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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사진 잡지 Fototapeta와 낸 골딘이 인터뷰한 기사, 출처는 http://fototapeta.art.pl/index.html
네. 사진은 제 삶을 살렸어요. 무섭고 힘든 일을 겪게 될 때마다 사진을 찍음으로써 견뎌왔죠.
-당신은 다른 사람들도 살아가게끔 돕고 있죠. 그들이 사진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사진은 제가 잃어버린 삶에 대한 기록을 보존하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 그들은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지워지지 않을 수 있어요. 살면서 가깝게 지냈던 모든 사람들을 사진으로 남겨둔다는 것은 저에게 아주 중요해요. 사람들은 떠나가죠. 저에게 무척 소중했던 친구인 쿠키도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사진들은 남아있어요. 이러한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과,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죠. 뉴욕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자유로웠던 영혼들도 죽었어요. 그래서 뉴욕은 더 이상 뉴욕이 아니죠. 저는 뉴욕을 잃었고 그리워하고 있어요. 다들 에이즈 때문에 죽어갔지요.
-뉴욕의 게이 아티스트들과 작가들에게 빠르게 퍼지는 에이즈의 영향 때문에 미국을 떠나기로 한 건가요?
1991년에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갔어요. 베를린에 종종 갔는데, 약간은 그런 이유에서이기도 하고 친한 친구인 알프 볼드Alf Bold를 간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어요. 그는 죽어가고 있었기에 곁에서 그를 돌보았죠. 그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제 말은, 유명한 친구들이 많았지만 매일 그를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에요. 그는 베를린 영화제를 만든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이즈음 파리에서 내 사진을 거래해주던 질도 에이즈로 죽었습니다. 질은 파리에서 가장 급진적인 갤러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는 유럽에서 누구에게도 에이즈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에이즈에 대한 태도가 미국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에요. ACT UP과 같은 에이즈 확산 방지 단체가 파리에는 없었거든요. 1993년의 그 곳은 1950년대의 미국 같았죠. 물론 지금은 바뀌었지만, 그 당시에 유럽 사람들은 저에게 말했어요. ‘음, 우리는 ACT UP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요. 아주 좋은 병원들이 있으니까요.’
-당신의 예술은 근본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죠.
아주 정치적이죠. 먼저 제 작업은 젠더 정치gender politics에 관한 것이죠. 남자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여자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성 역할이란 무엇인가 등에 관한 것이죠. 특히 ‘성적 종속에 관한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는 굉장히 그런 편이에요. 젠더 정치에 관해 대학에서 배우기도 전부터요. 친구들은 제가 페미니스트의 가슴을 갖고 태어났다고 말해요. 전 다섯 살부터 남자 형제들이 할 수 있지만 제가 못하는 것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자랐죠. 미리부터 그것에 관해 뭔가 만들 거라고 결정한 건 아니었어요. 저는 제 인생과 과거의 삶에 대한 사진들을 만들었을 뿐이고, 나중에 그것이 얼마나 정치적인지 깨달았죠. 다른 커플과, 행복한 커플들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구성했어요. 저에게 이 사진들의 주된 의미는 어떻게 성적으로 누군가에게 중독되는지, 그리고 그 중독은 사랑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죠.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 아래서 벌어지는 폭력에 관한 것이고요. 여성의 여러 가지 역할들, 아이들의 역할, 그들이 길러지는 방법, 그리고 그 안의 남성을 보는 사람이 목격하게끔 만들었고 거기서 수많은 폭력들을 보여주죠. 남성이 무심결에 저지르는 폭력들 말이에요. 클럽에도, 바에도 그 폭력은 있고 여성들의 선택 사항인 매춘과 결혼에도 있죠. 그러다 일상적 장면도 나오고, 다시 결혼했거나 재혼한 커플들과, 섹스하는 커플들이 나오고, 두 개의 무덤에서 (사진들은) 끝나요.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은 친구들이에요. 브루스Bruce는 1970년대에 저에게 처음으로 쭉 이어서 찍기slideshows를 소개해준 사람이죠. 저는 학교를 떠나고 그것을 시작했어요. 학교에 있는 동안 프로방스타운에서 살기 위해 갔죠. 보스턴에서 3시간 떨어진 게이 리조트였어요. 미국의 이스트 코스트에서 가장 먼 곳이죠. 많은 작가와 화가들이 거기 살았어요. 1970년대에 그곳에서 워터스, 쿠키, 섀런, 섀런의 아들과 함께 지냈는데 정말 거친 곳이었어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었죠. 나중에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요. 거기서 우리는 작은 규모로 살았어요. 친구들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눈 속의 브루스”도 그때 찍은 거죠. 1972년부터 브루스를 알고 지냈어요. 당시 MFA(the Museum of Fine Arts)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 선생들이 주차장에 앉아서 술이나 마시고 그랬죠. 진짜로요. 1980년대 이전의 일이었으니까요. 우리는 예술을 해서는 절대 돈을 벌 수 없다고 들었어요. 요즘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예를 들어 예일대 학생들 같은 경우에 그들은 어떤 갤러리에서 전시를 할 수 있을지 혹은 제가 그들이 전시를 할 수 있게끔 도와줄 수 있는 지에만 관심이 있어요. 경력의 일환일 뿐인 거죠. 제가 예술학교에 다닐 땐, 아트포럼이라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절대로요. 전 러시아 문학이나 제가 좋아하는 폴크너 수업을 들었어요. 작문이나 영화사를 들었고, 더 잘 보기 위해서 드로잉 수업도 들었어요. 많은 사진작가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니까요.
로스코Rothko에게도 점점 영향을 많이 받았었어요. 리차드 토드Richard Todd도 좋아했지만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죠. 뭐든지 제가 보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들은 저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완전히 누군가를 따라 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어요. 예를 들어 로스코처럼 되려고 해본 적은 한번도 없죠. 카라바조Caravaggio도 좋아하지만 그에 대해 배워본 적은 없어요. 카라바조 같은 것도 만들어본 적이 없구요. 섹스하고 있는 소년들을 찍은 몇몇 사진들이 카라바조 같은 느낌을 갖고 있긴 해요. 그 또한 그가 그린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었어요. 그들은 그의 연인이었거나 정부였죠. 파솔리니Pasolini도 그가 탐내고 사랑했던 거리의 소년들을 모델로 했죠. 파스빈더Fassbinder는 그가 아는 사람들만 썼고요. 카사베츠Cassavetes는 같은 사람들을 여러 번 담았는데, 그러니까 제가 그런 식으로 작업한 최초의 사람은 아니죠. 그렇지만 사람들이 1980년대에 제 작업들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잊어버린 것 같아요.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 누구도 그렇게 작업을 하지는 않았는데도요. 지금은 볼프강 틸먼Wolfgang Tillmans이나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 코린 데이Corrine DayE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이제 사람들은 저를 그냥 그 중 하나로 볼 뿐이에요. 그래서 ‘성적 종속의 발라드’가 당시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별로 이해하지 못하죠.
영화도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고등학교를 안 다녔으니까요. 영화를 보러 다녔죠. 때로 하루에 두 번에서 세 번 영화를 봤는데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나온 영화들을 거의 다 봤어요. 모든 여신들이 나왔던 영화들을 본 셈이죠. 말레나 디트리히Marlena Dietrich가 나온 모든 영화들이요.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es, 바바라 스탠윅Barbara Stanwyck,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도요. 엄청난 양의 이탈리아 영화도 봤는데, 안토니오니Antonioni, 파솔리니Pasolini, 드 시카이de Sicae의 것을 봤고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건 카사베츠 영화였어요. 다른 많은 현대 사진 작가들과 다르게 저는 영화의 장면을 토대로 사진을 찍진 않았어요. 또 파스빈더와 키엘로프스키Kielowski도 기억에 남아요. 그의 ‘십계’를 봤죠. 그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나요? 아, 네, 그는 저에게 아주 특별했어요. 파스빈더도 그랬죠. 그의 모든 영화를 봤으니까요.
-영화도 만드나요?
네,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었어요. ‘당신의 거울이 되겠어I’ll be your mirror’는 BBC와 함께 만들었죠. 제 인생에 관한 영화에요. 다른 하나는 조아나Joana와 오를르Aurele와 같이 작업했구요. ‘영안실에서의 송가Ballad at the Morgue’라는 제목의 에이즈에 관한 영화에요. 그는 에이즈에 걸렸고 그녀는 걸리지 않았었어요. 한 쪽은 에이즈 양성이고 다른 쪽은 음성인 두 연인의 관계에 관한 영화죠. 토리노Turin(Torino)에서만 상영되었어요.
-음악은 어떤가요?
음악도 물론 중요하죠. 닉 케이브Nick Cave에게서 많이 영향을 받았어요. 말 그대로 그는 내 삶을 살렸죠.
우연히 카메라에 컬러 필름을 넣었어요. 그게 흑백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컬러였어요.
-컬러 사진을 찍는 이글스톤Egglestone이나 다른 사진작가들에 비해 당신은 좀 늦게 알려졌네요.
내 사진을 일찍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아주 언더그라운드였죠. 그때 예술학교가 제게 가르쳐준 것이 아주 유용했어요: 예술가로서 고통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물질적인 필요나 재정적인 성공이 필요하지 않고, 다만 이끌려가야 한다고요. 그 시절에 그 학교에서 여러 위대한 예술가들이 나왔죠. 그 중에서 데이비드 암스트롱David Armstrong이나 필립 로르카 디코르샤Phillip Lorca diCorcia는 제 친구들이죠. 드랙 퀸drag queen 사진을 처음 찍기 시작했을 때 글래머 매거진이나 패션 매거진으로부터 영감을 받곤 했어요. 호스트Horst, 세실 비튼Cecil Beaton, 뉴튼Newton의 초기 작업들과 기 부르댕Guy Bourdin을 좋아했죠. 예술 사진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1974년에 학교에 다녔고 거기에 저에게 래리 클락Larry Clark을 보여준 선생님이 계셨죠. 그것은 완전히 제 작업들을 바꿔놓았어요. 온전히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의 사진집 털사Tula를 보셨나요? 그 책은 한 사람의 사적 경험을 이용해서 예술이 된 대표적인 사례죠.
-그럼 당신은 글래머 사진에서 아주 사적인 사진으로 작업을 바꾼 거군요?
아뇨, 단지 바꾼 게 아니에요. 사진의 역사에 대해 배우는 데 아주 오래 걸렸어요. 그 선생님은 제게 어거스트 샌더August Sander, 위지Weegee,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를 알려줬어요. 드랙퀸들은 아버스의 작업을 엄청 싫어했죠. 그녀가 그들을 찍는 방식을 싫어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그들의 정체성을 벗겨버리려고 했거든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존중하질 않았어요. 아버스는 천재지만, 그녀의 작업은 단지 그녀 자신에 관한 것일 뿐이죠. 모든 사진들이 그래요.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고려하질 않죠. 그건 단지 그녀의 다른 정체성을 찾기 위한 거의 정신적인 필요psychotic need였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껍데기에 시도해본 거죠. 전 이제까지 아버스에 대해 많은 글을 써왔어요.
-어떤 비평가들은 당신과 아버스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비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죠?
아버스의 딸은 우리 사이에 절대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전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 둘 다 높은 정도의 공감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었죠. 그녀는 사진학적 천재이고 전 그렇지 않아요. 제가 조금이라도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쭉 보여주는 것slideshows과 서사narratives에 있다고 생각해요. 완벽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있진 않죠. 있다면 작업들을 한데 모으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있는 것이죠.
-그건 문학에 매료되는 것과 관계가 있진 않나요? 폴크너에 대해 언급했잖아요.
폴크너는 아주 작은 커뮤니티에 대해 썼고 25편의 멋진 소설과 단편들을 썼어요. 항상 그가 사랑하는 장소가 배경이었죠. 그가 붙인 새로운 이름을 썼지만 실제로 있는 곳들이고요. 전부 그가 아는 것들에 기초를 두고 있어요. 전 항상 전통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항해서 싸워왔어요. 좀 바뀌었지만, 1970년대에는 항상 강한 백인 남성이 인도로 가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국적인 사진들만 찍어왔거든요. 언제나 저 자신만의 사람들에 대해 찍을 권리가 제게 있다고 믿었죠. 여행할 때라든지, 가까워지거나 뭔가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사람들을 말이에요.
-당신이 찍는 사진들과 당신의 일기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전혀 없어요. 제 일기는 지루해요.
-문자와 이미지로 된 일기를 함께 둘 생각은 안 해봤나요? 피터 비어드Peter Beard처럼 말이에요.
아뇨. 전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일기의 일부를 출판해본 적이 있나요?
아뇨, 절대 하지 않을 거에요. 전 저 자신을 위해서만 쓰고 있어요. 죽고 나면 즉시 태워버리는 것이 소원이죠.
-당신 사진 중 일부는 흐릿해요. 일부러 그런 건가요?
사실, 전 흐릿한 사진을 찍어요. 빛이 어떻든 간에 사진을 찍으니까요. 만약 사진이 찍고 싶으면 빛이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죠. 때로 아주 느린 셔터 스피드로 찍으면 흐릿하게 나오지만 그건 데이비드 암스트롱 같은 의도를 갖고 일부러 한 건 아니에요. 그와 제가 퍼지-워지Fuzzy-wuzzy 풍경이라고 부르기로 한 사진들처럼 말이죠. 그는 제 사진의 배경들을 보고 배워요. 데이비드는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 사진을 찍는 걸 시작했거든요. 초점을 흐리게 한 풍경들이죠. 그는 의도적으로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찍었지만 전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요. 태양이나 빛이 있건 없건 찍기 때문에 초점이 안 맞는 거죠. 발레리Valerie와 브루노Bruno 사진이나 뭐든 제가 흐릿하게 찍는 건 빛이 없어서일 뿐이고, 그럴 땐 셔터 스피드를 느리게 해서 찍어요. 예전엔 대체로 취해서 그럴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마약은 저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쳤죠.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요. 비트카치Witkacy라는 폴란드 예술가에 대해 들었는데, 그가 했던 모든 마약들을 자기 자화상에 적었대요. 그가 얼마나 많이 약을 했건, 이건 자기 자신에게 마약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보여주는 거죠. 내셔널 뮤지엄에서 그의 자화상을 보았는데 독일 표현주의 같았어요. 마음에 들더군요.
-아퍼처Aperture 매거진의 50주년 기념호에 실린 당신 사진들을 봤습니다. 절 놀라게 했던 건 그 사진들과 함께 실린 새 라이카 광고였어요. 당신 손이 잡고 있는 M7는 아주 예술적인 흑백이었는데, 전 당신의 사진이 라이카와 어울릴 만큼 클래식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놀랐어요.
전 항상 라이카를 써요. 전에는 M6였고 요즘엔 M7을 쓰죠. 이번 광고를 찍으면서 하나 받았거든요. 그렇지만 바로 잃어버렸어요. “떠다니는 발레리floating Valerie” 시리즈를 찍으면서요. 한 손에 카메라를 쥐고 그녀의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참 어려웠어요. 카메라는 고장 나버렸지만 사진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죠.
-가장 유명한 박물관들에서 당신의 파격적인 사진들이 전시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 번은 파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방문하는 퐁피두 센터the Centre Pompidou와 파리의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인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Musee de la Ville de Paris사이에서 골라야 했었죠.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에서 일하는 여자가 좋았지만 동시에 퐁피두에서 일하는 남자도 마음에 들었었어요. 제가 유명해지기 전에 절 도와준 사람들에게 특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거든요. 몇몇 사람들은 아름다운 박물관(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전 퐁피두를 택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보기를 바랐거든요. 아름다운 박물관에는 오직 예술가들과 엘리트만이 가니까요.
-다음엔 어떤 것을 하실 예정인가요? 뉴욕에서 악마의 놀이터the Devil’s Playgound와 매튜 마크Matthew Marks를 전시한 이후에요.
모르겠어요. 전혀요. 아마 약간 다른 것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좀 힘든 시기를 거쳐왔으니까요. 예술시장이 이것에 어떻게 반응할지 보게 되겠지만 어떻든 전 관심 없어요. 저의 딜러들은 계속 탐욕적으로 변해가요. 그들은 “이 사진, 저 사진을 전시합시다. 잘 팔릴 테니까”하는 식으로 이상하게 말하곤 해요. 그들이 아예 이상적으로 보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 되네요. 적어도 미국 딜러들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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