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연의 일환 입니다,. 산소의 공급이 5분 정도 끊어지면 질식하고 그 이후 심정지상태로 생명은 단절됩니다. 물과 불이 없으면 이 또한 사람의 삶은 영위하기가 힘이 듭니다. 효란 산소와 같은 것이고 물과 불처럼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 본연의 하드웨어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 가장 윗질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부릅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조건이 붙지 않는 신(神)적 영역의 사랑입니다, 조건이 붙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시원을 찾는 일도 애매모호하고 그 늪 같은 함정 때문에. 수사적 워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비주얼이 없는 무형의 판타지 이기도 합니다.. 부모의 자식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종교적 영역에서 하느님이 베푸는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관념적 영역에서 믿음을 강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는 가설에서 보면 부모의 자식사랑은 동물적 본능과 영적 교류의 차원에서 보이는 생명윤리의 근본이며 태생의 철학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물질문명의 향유로 인간은 타락의 진로를 걷게 되면서 추락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만. 자식 사랑은 가족사랑의 대종으로 불멸할 것입니다.. 부양의 책임과 의무를 인식하고 먹이고 입히고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 이 아니라 일종의 본능 같은 조건 없는 사랑 때문에 반복되는 인류의 생존본능 같은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이루어지는 피드백입니다.. 이에 대한 피부양자들의 은혜갚음을 우리는 효라는 단어로 개념화하였고 효행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하여 실천철학으로 삼은 것입니다. 철학의 오류가 객관성을 상실하는 것이요 상실의 결과물이 보편적 가치의 실종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최근 전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3 하년 어린이에게 수업시간에 하교를 하는 학생을 만류하다가 뺨을 맞고 물어 뜯기며 어깨에 맨 책가방으로 무차별 구타당 하는 교감선생님의 모습이 세간의 화재가 되어 분노를 자아 내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결과에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만 필자의 경우에는 그 원인 행위에 대하여 고민을 합니다. 붕괴되어 가는 효행의 단편입니다. 부모의 책임과 의무는 과보호라는 이름으로 이 땅의 공서양속(公序良俗)을 해치는 패륜범죄를 양산하고 자식의 손에 부모의 목숨 까지도 저당 잡혀야 하는 어이없는 뉴스거리를 양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의 일선에 선 교사들의 교권 보호 보다 과보호에 길들여진 학생들의 인권 보호를 운운하는 교계의 인사들에게 묻습니다. 양육권을 인정하시는지? 자식들의 불효가 자식들의 권리라고 강변하는 이유로 이해가 가능한지? 개사랑 만도 못한 부모사랑의 현주소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 옵니다. 사람이면 사람다워야 하며 사람다운 일은 효를 근간으로 하는 효심을 DNA로 담고 효행은 습관으로 익혀가며 은혜를 받은 것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되 갚아야 하는 효행을 일상으로 길들여져야 합니다.. 교육의 교(敎)라는 한자적 의미는 효(孝)를 회초리로 때려 가르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효도 없고 회초리도 없다면 교육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회초리와 교사의 회초리가 존재하지 않는 한 초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매 맞는 교감선생임은 계속 속출할 것이고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는 패륜 범죄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귀한 자식일수록 회초리가 교육입니다
첫댓글 부모 얼굴이 보고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