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변영희 | 날짜 : 10-03-16 23:10 조회 : 1605 |
| | | 서울 Y WCA 에서 문학서클 활동을 할 때였다. 회장이었던 K씨는 총무인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니 제안이라기 보다는 지시였다. 법정스님에게 편지를 내보라는.
회장인 그녀가 서울 YWCA 산하의 전 동아리를 대표하여 법정스님을 초청하는 임무를 자청하여 떠맡은 것인지는 모르나 나는 회장의 느닷없는 명령에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한 번 두 번 나는 정성을 기우려 편지를 써서 발송했다.
법정스님께서는 그 때 조선일보에 칼럼을 기고하고 계셨는데 그 글에 담뿍 매혹되었던 나는 다소 과장표현을 썼고 간절하다 못해 차라리 사랑의 고백서 같은 우수광스런 내용을 거침없이 날려보냈다. 매혹 정도가 아니라 나는 신문에 난 스님 글에 입을 맞출 정도로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모른다.그건 나뿐이 아니었다. 회장은 법정스님의 오두막 툇마루에 말없이 앉아있다 오겠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옷고름을 자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곤 했으니 회장의 스님 사랑?은 나와는 전혀 비교도 되지 않는 독특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편지를 보내놓고 나는 부지런히 법정스님의 책을 사날랐고 빨래며 청소 따위 저만치 내동이친 후 밤늦도록 독서열풍에 휘말렸다. 이웃에 사는 후배에게도 학부형 친구들에게도 "읽어봐라 읽어 좀! "하고 <무소유> 와 <산방한담>을 들이대고 채근하고 독려했다. 스님의 글이 맑은 향기처럼 오래오래 나의 둘레에 머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른아침 내면 깊숙한 곳에서 기쁨이 넘치는 걸 감지했다. 싸리비를 들고 뜨락을 쓰는 동안 내 입에서는 노래들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와 같은 찬송가를 비롯해서 ' 먼산에 진달래' '앤리로리' 등 내 목소리에 내 스스로 반해서 끝없이 불렀다.
흔히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 는 말이 있긴 하지만 우리동네는 까치가 울만큼 우람한 느티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도 아니요, 함부로 버린 씨 한톨이 저혼자 자라고 있는 볼품없는 대추나무 정도와 장미덩쿨이나 사르비아 뿐으로 까치가 깃들어 깍!깍! 하고 짖어댈 공간도 기실 마땅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길한 예감은 적중하였고, 점심나절 나는 볍정스님으로부터 한장의 엽서를 받을 수 있었다. 삶의 참다운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게 어지럽고 혼돈한 이 시대에 스님과 같은 분을 꼭 한 번 모시고 싶다는 간곡한 내 편지에 대한 법정스님의 답신인 셈이었다. 스님을 만나뵈오므로해서 큰 위안을 얻고 싶고 그런 백성들이 서울 YWCA 말고도 얼마든지 넘쳐나고 있음을 누누히 강조한 내 편지글이 제대로 전달기능을 다하였던 것일까.
나는 무한히 기뻐 빗자루를 휙 대문밖으로 던지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우편엽서 전면에 가득 쓰여있는 정갈한 글자들을 나는 음미하듯 읽고 또 읽었다. 밤에 잠 잘때는 요 밑에 넣어두고 잠깐씩 꺼내보곤 하였다.
엽서 한 장이었다. 그러나 그 엽서 한 장은 수백 매의 어떤 사연보다 귀중했다.나는 그 엽서를 회장에게 가지고 갔고 여러 회원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젊은 주부들 앞에 함부로 서실 수 없는 이유가 그 엽서에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있었다. 우리는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고 회장도 그 누구도 부끄러워 하거나 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아무 기별하지 않고 불일암으로 가자고 약속했다. 철없는 문학주부들의 계획이 실현되기 전에 법정스님은 딴 곳으로 수행처를 옮기셨고 그일은 무산되었다. 그렇게 그 해 가을이 지나갔다.
강원도 산 속의 작은 오두막집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입증하는 실체가 되어 있다.하지만 법정스님이야 말로 비록 고요한 산속에서 무소유를 부르짖었다해도 스님의 경우에는 무소유 아닌 대소유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글로써 책으로써 법정스님만이 행사할 수 있는 언어와 문학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이야말로 우주보다 더 웅대한 대소유가 아니고 무엇이랴.
낡고 바랜 책갈피 어디쯤 감춰져 있을 엽서 한 장 들춰내 법정스님을 추모하는 나만의 시간을 마련해 볼 것인가. 이 밤 스님의 무소유를 생각한다. |
| 임재문 | 10-03-17 16:20 | | 법정 스님의 입적을 저도 애도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지만, 무소유의 사랑실천은 눈물겹도록 우리에게 감동적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소유의 삶을 누리고 산다는것, 무소유의 참 뜻인 꼭 필요하지 않는 것은 가지지 않는 그런 삶이 어디 또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 |
| | 변영희 | 10-03-17 21:17 | | 건강하시지요? 은퇴후 평안을 누리시는 임재문선생님 고맙습니다. 비나 눈이 올라고 구름 낀 날은 까무러치게 몸이 아파 탱크부대가 쳐내려온대도 움직일 정황이 아닌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결에 메시지 오는 소리듣고 문학의 집으로. 잊지 않고 불러주는 문우의 마음이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눈맞으며 집에 오니 왕송호수 물새가 날아왔나 싶어 또한 반가워라. | |
| | 최복희 | 10-03-17 22:24 | | 법정 스님의 입적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지요. 저도 그분이 쓰신 책을 거의 갖고 있습니다. 저 또한 기독교를 믿지만 종교를 떠나서 존경하는 분입니다. 변선생님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계시군요. 오죽이나 감칠맛 나게 글을 잘 써서 보내셨기에 답장을 받으셨겠지요. 변선생님의 봄나들이 글도 잘 읽었습니다.
필을 드시면 뚝딱 하고 요술쟁이처럼 창작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신작을 한꺼번에 두 편이나 올리셨으니.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 |
| | 변영희 | 10-03-19 07:53 | | 뚝딱! 하는 소리가 명쾌하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최복희 선생님의 맑은 모습처럼 다정하게 느껴지는군요 요즘 걱정이, 새로운 일을 저질러가지고, 순전히 타의? 아니 내 의사도 15%정도는 포함되었겠지만. 25일 뵈면 좀 도와주시옵소서. 시로도?를 면할 때까지는.... 글 읽어주셔서 무지 감사를 드립니다. | |
| | 이진화 | 10-03-18 00:56 | | 변영희 선생님, 법정 스님과 그렇게 특별한 인연이 있으시군요. 친필 엽서를 받으셨으니 정말 좋으셨겠습니다. 거절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좋으셨다니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 향기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 |
| | 변영희 | 10-03-19 07:45 | | 이진화 선생님 고맙습니다. 엊그제 밤 눈비맞고 돌아와 앓느라고 답글 늦었습니다 . 거절하는 글임에도 그리 좋아하고 신문에 난 스님 글에 흠씬 취하고 그때는 감정이 엄청 풍부했던 모양입니다. 성북동 <길상사> 에 가서 스님 법문도 듣고 좀 따라다녔네요.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 |
| | 하재준 | 10-03-23 20:13 | | "인생은 짧고 예술을 길다"라는 말을 되새겨 보면서 변선생님의 수필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분은 가셨어도 '무소유'의 정신은 우리가 영원히 간직하고 싶기에 법정스님의 높은 교훈을 흠모합니다. 그분의 사연이 얽힌 엽서의 인연이 있었다하니 퍽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 |
| | 변영희 | 10-03-24 20:29 | |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글은 안올리시고 댓글만 달아주셨네요. 법정스님 글을 저가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불임암으로, 오두막으로 가자! 가자! 하고 그때 우리는 들떠있기도 했었지요.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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