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와 관상,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군대 생활 중에 동기로 만난 사람이 부산 출신인 정복상鄭卜祥이라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여덟 살이 위였던 그의 사회 주특기가 ‘사주 관상’이었다.
눈이 부리부리하면서도, 차분한 그 사람 덕분에 한탄강에서 석수쟁이가 되어 견치석을 깨러
파견을 나갔을 때 장훙리 일대 민가에서 사제 밥을 많이 얻어먹었다.
그는 연말 연초만 되면 군단장에서 사단장을 비롯, 온갖 군 수뇌들의 사주 관상을
봐주어야 했으므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런데 그가 내 사주풀이를 해준 적이 있었다.
“사주는 귀격貴格이다. 그러나 초년 운이 불리하여 뜻을 발휘하기 어렵고, 어려운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공상적이며, 망상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아무런 보람 없는 일에 몸만 수고를 많이 할 것이다, .....”
나중에 들여다보니 대체로 잘 맞춘 것 같다. 그가 나에게 들려준 말이 있다.
“범죄자들과 판검사들의 사주가 비슷하다.” 그 말을 요즘에야 실감한다.
사회에선 선망하는 직업이지만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여러 형태의 범죄자들이니, 꿈속에서도, 좋은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요즘 사람들의 대화 중에 ‘관상과 사주’ 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몇 년 전에 <관상>이라는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쳤기 때문이고, 대통령 내외와 계엄 정국에 주모자 중의 한 사람이 사주와 관상에 정통(?)했대서 그렇다.
<관상>이는 영화를 안 본 나로서는 별로 한 말이 없지만 사주와 관상이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데, 관상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상형문자와 같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성질은 그 외양에 나타나는 모습과 똑같다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상형문자를 판독하는 일, 외양을 보고서 그 성질을 알아내는 일은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조예가 깊은 관상사도 착오를 일으키는 예가 없지 않다.
첫째, 순전한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을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무슨 선입관이나 편견이 섞이면, 그 상형문자는 모양이 흔들려서 정확한 판독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상대가 표정을 움직여서 어떤 측면만을 나타내 보일 적에는 그 연기 쪽으로 눈이 끌리기 쉽다. 사람고하 사람이 서로 대하면, 거기에는 의례 우정을 바라는 마음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자기의 가장 좋은 부분을 특별히 강조해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인상이 매우 불안정하더니 그 후 자주 만나면서 보니까 차차 나아졌다는 예가 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희망이나 기대가 작용을 하는 수도 있고, 또 한 편으로는 상대의 기교가 계속 효과를 나타낸 결과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 사람의 ‘교양’과 ‘성격’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관점이다. 교양과 성격이 잘 일치된 경우는 다행이지만, 어떤 때는 그가 ‘교양’이라는 인류의 공유재산에서 임시로 빌려온 것을 보고 그게 그대로 그 사람의 천성인 줄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교양은 언젠가 칠이 벗겨지는 것처럼 바닥이 드러난다. 대체로 말해서 도덕적 성격보다 지적 재능이 먼저 눈에 뜬다. 재능은 표면으로 떠올라서 잘 움직이고 성격은 이따금 밑바닥으로 숨어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의 얼굴은, 혼자 있을 때라야 그 천진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으니, 관상술의 비결은 그 순간을 포착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의 글이다.
그 어떤 것도 정확한 것은 없다.
가끔은 심심풀이로 사주도 보고 관상도 보지만, 그 역시 하나의 심리 상담으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나와 함께 <지리산 빨치산과 토벌대 씻김굿> <견훤대왕 제> <<정여립 추모 해원 굿> <동학농만군 씻김굿>을 함께 했고 <무당>이라는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서 KBS 미니시리즈 <무당>의 주인공으로 활동했던 천재무당 정강우 선생도 자기 운명은 알지 못한 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결국 그 사주나 관상이 어떻다고 하더라도 그 삶을 온전히 사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순간 순간 그 삶을 충실하게 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
하지만 그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니체가 말한 ‘운명애’처럼, ”필연적인 것은 감내하고 사랑하라.“ 가 아닐까?
2024년 12월 3일의 계엄 이후 일어난 일들을 반추하다가 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나는 그것을 알았어야만 했다.” 그는 쓰디쓴 비웃음을 머금으며 생각했다. “나 자신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 자신을 예감했으면서도’ 나는 어떻게 도끼를 들고 온 몸에 피를 적실 수 있었을까! 나는 미리 일았어야 했어.....아! 나는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절망에 빠져 속삭였다. 때때로 그는 어떤 상념 앞에 꼼짝도 못하고 멈추어 서 있었다.
“아니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진짜 ‘거인’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 사람은 툴롱을 호령하고 파리에서 대 학살극을 벌이고, 이집트에서 군대를 잃고, 모스크바에로의 진군에서 오십 만의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빌니우스에서는 그 일을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꼴렌꾸르의 증언에 의하면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에 실패하고 퇴각하던 길에 ”위대한 것과 우스꽝스러운 것은 한 걸음 차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죽은 후에는 그를 우상으로 떠받들지 않았는가. 즉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람의 몸은 살로 되어 있지 않고 청동으로 되어있는 모양이다.“
”위대한 것과 우스꽝스러운 것은 한 걸음 차이다.“ 맞는 말이다. 이러한 일이 이 세상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고, 요근래에도 일어나 세상 사람들이 다 중병을 앓고 있다. 나 역시 내 운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운명은 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자기 운명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지금의 내 생각이다.
2025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