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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12
[12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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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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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RGMAQoz6HA&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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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한다면 늘 그와 함께 하고 싶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 가문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인간 세상 안으로 육화강생하셨음을 증명해보이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과 한배를 타기 전에 하던 일이 세리였습니다.
세리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은 정확성과 치밀함입니다. 그들이 하루 온 종일 한 일은 금전출납부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런 전문성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치밀하게 적고 있습니다. 예비자 때나 초보 신자 시절, 많은 분들이 체험하시는 일입니다. ‘두꺼운 구약성경보다는 신약성경부터 먼저 통독해야지!’ 하는 마음에 마태오 복음 1장 1절을 탁 펴는 순간,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구절이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이름들만 잔뜩 나열됩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고’란 말마디만 무미건조하게 반복됩니다. ‘별 것도 아니구먼!’ 하면서, 단 한 페이지도 읽기 전에 성서를 내려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무미건조한 듯 보이는 이 족보야말로 무궁무진한 보물이 담겨있는 보고(寶庫)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이 족보에는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역사, 우리와 똑 같은 모습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자취가 묘사되고 있기에 중요합니다.
우리가 장황하게 나열되는 예수님의 족보를 접하고 식상해한 반면, 성인(聖人)들은 오히려 크나큰 위로와 기쁨, 환희를 접했다고 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께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대하면서 그간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하느님, 늘 구름 속에 숨어계시는 듯 했던 하느님, 애매모호했던 하느님께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심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같은 경우 예수님의 족보를 대하면서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셨던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시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감격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족보를 대하면서 우리와 친구가 되기 위해 자신의 키를 낮추신 겸손의 하느님, 우리와 똑같이 온 몸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철저하게도 ‘한 인간’인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다고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생각과 계획을 우리의 좁은 안목으로서는 쉽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냥 편하게 하느님으로 계셨으면 골치아픈 일도 겪지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굳이 복잡하고 소란스런 인간 세상, 때로 고통과 상처투성이뿐인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굳이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한다면 그와 늘 함께 하고 싶겠지요. 더 나아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소유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와 일심동체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만물은 제 색깔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 세상은 반짝반짝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없는 이 세상은 상상도 못하겠지요. 그가 없는 이 세상은 짙은 회색으로, 부연 황토색으로 변할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의 완벽한 일치, 완벽한 동화, 완벽한 하나됨을 추구합니다. 우리 인간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당신의 모든 조건을 버리시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십니다. 우리와 완벽하게 하나 되십니다. 철저하게도 육화강생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성과 인성의 교환입니다. 정말 이해가지 않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하느님의 자기 낮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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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하느님 자녀가 되는 법; 그분의 씨를 얻기 위해 세상에서 바보가 되는 수밖에>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CQUxY3R-1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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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때부터 그 후손으로 메시아가 태어나기까지 끊임없이 그들 역사에 함께 하셨습니다.
지옥에도 그리스도의 족보가 이어질까요? 만약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갔다면 지옥에 갈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씨앗이 전해지는 그 족보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자신도 그 씨앗을 전해주는 부모가 되었느냐에 있습니다. 구원은 새로 태어남을 통해 얻을 수 있지 개인적인 노력으로 얻어지지는 않습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처음 광해는 왕의 모습보다는 좀 광기 어린 기이한 모습을 보입니다. 폭군인 것 같고 정치엔 관심 없이 여색이나 탐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오히려 자신이 독살당할까 두려워 대신 세워놓은 광대인 하선이 더 왕 같이 행동합니다. 하지만 점점 그가 가짜 왕인 것이 밝혀지려 하자 어쩔 수 없이 광해가 등장합니다. 광해의 가슴에 흉터가 있는데 그 흉터를 보이라는 역적들 앞에서 광해는 옷을 벗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흉터가 없었던 하선은 더 왕 노릇을 해보고 싶었지만, 일반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판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답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 족보에 들고 전해오는 믿음의 씨앗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구원에서 배제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꼭 지녀야 하는 그 족보만의 믿음의 씨앗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버지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우리의 구원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믿음의 상속권,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성령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믿음이기 때문에 성령은 믿음의 씨앗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이 족보에 들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이 족보에서 여성은 총 5명이 등장합니다. 타마르와 라합, 그리고 룻과 우리야의 아내, 마지막으로 마리아입니다. 이 모든 이들의 공통점은 자칫 아브라함부터 이어오는 믿음의 씨를 받지 못할 뻔 했지만 그 씨를 위해 세상의 온갖 비난과 오해를 무릅쓸 줄 알았다는 데 있습니다.
타마르는 유다의 아들들이 다 죽기 때문에 며느리로서 그 씨를 받지 못할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를 시아버지에게 직접 받음으로써 넘깁니다. 라합은 이방인이었고 창녀였지만 그 씨의 주인을 받아들임으로써 족보에 들게 됩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죽어 구원의 족보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지만 끈질기게 보하즈의 씨를 얻어냅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우리야가 있었지만 다윗으로부터 왕족의 씨를 받고 솔로몬을 낳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께서도 남편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씨를 직접 받음으로써 세상에서는 모멸스러운 처지가 됩니다. 구원의 족보에 든 이들은 모두 이 믿음의 씨앗을 얻기 위해 세상의 모든 시련을 이겨낼 줄 알았던 인물들입니다.
지금 이 구원의 씨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믿음을 전해주라고 세우신 교회를 통해 전달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참 구원의 씨요, 믿음의 씨앗인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기 때문에 그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마치 세상에서는 비난받을지라도 믿음의 씨앗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 줄 알았던 그리스도 족보의 여인들과 같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의 족보에 들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돌아가실 때 “저는 결국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구원은 쿠테타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족보에 들어 자녀가 되고 어머니가 됨으로써 얻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자녀가 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구원의 씨를 받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바보가 되는 길을 택하고 있나요? 아무나 구원의 족보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S시에 거주하는 한 아버지가 4남매를 잘 키워 모두 대학을 졸업시키고 시집, 장가를 다 보내고 한 시름 놓자 그만 중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하루는 아들과 며느리들, 딸과 사위를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키우고,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보내고 사업을 하느라 7억 정도 빚을 좀 졌다. 알다시피 내 건강이 안 좋고 이제 능력도 없으니 너희들이 얼마씩 좀 갚아다오. 이 종이에 얼마씩 갚겠다고 좀 적어라.”
아버지에게 재산이 좀 있는 줄 알았던 자식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고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형제 중 그리 잘 살지 못하는 둘째 아들이 먼저 종이에 5천만 원을 적었습니다. 그러자 마지못해 나머지 자식들은 경매가격을 매기듯 큰아들이 2천만 원, 셋째 아들이 1천 5백만 원, 딸이 1천만 원을 적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문병 한번 없고, 그 흔한 휴대폰으로 안부 전화 한번 없는 자식들을 다시 불러모았습니다. 이번에는 며느리들과 사위는 오지 않고 4남매만 왔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이 얼마 되지 않는 유산으로 싸움질하고 형제간 반목할까 봐 전 재산을 정리하고 공증까지 마쳤다. 지난번에 너희가 적어준 액수의 5배를 지금 준다. 이것으로 너희에게 내가 줄 재산상속은 끝이다. 장남 1억 원, 둘째 2억 5천만 원, 셋째 7천 5백만 원, 딸 5천만 원.”
이 결정에 어떤 자식도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도 이렇게 그 족보 안에 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따라 심판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 족보에 들기 위해 얼마나 봉헌할 줄 알았느냐에 따라 구원과 심판, 혹은 상속 재산의 양이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는 합당치 않았지만, 구원의 족보에 들 줄 알았던 여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여인들은 마리아를 포함한 5명이 아니라 교회를 포함한 6명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자녀가 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거부했던 선악과를 적어도 바칠 용기는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씨앗은 성체 성혈을 통해 새로운 자녀를 낳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이신 교회를 통해 태어나고 또 그 태어남에 협력할 줄 아는 이들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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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7 :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믿도록 한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며, 육에 따라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으로 남아 계시면서, 하느님이시기를 그치지 않으신 채로 사람이 되셨다. 마태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이 되셨음을 밝히고 있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두 번째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둘 다 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서 훌륭한 선조였다. 주님께서는 할례로 유대 민족의 선조가 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가계에서 육신을 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6절)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다윗’은 ‘손이 뛰어난’ 또는 ‘사랑받는’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이셨다. 다윗은 전투에서 뛰어났고 힘이 넘쳤으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행동으로, 자비로, 온화함으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
마리아는 요셉과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낳으셨지만, 요셉을 마리아와의 혼인과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동정녀로서 아기를 낳는다는 이유로 마리아와의 혼인관계를 파기하지 않았다. 또한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이다. 아들을 입양했어도, 자신의 아내가 낳은 아들은 아니라도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14대’라는 말을 3번 하는데 여기에도 마태오가 의도적으로 족보를 14대씩 나눈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족보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역사를 면밀히 이끌어 가시며, 그 역사의 절정에, 즉 때가 찼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 가문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이 족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대림시기의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 족보에 나타나는 의미에서와 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삶으로 많은 은총 속에 사는 때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겪는 때도 있다. 때문에 항상 주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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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대림 시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때”(「전례주년에 관한 일반 규범」, 39항)이고,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림 시기의 두 가지 의미를 드러내고자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를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로, 그리고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를 ‘주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로 나누어 전례를 거행합니다.
오늘은 대림 시기 둘째 부분의 첫날입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지켜졌음을 다시금 깨달으면서, 화답송의 시편처럼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라고 응답해 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 1―2장에서 유다인의 전통적 주석 방법을 사용하여,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이행하신 모든 약속을 예수님 탄생 이야기로 드러냅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1―11장 참조)의 ‘하늘과 땅의 족보’(2,5 참조)와 ‘아담의 족보’(5,1 참조)가 가지는 하느님 축복의 효과를 염두에 두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창조와 인간 역사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하느님께서 지난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이사 51,1-2 참조), 다윗 임금에게서 펼쳐 보이셨으며(이사 9,6 참조), 예수님 안에서 성취하신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줍니다.
마태오는 구약 성경 속 네 명의 여인을 족보에 삽입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으로 자리매김시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의 명단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각 십사 대로 압축하여 기록하면서 다윗과 그 후손의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에 감사하며, 화답송을 다시 한 번 노래합니다. “정의와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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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마태 1,1-2)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마태 1,15-17)
1) 마태오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족보를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시대 때부터 예고되었던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증명이 없어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믿지만, 그래도 이 족보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의 구원’을 처음부터 계획하셨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은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고,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것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족보를 십사 대씩 끊어서 구분한 것 같습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아무 계획도 없이 지내시다가 상황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또 우발적으로 일하신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전지전능하신 주님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믿음과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2) 족보에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멀리 떨어져 계시다가 필요할 때에만 잠깐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3) 엄밀하게 말하면, 또는 인간의 혈통만 생각하면,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니라 ‘요셉의 족보’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요셉의 족보에 예수님의 이름이 편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족보를 당신의 족보로 삼으셨다고, 또는 인간의 혈통을 당신의 구원사업 안으로 끌어들이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족보 속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해서 인간의 족보를 당신의 구원 역사 속으로 들여오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족보에는 의인들의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이름도 있습니다. (물론 그 죄인들이 멸망을 당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은 젊은 시절에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고(1열왕 10,23),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는데(1열왕 3,10-14), 늙어서는 우상 숭배에 빠져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죄인이 되었습니다.(1열왕 11,9-10)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 그리고 르하브암의 아들 아비얌(아비야)도 우상 숭배에 빠진 ‘죄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1열왕 14,22-24; 15,3)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그런 일들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인간 세상에는 분명히 죄와 악이 많이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십니다.
5)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고, 또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즉 신앙인은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 뒤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는 사람입니다. 묵시록에서 말하는 ‘생명의 책’을 예수님의 새로운 족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7) (생명의 책에 이름을 기록하거나 지우는 것은 각 개인이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은 그 책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과 같고,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자격을 잃는 것은 자기 이름을 지우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책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기를 처음부터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연히 생겨난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5)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에페 1,11) 하느님께서 ‘나’ 라는 존재를 세상에 내기로 계획하신 일이나, ‘나’를 선택하신 일은 모두 세상 창조 이전에 하신 일입니다. 내가 이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난 것도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쩌다가 우연히 태어난,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대단히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구원’이나 ‘멸망’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나의 구원’인데, 그 뜻에 응답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역사의 관리를 맡기셨습니다. 또 하느님은 ‘내 인생’의 주인이신 분이지만, 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인생의 관리를 맡기셨습니다. 인간들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이 말은 인류 전체에도 적용되고, 각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생명의 책’ 말고, 책 한 권이 더 있는데, 그것은 각 개인의 행실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묵시 20,12) 최후의 심판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행실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행실’은 각자 자신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니, 그 책에 행실을 기록하는 일은 각자 자신들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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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버님은 가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두 가지를 물려준다. 하나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한양(漢陽) 조(趙) 씨라는 성(姓)이다.” 저는 교우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태어난 고향에 가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매일 기도하시는 삶을 보여주셨고, 신앙 안에서 사시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신앙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앙인들은 재물, 권력, 명예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먼저 신앙을 물려 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재물, 권력, 명예는 사라질지라도 신앙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양 조씨 현주공파입니다. 25대 손입니다. 시조는 고려시대에 벼슬을 하였고, 조선이 개국할 때 공신으로 함께 했다고 합니다. “정암(靜菴) 조광조(光朝)는 개혁 정치가로 유명합니다. 현대 인물 중에서는 시인이자 교육자인 조병화(趙炳華), 조지훈(趙芝薰), 독립운동가 조병옥(趙炳玉),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趙世衡), 헌법재판관을 지낸 조승형(趙昇衡), 국방부장관을 지낸 조성태(趙成台), 제22대 공군참모총장 조근해(趙根海), 국문학자 조동일(趙東一), 역사학자 조동걸(趙東杰), 통일부 장관 조명균(趙明均), 학교법인 우암학원 설립자 우암 조용기(趙龍沂)”와 같은 분이 있습니다. 조상들에게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겼을 때 독립 운동가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나라를 다시 찾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조선상고사와 환단고기가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쓰였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정과 나라 잃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사기의 관점도 있지만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상고사의 관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짧은 단군신화의 관점도 있지만 환단고기를 통한 단군조선의 관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알고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가의 역할은 과거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서 그를 해방시키는 것도 아니다.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이해하고 다루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겁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4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그것이 기쁜 소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족보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윗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루카 복음도 예수님의 족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뛰어넘어서 아담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창조하신 아담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루카는 유대인을 넘어서 온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합니다. 요한 복음은 혈연으로 인한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온 인류를 넘어서 우주적인 사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합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합니다.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자매님은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던 남편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가정에 충실했고, 완고한 성격이었습니다. 양심에 따라서 살기 때문에 굳이 신앙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께 효도를 잘 하였고, 아이들도 잘 키웠기 때문에 결혼기념일에 선물로 성당에 함께 가기로 하였습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아내는 너무 기뻤고, 그날 저녁 미사를 남편과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복음은 오늘 우리가 들었던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잘 모르는 이름이 지루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에 아내는 내심 걱정을 하였습니다. 모처럼 남편과 함께 성당에 왔는데 하필이면 지루한 족보이야기 나왔기 때문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내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이야기는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상당히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한번 믿어 보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도 나름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자매님께서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사셨기 때문에 남편은 지루한 족보의 이야기도 의미 있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그 한사람’이라는 글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만리길 떠나는 날 그 한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다면 좋겠습니다.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에 그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주님을 믿고 싶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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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탄생>
마태오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탄생>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ㄴ)
하느님께서
사람을 낳으신다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낳고
사람에게서
사람이 태어난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태어나신다
사람이
하느님을
낳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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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인간의 족보를 지니신 예수님>
+찬미예수님
이태리에 처음 나가 관공서에서 행정업무를 보다 보면 국가 간의 서류 작성 방식의 차이로 인해 난감한 일이 생기곤 합니다. 이 난감한 일은 특별히 장기비자를 받을 때 일어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출신 지역이 여권에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태리의 공적인 서류에는 반드시 출생 지역이 명시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밀라노 태생이면 밀라네제, 로마 태생이면 로마노, 시칠리아 태생이면 시칠리아노 등등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인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로 인해 한국인들은 한국의 기본증명서를 영어로 발급받은 뒤 현지 대사관에서 그 서류가 공문서로써 효력이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공증 받아야만합니다.
어디선가 들은 바로는 한국의 경우, 지역 갈등을 없애기 위해 이를 기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태리 역시 지역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출신 지역을 반드시 명시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역사와 조상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태리인들은 본인이 현재 어디에서 살고 있든 어디 태생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빼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이 어디든 간에 자신의 출신 지역의 역사와 문화, 유명한 위인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마태오 복음의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예수님 출생 족보입니다. 이 족보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훌륭하다고 추앙받는 인물들이 총망라됩니다. 그 중에서도 다윗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통치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나 강력한 힘을 지닌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했고 그것은 곧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인물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족보는 또 다른 중요한 인물, 아브라함을 부각시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원로이며 유대인의 전통이 그에게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은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 이후에 명시되어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훌륭한 인물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인간적인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그렇지 않은 인물들도 있습니다. 창녀 라합과 이방인으로써 외간 남자와 정을 통했던 룻, 행실이 바르지 않았던 우리야의 아내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들은 사실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인물들이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돌보심에 힘입어 인간의 부족함을 극복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묘사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결코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부족함과 한계 또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가엾이 여기신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로 그들은 은총을 받게 되고 이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다양하게 예고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제 1독서는 이스라엘의 원조인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말을 전해줍니다.
야곱은 자신의 여러 아들 중 특별히 유다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유다지파 중에 백성을 다스릴 왕이 날 것이라고 예언하는데 이에 대한 결과가 바로 오늘의 복음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족보는 다소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에게 메시아로써의 근거를 수여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앞두고 예수님의 족보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를 기반으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육화”하신 인간 그리스도와 우리의 역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다시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 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하느님은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져 계신 분, 인간과 격리되어있는 신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통해 인간과 함께 해 오신 하느님의 현존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은총은, 현세적인 구원과 자유가 아닌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입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는 분명히 신성을 갖고 있었지만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함께 체험하시고 공유하신 참다운 인간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아픔을 헤아리시는 하느님, 인간의 역사 안에 실재하시는 하느님, 당신이 약속하신 바대로 모든 일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약 1주일 앞으로 다가온 성탄을 준비하며, 우리는 인간의 구원과 위로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이에 깊이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근본은 이러한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됨에 자부심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현세의 조상과 출신 지역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천상 근본은 하느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의 시작점이며 참다운 조상이라면 이것이 어찌 참으로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입당송이 이 모든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하늘아, 즐거워 하여라. 땅아, 기뻐하여라. 우리 주님이 오시어, 가련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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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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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부터 주님 성탄 대축일까지 미사와 시간 전례에서는 가까이 오시는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표현이 많아집니다. 시간 전례에서는 “오, 지혜”, “오, 주님”과 같은 일곱 후렴을 통하여 날마다 다른 메시아 호칭으로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조상 야곱은 다른 열한 지파보다 특권을 얻은 유다 지파의 자손들을 축복합니다. 이 메시아 예언은 유다 지파에 속하는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러 역사적으로 절정을 누리지만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묵시 5,5), 메시아-임금,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그 정점에 다다릅니다.
왕조 계승을 선호하는 마태오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루카 복음서의 족보와 단 두 명의 이름만 일치하는 유다와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열거합니다.
마태오는 인위적으로 세대 수를 십사 대로 나누어 선택된 민족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정점에 이른다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당신께서 의도하신 목표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태오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의 아들, 예수님에 이르게 하는 족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선택된 민족에 그 뿌리를 두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유다인의 풍습에 따라 남자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족보에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외에도 다른 네 여인, 곧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가 나옵니다. 라합과 룻은 히브리 여인이 아닌 외국인입니다.
이로써 마태오는 구원의 보편성과 하느님의 개입, 곧 그분의 은총을 부각하여 죄조차도 허용하는 실제 인간 조건 안에서 인류 전체에 속하는 예수님의 연대를 강조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사람, 새 아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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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왕의 족보, 종의 족보>
‘우리 아버지는 땅이 얼마였고, 우리 할아버지는 양반이었고…’ 하는 것이 자랑처럼 내세워지는 것을 보면, 훌륭한 핏줄의 후손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는가 봅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한 마디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아버지가 다른 사람을 괴롭혀서 땅을 얻지는 않았는지, 그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행여나 친일행각을 하지는 않았는지….’ 자랑할 것은 부유함이나 신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았지만 정직하였고, 떵떵거리면서 목에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산 것이 훨씬 자랑스럽습니다.
몇 년 전 프랑스에서는 조상 대대로 망나니로 살아왔던 사람들의 후손이 떳떳하게 조상들의 족보를 세상에 알려 화제가 되었습니다.
차라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나치정권에 동조한 사람을 나무랄지언정 누구 하나 그 역사를 손가락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조상의 역사가 현재의 나를 온전히 대변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년에’를 내세우는 정치인들 중에, ‘운동권’ 아니었던 사람이 적지 않지만, ‘왕년에 그랬던 사람이 요즘은 왜 그 모양이냐’며 되려 면박을 당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다윗왕의 후손이라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종살이하던 때의 후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 ‘사람의 아들’로 오셨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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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축복>
성경을 읽을 때면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한 이스라엘인들의 수고가 마음에 집히는 탓에 글을 적었던 이들의 정성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곤 합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사가도 이를 기록하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족보를 꼼꼼하고 세밀하게 옮겨 적었습니다.
지금처럼 종이도 없고 인쇄술이 발달된 때도 아닌데 일일이 가죽에 기록된 필사본을 들추어 베껴야하는 수고가 수월하였을 리가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참 고마운 일입니다.
오늘 열 두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야곱의 유언이 유난합니다. 당시 이집트의 총리였던 아들 요셉에게 장자권이 주어진 일이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싶지만 넷째 아들 유다에게 쏟아진 축복은 형제 모두에게도 의아했을 것 같기만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람이었으며 두 아들을 잃은 후에는 며느리 다말에게 막내 동생을 주리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망신을 당했던 사람이었으니까요.(창세 38장 참조)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이 찬양할 것이라 하시고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위치를 선포하시며 유다의 후손에게 이어질 영영한 ‘왕홀’과 지휘봉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꼭 보고 싶은 우리의 삶은 아브라함의 순명하는 자세로 완전히 변화의 삶을 살았던 유다처럼, 그리고 이방인을 사랑했던 살몬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또 늙은 나오미를 위해서 룻을 아내로 선택하며 스스로 재산을 손해 보는 일에 괘념치 않았던 보아즈의 따뜻한 사랑이야말로 하느님께는 참으로 귀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 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언제나 순명하는 자와 회개하는 자와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쏟아진다는 선포입니다. 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왕직과 사제직과 예언직을 온통 선물하신 주님의 너그러움이며 사랑 많으심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그분의 족보를 이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왕으로써 사제로써 그리고 예언자로써 세상을 살되 사랑을 살아야 한다는 이르심인 줄 믿습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오늘 내 삶을 그분의 관점에서 다시 정리하는 우리가 된다면 성탄의 축복은 곱절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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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친구가 비를 맞고 걸어간다면 어떻게 해야 참된 우정을 주는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1) 내 우산을 비 맞는 친구에게 주고 나는 비를 맞으며 걷는다.
2) 빨리 우산을 사서 비 맞는 친구에게 건넨다.
3) 내 우산을 버리고 친구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간다.
아마 대부분 3번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질문을 보고서 저 역시 3번을 선택했다가, ‘내 우산을 함께 쓴다.’라는 답은 왜 없을까 싶었습니다. 만약 작은 우산이라 둘이 쓰기 힘들어도, 그래서 쫄딱 비에 젖어도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할 때만 참된 우정을 주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손해를 인정하지 못하는 요즘입니다.
내 것을 먼저 채우고 난 뒤에 남에게 베푸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답이 아닙니다. 참된 우정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래 함께 살았습니다. 동물들에 비해 약한 존재라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늘 무리를 지어 살았습니다. 혼자 낙오되면 각종 위험에 공격을 받아 죽음으로 이어졌던 공포가 유전자에 기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롭다’는 ‘죽는다’에서 파생한 언어라고 합니다. 실제로 외로움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는 같은 무게라고 합니다.
참된 우정은 함께입니다. 이것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단순히 하느님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즉, 신성만을 가지고서 사람들에게 전지전능하신 당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을 시작하면서 왜 예수님의 족보를 위치시켰을까요? 예수님께서 참인간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단 한 명도 제외 없는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와 함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그리고 당신이 먼저 참된 우정을 주는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마태오 복음은 첫 시작부터 족보를 통해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우정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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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던 배가 순식간에 낫는 비결>
어떤 관광객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을 구경하다가 목이 말라 폭포의 물을 떠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폭포 옆에 ‘포이즌(POISON)’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 팻말을 보자마자, 배가 슬슬 아파지기 시작했고 잠시 뒤에는 창자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급히 병원에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전해 들은 의사는 껄껄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포이즌은 영어로는 독이지만 프랑스어로는 낚시 금지라는 뜻입니다. 별 이상이 없을 테니 돌아가셔도 됩니다.”
의사의 이 말을 듣자마자, 그렇게 아팠던 배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창자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아픔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이 이야기를 통해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말 한 마디에 사람이 죽고 또 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도 중요합니다. 부정적으로 믿으면 부정적인 결과가, 긍정적으로 믿으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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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족보에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었나 봅니다. 그리고는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지금도 혈연, 지연, 학연에 목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타마르,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라합, 라합은 예리코를 정탐하러 갔을 때에 여호수아가 보낸 심부름꾼들을 그 여자가 살려 주었기에 그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그에게 딸린 모든 이를 살려주었습니다.(여호6,23-25)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이를 갈며 싫어했던 이방인을 보아즈는 아내로 삼았습니다. 조상이 번듯해야 행세하는 세상인데 예수님의 조상은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다윗은 우리야라는 병사의 아내를 취하여 잠자리를 가졌고,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하자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하여 우리야를 최전선으로 보내 죽게 한 다음, 그의 아내, 바쎄바를 취하였습니다. 그렇게 빼앗은 여인에게서 얻은 자식을 메시아의 조상으로 삼았으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첩의 자식을 드러냄으로써 구박과 멸시 속에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내 부모, 혹은 윗대의 조상에서 이상한 가족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이를 통해 모든 이에게 펼쳐집니다. 이방인을 통해서도, 흠 많고 죄 많은 이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사랑하시고자 오셨습니다.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러 인간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하느님의 섭리 안에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우리는 회개한 사랑받는 죄인이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4,18) 입니다. 그분은 구원역사를 완성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완성의 여정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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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닮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속한 우리들-
오늘 12월7일 부터 대림시기 둘째 부분이 시작됩니다. 우선 눈에 띠는 게 ‘오 후렴’에 예수님의 긴 족보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참 정밀하고 섬세한 전례 배치가 고맙습니다. 바로 교회는 디테일에 강한 하느님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지도자는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합니다. 악마는 디테일안에 숨어 있다 합니다.
'추秋의 시정치'라는 기사가 이색적이었습니다. 추미애 법무장관이 16일 사의 표명 보도가 나온 직후에 페이스북에 정호승 시인의 시 ‘산산조각’을 인용했고, 전날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이었던 이 육사의 ‘절정’을 인용하며 우회적으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합니다. 역시 디테일에 강한 지도자의 면모를 봅니다. 나이 60대 중반(1958년생)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치열한 정신과 순수한 감성과 열정을 지닐 수 있는지 호불호를 떠나 참 감탄스럽습니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시詩는 그대로 구원救援임을 깨닫습니다.
디테일에 강하기론 하느님을 당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긴 족보에서도 디테일에 강한 하느님의 면모가 참 잘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닮은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끊임없는 강론과 메시지를 통한 교황님의 관심사를 통해 그분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깨어 있는 분이며 디테일에 강한 분인지 깨닫습니다.
“교육은 희망의 행위다(Education is an act of hope)”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메시지 제목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바로 교육은, 공부는 희망의 표현임을 깨닫습니다. 희망이 왕성할수록 교육에, 공부에 항구하고 충실합니다. 무엇보다 희망의 원천이신 하느님 공부입니다. 평생공부인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공부에 지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평생 하느님 공부에 충실할 때 하느님을 닮아가면서 비로소 무지의 병도 치유되어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림시기 둘째 부분의 첫날 12월17일 오 후렴이 참 좋습니다. 저녁 성무일도시 흥겹게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 후렴입니다.
“오 지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말씀이여, 끝에서 끝까지 미치시며 권능과 자애로 다스리시는 이여, 오시어 우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바로 지혜롭고 겸손하신 주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우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으로 오실(성실, 진실, 신실, 절실, 충실)의 하느님이시며 기다림과 인내의 대가大家인 하느님이시며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당신 섭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 하나하나 모두가 족보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 존재 이유를 지닙니다. 아무도 쓸모없다 버리지 않으시고 모두 적재적소에 활용하십니다. 궁극의 목표 지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비로소 하나하나가 존재 이유를 지닙니다. 여기서 평범한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닫습니다.
‘하나로 이어져 연결되어 있으면 살고, 끊어져 단절되어 있으면 죽는다.’
공동체의 족보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살아 있으며 존재의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립단절 무관계의 상태가 바로 지옥입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여 족보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요. 다 제 몫의 자리와 역할에 충실한 모습들입니다.
이런저런 사람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 활짝 열려 있는 오색찬란한 참 다양한 인물들이 족보에 등장하며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하느님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결코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거룩한 족보가 아닙니다.
특기할 것은 다섯의 기구한 여인들입니다. 가나안 원주민 출신 1.다말과 2.라합, 모압 출신 3.룻, 우리야의 아내였다가 다위의 아내가 된 4.바쎄바, 그리고 마침내 불가사의의 극치로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5.마리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시야가, 전능과 자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깨닫습니다.
하느님께도 도약이나 비약이 없음을 봅니다. 하루하루 끝없이 기다리고 인내하며 모두를 당신 구원 섭리의 도구로 이용하며 예수 탄생하실 때까지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고 이런 하느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오늘 제1독서에 야곱은 죽음이 다가오자 유다에게서 훗날 왕권을 차지할 후손이 생길 것을 예고합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유다의 왕홀이, 지휘봉이 그의 후손 예수님을 통해 계속되리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이어 면면히 이어지는 교회 역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예언입니다. 참으로 당신 예언대로 이루어가는, 한결같이 충실하신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사람눈에 우연이지 하느님 눈엔 필연의 섭리입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님 탄생하기 까지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의 기다림이 참 놀랍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며, 우리 또한 세례성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족보에 편입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맏형님으로 모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속한 한가족 교회 공동체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속한 한가족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 이 시대에, 우리 교회 공동체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7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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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역사의 굴곡과 얼룩에도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모여들 오너라. 뒷날 너희가 겪을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일러 주리라."(창세 49,1)
야곱이 숨을 거두기 전에 아들을을 모아 놓고 유언을 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우두머리이고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가장의 유언은 예언자의 신탁과도 같은 무게를 지닙니다. 지금 야곱의 입에 미래를 담아 주신 분은 주님이시지요.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시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야곱이 유다에게서 민족을 다스릴 존재가 나오리라고 축복합니다. "왕홀"과 "지휘봉"은 권세와 영광, 다스림을 상징하는 도구들이지요. 그런데 유다는 맏이도 아니고, 이스라엘을 멸족의 위험에서 건진 요셉만큼의 업적을 지니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과부가 된 며느리 타마르와의 의도치 않은 추문까지 꼬리표로 달게 된 사람이지요.
복음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입니다.
"타마르는 유다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마태 1,3)
과부가 된 타마르는 시아버지인 유다에게서 아들을 얻어 가문을 이은 여인입니다.(창세 38장 참조)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마태 1,5)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운 대가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건진 예리코의 창녀지요.(여호 2장;6장 참조)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마태 1,5)
모압 여자 룻은 남편이 죽은 뒤 베들레헴 출신 시어머니를 따라와 가문의 구원자였던 보아즈의 아내가 됩니다.(룻기 참조)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태 1,6)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 세바는 다윗 임금이 우리야를 살해하고 차지한 여인으로 솔로몬의 어머니입니다.(2사무 11-12장 참조)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우리가 잘 아는 나자렛의 마리아도 정상적이 혼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여 구세주를 출산한 믿음과 순종의 여인이지요.
예수님이 탄생하신 가문의 족보는 여느 보통 사람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흠도 있고 티도 있는 사람살이의 면면과 과부, 이방인, 불륜 등 가련하고 불쌍하고 나약한 실존이 다 들어 있으니까요. 유다 가문을 통해 하느님의 뜻은 과정 안에서 저질러진 인간의 수치와 죄악을 딛고 완성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겉보기에 순결하고 완벽한 가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런 가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은 당신 백성과 같아지시기 위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과 관계성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우리 중의 한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그래서 연민과 자비로 이루어집니다. 세상 임금이 휘두르는 권력과 압제의 지휘봉이 아니라 "가련한 백성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에게 도움을 베푸는"(화답송) 손길이지요. 이처럼 탄생에서부터 인간의 가난과 약함을 짊어지신 예수님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화답송) 받습니다.
사란하는 벗님! 하느님은 모든 역사를 한눈에 보실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비구비마다 희로애락의 롤러코스터를 타지요.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우리 시야가 그정도밖에 안 되니 그렇습니다.
우리 역사 안에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보지 못하는 시야의 한계성은 믿음과 순종으로 극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 족보에 등장한 마리아와 다른 용감한 여인들이 보여준 덕행이지요. 우리 각자의 족보와 인생 여정에는 어떤 하느님의 메세지가 담겨 있을지 숙고하고 통찰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약하고 부족해도 하느님은 결코 구원의 뜻을 포기하지 않으시니, 용기를 가지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 시기의 둘째 부분을 성모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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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어떤 부모가 낳아 키운 자식을 죽일 수 있겠는가?
예수 성심은 우리 이해를 넘어 가슴에 쓰라린 통증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차마 아담과 하와를 죽일 수는 없었다. 어떤 부모가 낳아 키운 자식을 죽일 수 있겠는가?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느님께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낫지, 우선 자식들을 살려놓고 봐야지 고생하면서 철들겠지!
♣여자에게 “난 네가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아담에게는 “네가 아내의 말(하느님 말씀보다 아내의 말을 들어야 살아남는다.)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창세 3,17-19)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오히려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창세 3,21) *그리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으로 사람이 되시어, 당신이 거짓말했던 것을 당신이 대신 죄악의 대속물(대신 속죄물)로 십자가 희생 제물이 되신다. 당신 자녀들이 받은 죄악의 대가를 친히 몸소 받아 내셨다.
―유안진(클라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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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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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이 임박해 옵니다. 대림 두 번째 시기가 시작됩니다. 시간이 다가오면 성탄은 저절로 오겠지만, 준비하고 기다리지 않는 이에게는 그 기쁨이 크지 않을 것입니다. 때가 차면 그분은 분명 오시겠지만, 그분이 오신다고 해서 모두가 그분을 영접하는 기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준비해두고,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채비를 차려야 할 때입니다. 마음의 간절함으로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하고, 마음을 모아 노래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본기도>에서 그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는 미사 중, <예물준비기도>를 바칠 때 사제가 성작에 포도주와 물을 부으며 혼자 드리는 기도문과 같습니다.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인성을 받아들이신 그 외아드님의 강생을 예고하고, <복음>에서는 예고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분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보여주듯이 시간보다 앞서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지만, 동시에 육에 따라 본다면, 이 족보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 인성의 계보를 밝혀줍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나셨음을 밝혀줌과 동시에 <본기도>에서 밝히듯이, 그분을 통하여 우리도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하여,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봅니다. 곧 그들 모두가 자비의 사슬로 엮어졌음을 봅니다.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하느님의 감실을 봅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담겨 있는 성합들임을 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당신 자비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 족보를 들을 때면, 성모님의 찬가가 떠오릅니다.
“주님께서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0)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약속하신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4-55)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대대로 이어지고 영원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역사 안에 살아계시고 또한 제 안에 자비로 살아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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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제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저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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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1,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에 관한 말씀인 마태오 복음 1장 1절에서 1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꾸며지고 만들어진 '신화적인 존재'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는 '역사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족보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림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이 기다림 안에는 '두 개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다림이고, 또 하나는 12월 17일부터 12월 24일까지,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교회는 오늘(12.17)부터 본격적으로 주님의 성탄을 기다립니다. 모든 전례가 오시는 주님의 성탄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첫 날인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예수님의 족보'가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족보는 한 가문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족보는 뿌리입니다. 우리는 뿌리가 있는 존재입니다. 족보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도 뿌리가 있는데, 그 뿌리가 바로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영적뿌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으로 오십니다.
하느님과 오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리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그만 싸우고, 제발 그만 분열시키고, 제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좀 자제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도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마저도 이 땅에 오셔서 2주간 격리되시면 안 되잖아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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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gnqesEzUb4&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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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 1)
오늘의 역사가
있기까지 어제의
역사가 있었고
우리들
각자의 기막힌
사연들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역사이다.
지워지지 않을
하느님의
신비가 있었다.
모든 것을
다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신비이다.
구원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이다.
믿음의
역사 안에
하느님의
탄생이 있다.
숨결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이다.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참으로 소중한
사람으로
탄생하신다.
자신을 낮추는
탄생이 있다.
사람의 역사는
만남의
역사였다.
탄생이 있기까지
수 많은 아픔과
좌절 그리고
고통이 있었다.
소외된
사람들 속에서
새 역사를
쓰시며
소외된 사람이
소외된 사람을
끌어안게 하신다.
사랑의 역사
구원의 역사
그 근원을
체험하는
은총의 대림이다.
우리에게
삶이란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이다.
이 은총이
인류를 위한
구원의 강생이
되었다.
하느님의 탄생은
깊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끝내
우리에게
오신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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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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