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후(金允侯)는 고종(高宗) 때 사람이다.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서 살았는데, 몽골군이 오자 김윤후는 처인성(處仁城)으로 피난하였다가 몽골 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 와서 성을 공격하니 김윤후가 그를 사살하였다.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하였으나 김윤후는 다른 사람에게 공을 양보하면서 말하기를, “전시(戰時)를 맞았지만 나에게는 궁전(弓箭)이 없었으니 어찌 헛되이 무거운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고사하여 받지 않자 이에 섭랑장(攝郞將)으로 고쳤다. 후에 충주산성방호별감(忠州山城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군이 쳐들어 와 충주성을 포위하기를 70여 일간 하니 군량을 저축한 것이 거의 바닥났다. 김윤후가 괴로워하는 군사들을 북돋으며 말하기를, “만약 힘을 내어 싸울 수 있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려 하니 너희는 불신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고는 드디어 관노(官奴) 문서를 취해 불사르고 또 노획한 우마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게 다가가니 몽고군은 조금씩 기세가 꺾였고 결국 남쪽을 도모할 수 없었다. 이 공으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 되었고, 그 나머지 군공이 있는 자들은 관노와 백정(白丁)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작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외관으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지만 당시 동북면은 이미 몽고에 함락되었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관직이 수사공 우복야(守司空 右僕射)에 이르러, 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