남아 있습니다.
푸치니는 이 집에서 태어나 1880년(22세) 파치니 음악원을 졸업하고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할 때까지의 청소년 시절을 여기서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후 이 고소(古巢)가 남의 손에 넘어가 버리자 1893년(35세) <마농 레스코>의 성공으로 큰돈이 생겼을 때 푸치니가 도로 사들였고, 1974년 그의 50周忌를 기해 후손이 루카 市에 기증함으로써 지금 생가는 1973년에 설립된 루카의 푸치니 재단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생가에서 어린 푸치니가 수없이 지나다니던 골목을 도로 빠져나와 미켈레 광장에 서면 그 한쪽 가에 聖 미켈레 성당이 마주 보입니다. 뒷날의 <토스카>의 작곡가가 10세 때 아동 합창단원으로 있던 곳입니다.
* 어릴 때 푸치니가 뛰어놀았던 루카 성벽
소년 푸치니가 술집 등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돈을 벌던 거리를 걸어 산 마르티노 광장에 이르면 두오모 성당이 나타납니다. 이 곳은 푸치니 일가가 5대에 걸쳐 차례로 오르간 주자 겸 합창장을 지낸 곳으로 유명한 명소입니다. 푸치니 家는 대대로 음악가 집안이었고, 자코모의 아버지도 당연히 아들을 이 성당 오르가니스트의 후계로 만들기 위해 음악 교육을 시켰습니다.
6세 때 아버지가 죽었고 푸치니는 14세가 되자 대를 이었습니다. 이 성당은 푸치니 음악의 종묘(宗廟)나 다름없습니다. 음악사상 음악의 재능을 세습적으로 이어받은 家系로서는 바흐의 7대가 있고, 푸치니의 5대는 그 다음이 됩니다.
푸치니가 다니던 파치니 음악원은 폰차노 광장에 남아있고 이름은 보케리니 음악원으로 바뀌었습니다. 18세기의 대표적 작곡가인 보케리니가 루카 출신이어서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 성 미켈레 성당
푸치니는 어린 시절 음악 공부가 하기 싫어 하루 종일 친구들과 루카의 古城壁이나 성벽 밖 세르키오 川의 방죽 풀밭에서 새를 잡으며 놀았습니다. 한 바퀴 둘레가 4km나 되는 루카의 성벽은 그 위가 고목이 늘어선 아름다운 산책로이고, 성벽에서 튀어나온 11개의 보루(堡壘)는 지금도 푸치니 때와 마찬가지로 어린이들의 놀이터입니다. 성 밖 사위(四圍)는 소나무와 실백편이 우거진 녹지로 루카는 아직도 牧歌에 싸여있습니다.
푸치니가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8세 때인 1876년 피사에서 베르디의 <아이다>를 구경하고 나서였습니다. 그는 이 때 피사에서 피사까지의 32km를 걸러서 왕복했습니다. 그 강보(江步)가 뒷날의 푸치니를 낳았으니 성 밖으로 뻗은 피사로 가는 길이 푸치니 음악의 大道처럼 빛납니다.
* 루카의 푸치니 동상
루카에서는 푸치니 재단 주최로 국제 성악 콩쿠르가 매년 열리고 있습니다. 11월 26일부터 푸치니의 忌日인 11월 29일까지 계속됩니다. 푸치니의 외아들인 안토니오가 죽은 뒤 그의 부인이 2억 리라를 내어 그것을 상금의 기금으로 하고 있습니다.
푸치니의 先代가 루카에 자리잡은 것은 1700년대 초. 그 이전 선조의 땅은 루카에서 북쪽으로 세르키오 川을 따라 올라가는 첼레라는 조그만 산골입니다. 집이 채 100호도 안되는 연맥(連脈) 사이의 이 마을에는 푸치니 家의 古家를 살려 기념관으로 차려 놓고 있습니다. 푸치니가 <나비부인> 일부를 작곡한 피아노도 와 있습니다. 푸치니는 죽기 한 달 전 이 선조의 집 벽에 기념판을 걸 때 이곳을 찾아왔었습니다.
푸치니는 어머니가 죽자 고향 루카를 영 떠났고, 새로 자리 잡은 곳이 토레 델 라고입니다. 토레 델 라고는 루카에서 서쪽으로 30km 남짓, 지중해의 해안 도시 비아레조에서는 남쪽으로 8km 가량의 위치에 있습니다. 비아레조에서 피사로 가는 아름다운 숲 사잇길을 한참 내려오다가 자코모 푸치니 家로 접어들어 직선으로 약 1km 이 길을 끝까지 가면 길은 호수 앞에서 멎고 맨 끝의 222번지가 '빌라 푸치니'입니다.
푸치니가 직접 지어 1891년(33세)부터 1921년 비아레조로 이사할 때까지 30년간을 산 집입니다.
* 토레 델 라고
집 앞은 조그만 광장이요, 그 너머로 넓은 마사추콜리 湖가 녹생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광장 가는 호수를 유람하는 배들의 선착장입니다. 광장의 화단에는 푸치니가 산보 차림을 한 자연스런 모습의 동상으로 서서 자기 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푸치니가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에는 호수 물이 집의 수 미터 앞에서 찰랑거렸고, 그래서 그가 즐기는 물새 사냥을 위해 배를 띄우기가 좋았습니다. 마사추콜리 호는 그의 물새 사냥터였을 뿐만 아니라 모터보트의 놀이터이기도 했습니다. 푸치니의 자동차와 모터 보트 운전 취미는 유명했습니다.
자동차는 항상 신형을 사들였고 모터보트는 船隊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푸치니가 이 마을의 헌 집을 사서 헐고 빌라 푸치니를 신축하는 동안 잠시 머물며 <토스카>를 작곡하기 시작한 곳이 호수 건너 북동쪽 맞은편 산 위의 키아트리 부근 산장이었습니다. 한쪽으로 호수가 내려다 보이고 다른 쪽으로 푸른 지중해가 조망됩니다.
* 마사추콜리 호수
빌라 푸치니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이 야자수 등 열대 식물로 우거졌습니다. 2층짜리 건물의 내부는 푸치니가 살던 당시 그대로입니다. 그 호사스러움은 대오페라 작곡가의 榮華를 말해 줍니다. 아래층의 서재는 밟고 넓습니다. 그가 애용하던 피아노, 그 옆의 책상 위에는 그의 손때 묻은 필기도구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밤중에 일하는 것이 버릇이었기 때문에 피아노에는 소음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책상 앞에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푸치니를 상상합니다. 그는 작곡을 할 때면 집 안에서도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푸치니는 세 번째 오페라 작품인 <마농 레스코>로 일약 명성과 富를 얻은 뒤 제4작인 <라 보엠>,제5작 <토스카>,제6작 <나비부인> 등을 연거푸 내놓아 名人의 자리를 부동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3대 걸작의 산실이 이 집, 이 방입니다.
*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가 자주 들르던 식당앞의 그의 동상
1895년 12월 10일 한밤중에 <라 보엠>을 완성하면서 미미가 죽는 장면을 쓰고 났을 때 혼자 이 서재의 한가운데 서서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내어 울었다던 푸치니, 그 뜨거운 감격이 아직도 식지 않은 듯 방 안 가득한 열기가 느껴집니다.
푸치니는 토레 델 라고에 모여드는 작가, 미술가들과 먹고 마시는 모임을 만들고는 마을의 한 구두 수선공의 오두막을 사들여 '라 보엠 클럽'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저녁이면 클럽 멤버들이 푸치니의 집에 모여 들었고 이 사람들이 옆방에서 떠들어대는 가운데(이 모임의 회칙 중에는 '정숙을 금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푸치니는 작곡을 했습니다. 자신이 피아노로 쳐보는 테마를 누가 따라 부르기라도 하면 그는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 빌라 푸치니
서재와 총기실 사이가 소예배실이요,이 방이 푸치니의 묘실입니다. 푸치니의 관은 자기 집 방 가운데 모셔져 있습니다.
토레 델 라고에서는 매년 여름 야외에서 푸치니의 작품만으로 페스티발이 열립니다. 푸치니가 63세 때인 1921년 비아레조에 새 집을 지어 옮긴 것은 토레 델 라고의 집 부근에 집 부근에 이탄(泥炭) 공장이 생겨서 나오는 소음과 악취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 '나의 에덴 동산,나의 왕'이라 불렀던 빌라 푸치니와의 작별은 자신의 말대로 '생애 최대의 슬픔'이었습니다.
비아레조는 긴 백사장을 따라 난 해안의 산보로와 松林과 고급 호텔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는 여름 피서지이자 겨울 피한지입니다. 푸치니가 생애의 마지막까지 약 3년간의 말년을 살던 집은 바닷가에서 가까운 푸치니 광장의 한쪽 모퉁이에 있습니다. 당시는 한적한 장소라고 택했던 것이 지금은 집 앞으로 간선 도로가 생겨 차들의 소음에 시달리는 자리입니다.
* 푸치니 묘
빨간 벽돌의 집은 넓은 정원의 나무들에 반쯤 가려진 채 역시 호화롭습니다. 푸치니는 마지막 작품인 <투란도트>의 대부분을 이 집에서 썼고 여기서 發病하여 멀리 브륏셀의 병원으로 갔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2차 대전 때 이 저택은 거의 황폐 상태가 되었었고, 한 미군 병사가 많은 편지와 기록들을 슬쩍 본국으로 가져갔다가 나중에 뉴욕의 공공 도서관에 기증했기 때문에 푸치니의 말년의 자취는 이 집에서 거의 지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