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영화는 반대로 피가 많이 나오는 영화이다.
뭐 쏟을 피가 너무 많아 이제 피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그렇다면 눈물은???
전도연이 극중에서 징징대고 악을 쓰는 장면은 많지만 정작 눈물을 흘리는것은 몇초...
그 눈물의 의미는 남자하고의 연을 끊어 버리고 세상의 중심에 서자고 하는 페미니즘적이라고 생각하면 되나??
류승완의 영화들을 그가 유명하기전에 이미 보아온 나로서는 그의 놀라운 변신에는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하지만 그는 절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어쩌면 절대적인 마초 신봉자인지 모른다.
유승완은 이소룡 매니아이다.
이소룡식 무술과 사상은 강한 남성우월주의를 뜻한다고 볼 수있다.
하지만 전도연과 이혜영은 그런 불사신과 같은 마초들을 기발한 머리와 불굴의 정신력으로 그들과의 싸움에서는 이긴다.
그렇다면 유승완은 자신이 신봉하는 이소룡을 자신의 변신을 위해 버렸는가...
사람들은 이 영화의 중심에 여자들이 서있고 여자들이 승리 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녀들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피튀기게 싸우면서 차지할려고 했던 돈가방을 어부지리로 나중에 나타나 들고 튄 동네 양아치 류승범도 승자는 아니다.
강한 남성을 신봉하는 감독이 가장 멸시하는 양아치와 여자들의 승리를 손쉽게 내줄 일은 없다.
영화의 제목처럼 '피도 눈물도 없이'의 주제는 완벽한 배신이 있어야 했다.
결국 여자가 이 영화의 중심에 섰을려면 전도연이나 이혜영 둘중 하나도 나머지를 철저히 배신하고 혼자 돈가방을 차지하는 반전이 나와야 됐을 영화가 아닐까...여자들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영화의 주제 피도 눈물도 없이를 완성 하지 못한것이다.
감독의 이런 의도된 계산인지 아니면 반전을 너무 의식 한 탓인지 어느누구도 승자가 없는체 이 영화는 마무리 한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전도연과 이혜영이 서로 오해를 풀고 화해 했을때
돈가방을 탈취할려고 나타난 전도현의 애인 정재영은 이런말을 한다.
"띠바 이래서 여자들은 안돼"
우리 류승완이 페미니즘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은 이제 접어야 한다.
[Review] 피도 눈물도 없이
■ Story
한때 범죄조직과 관계맺었던 여인 경선(이혜영)은 도박에 빠진 남편이 남긴 빚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택시운전을 하며 성실히 살아보려 하지만 빚독촉을 피할 길이 없다. 어느날 경선의 택시와 부딪힌 빨간 스포츠카, 차를 몰던 젊은 여자 수진(전도연)은 사고현장에 휴대폰을 흘린다. 휴대폰을 찾으러 경선을 만나러간 수진이 경선의 빚을 받으러온 칠성파 건달들에게 납치되면서 경선과 수진은 가까워진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수진은 투견장을 관리하는 전직 권투선수 독불(정재영)에게 맞고 사는 데 진력이 났다. 독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던 수진은 경선에게 제안을 한다. 며칠 뒤 투견장에 가짜 경찰이 들이닥치는 사건이 날 테니 그때 돈을 들고 튀자는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 Review
류승완 감독이 보기에 세상은 너무 위험하다. 사람들은 투견장의 개들처럼 서로 물어뜯지 않으면 살 수 없다며 으르렁댄다.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보여준 10대 소년들을 둘러싼 폭력의 정글은 두 번째 장편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약육강식의 잔인한 사회구조로 이전된다. 돈가방을 차지하려는 싸움이 이토록 처절한 까닭은 감독이 여기서 비극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좀비처럼 되살아나 관객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독불이 목덜미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질 때 인간은 분명 투견이다. 그들은 개처럼 싸우다 개처럼 죽는다.
이야기만 놓고보면 이건 전혀 낯선 영화가 아니다. 약자끼리 모종의 연대의식을 느끼는 두 여자는 <바운드>에서, 왕년에 한가닥했던 여인과 그를 염려하는 늙은 형사는 <재키 브라운>에서, 돈가방을 차지하려는 패거리들이 얽히고 설키는 관계는 <록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에서 따왔다. <피도 눈물도 없이>가 직간접적으로 빌려온 영화들은 이보다 많지만 류승완 감독에게 이런 인용은 하등 문제될 게 없다. 그건 이미 하나의 장르이고, 문제는 비슷한 틀 안에 무엇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에 있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인물들은 살아남고자 도망치고 속이고 훔치고 때린다. 형사가 양아치를, 양아치가 삼류깡패를, 삼류깡패가 보스를, 보스가 애인을, 애인이 정부를 착취하거나 기만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먹이사슬을 이룬다.
가이 리치라면 게임처럼 즐겼을 테고 타란티노라면 장르적 테크닉으로 승부했을 지점에서 류승완은 지금 이곳의 사람들이 처한 너절한 신세를 담는다. ‘펄프누아르’라는 신조어를 내세웠지만 이 영화의 원전은 엘모어 레너드의 범죄소설이나 40년대 미국의 필름누아르가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흘러간 트로트 가사가 어울릴 법한, 때국 흐르는 삶에서 등장인물들을 끄집어낸다. 복싱하다 라운드걸이랑 눈맞아 살고 있는 깡패, 그놈한테 미운정 고운정 들어서 만날 얻어터지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젊은 여자, 한때 그녀처럼 살다 지금은 집나간 남편의 빚 때문에 밤새 택시 몰며 취객의 토사물을 치워야 하는 여인, 그녀를 도와주고 싶지만 보스가 시키니 할 수 없이 빚독촉하러 다니는 늙은 건달, 그들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폼나게 살아보려는 양아치 등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지지리 궁상이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류승완은 이런 밑바닥 인간군상에서 촌철살인의 대사와 해학과 비애를 함께 건져올린다. 경선과 죽을 둥 살 둥 싸우던 늙은 건달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젊어서 반짝하는 거 아무 소용없더라. 우리 봐라. 이 나이에 집이라도 한채 변변한 게 있냐”며 다독이는 장면이나 먹던 삼겹살을 주체못해 우물거리면서 칠성이 형님(백일섭)의 꾸지람을 듣는 대목은 킬킬거리다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순간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철없이 날뛰는 10대 양아치들의 영화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는 유통기한이 지난 건달들의 영화이다. “난 지금 옛날에 당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냐. 새파란 기집애한테 뒤통수나 맞고 다니는 퇴물이라고” 하는 경선의 한마디는 그래서 가슴을 찌른다.
문제는 돈가방이다. <쉘로우 그레이브>에선 모든 사건의 진원지지만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돈가방은 장르의 논리가 이끄는 결과물일 뿐이다. 사람들의 표정과 대사와 관계가 흥미진진한 이 영화는 정작 돈가방이 중심에 놓이는 순간부터 충만했던 극적 에너지가 반감된다. 기어이 비극의 끝을 보려는 의지와 누가 돈가방을 차지할 것인가라는 장르적 결말이 엇갈릴 때, 액션장면에 대한 매혹과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균형을 잃을 때, 잔혹묘사만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이>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비해 후퇴한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데뷔작으로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뒤흔드는 반란을 일으킨 이 재기넘치는 감독은 두 번째 영화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꽃피울 폭넓은 지반을 보여준다. 무성영화 시대의 편집기법에서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종횡무진하는 스타일부터 70∼80년대 국산 액션영화에 대한 애정을 표하는 캐스팅에 이르기까지 류승완의 자산은 기존 주류영화의 품에서 확연히 벗어나 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박성빈, 배중식, 김수현, 류승범 등 낯선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로 효과를 얻은 만큼 <피도 눈물도 없이>는 신구, 백일섭, 김영인, 백찬기 등 노익장 배우들의 앙상블이 한몫을 단단히 한다(악당 KGB(김금복)로 신구가 등장해 <8월의 크리스마스>와 <반칙왕>의 아버지처럼 나직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온갖 악행을 명령할 때 느껴지는 오싹함이란!). <피도 눈물도 없이>는 처절한 액션이 아니라 사람냄새나는 그들의 연기로 눈과 귀를 사로잡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