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의 용안이 두산 베어스 유희관
닮았다고 생각한다면 기분탓일까요?
사도세자의 슬하에는 적자며 22대 왕이 되는 정조말고도 서자가 있었는데 은언군이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언군은 홍국영의 역모 혐의에 연루돼 교동도로 유배가게 되고 사약을 받고 죽게 되는 비극을 맞습니다.
**@은언군이라는 사람은 바로 훗날 25대 왕이 되는 철종의 친 할아버지가 됩니다.
철종의 아버지는 훗날 철종이 즉위하고 나서 전계대원군으로 추증되는 이광이라는 사람인데요.
엄밀히 말해서 철종의 피에는 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숙종, 영조 그리고 사도세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광은 원범(철종)이 세살 때 사망합니다.
철종은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아버지를 여의게 된 것이죠.
참고로 이원범은 이광의 첩인 염씨의 소생으로서 직계 적자가 아닌 방계 서자에 해당합니다.
그래도 철종은 1831년 양력 7월 25일 태어난 이래
오늘날 중학교 1학년 시절에 해당하는 14세까지는 왕족 대우를 받으며 나름 무난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1844년 갑진년(甲辰)에 큰 형이 역모죄에 연루돼 처형되고 이에 따른 연좌제로서 둘째형과 더불어 강화도로 귀양가게 됩니다.
그리고 1844년인 14세부터 1849년인 19세 장장 5년에 걸쳐 명색이 왕족이지만
몰락 왕족이라는 이유로 농부 혹은 나뭇꾼으로 평범한 양민 즉 강화도령으로서 평범하게 일생을 마칠 뻔 했지만...
**@극적인 운명의 롤러코스터가 이원범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조선의 24대 왕이었던 헌종이
후사없이 요절하게 되고 강화도령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이원범이 그 다음 후사로 지명됩니다 (인생 대역전???)
1849년 기유년(己酉) 그리고 이원범의 사주구조상 계사(癸巳) 때의 일입니다.
철종은 1852년 임자년(壬子) 대운상으로는 巳 火 운이었을 당시 친정을 직접 의욕적으로 시작합니다.
과거 강화도령 시절부터 민생고를 가장 가까이서 체험해왔고
조선 말엽의 시한폭탄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두손을 걷어부쳤지만
늘상 그래왔듯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안동 김씨 세력의 방해로 모두 허사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더욱이 철저한 아웃사이더 출신이었으며 궁중에 자기자신의 세력이 없었고
순진했던 철종이 권모술수에 능수능란할 때로
잔뼈가 굵은 안동 김가들에게 휘말리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철종은 나름 지존의 자리에 올라 지존답게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의욕을 가졌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 세도세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힘없는 군주라는 냉철한 사실 아래 절망감을 느끼게 됐으며
조선팔도에서는 민란이 여기 저기서 발발하여
조선사회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지게 됐고 정사(政事)를 점차 멀리하게 되고
***@술과 여색을 가까이 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됩니다.
그러나 좌절한 마음을 방탕한 삶으로 풀다보니 오히려 망가지는 것은 몸과 마음이었습니다.
강화도령 시절에 농업, 나무일로 다져진 다부진 육신은 무절제한 방탕의 삶에 의해 피폐해져갔습니다.
그리고
***@1864년 1월 불과 33세의 젊은 나이를 일기로 승하하게 됩니다.
원범이 남긴 것은 일단 부인이었고 왕비였던 철인왕후 김씨.
그리고 자식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죽고
후궁 범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혜옹주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나중에 친일반역자가 되는 박영효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만
영혜옹주 역시 박영효와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질병으로 요절하고 맙니다.
철종은 아버지덕도 없었고 형제덕도 없었으며 자식덕도 없었던 가련한 왕이었습니다.
그나마 조상님의 핏줄로 인해 강화도령에서 제왕으로 순식간에 벼락출세할 수 있었을 뿐이었죠.
다만 위안거리는 부인이었던 철인왕후 김씨가
비록 철종을 재위 내내 괴롭혔던 안동 김씨 가문 여자라 할지라도
정치에 관여하지도 않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고 차분하여 국모다운 성격을 지닌 여성이었기에 좋은 배우자는 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철종의 사주는 신묘년 을미월 정유일주(丁酉)인데요.
실제 자식이 모두 일찍 요절했으니 자식덕은 없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자식을 의미하는 별인 관(官)도 약하고 자식자리인 시주(時柱)의 기세도 쇠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묘미 반합이 이뤄지고 천간에 乙이 있으니 편인격(偏印)에 가깝다고 보는데요.
정유일주는 천을귀인에 해당하므로
이원범의 나이 19세인 기유년(己酉) 계사대운(癸巳) 때 천간에 계수는 편관(偏官)에 해당하고
지지에선 사유축 방합으로 재운(財運)이 발달하며 천을귀인이 합이 되므로 벼락출세를 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강화도의 나무꾼이 조선팔도를 다스리는 제왕으로 말이죠.
아버지 자리에 편인이 있고 어머니 자리에 식신이 있군요.
아버지는 비록 몰락왕족이었긴 하나 품위를 잃지 않으려 했고
훗날 사후 전계대원군이 되는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첩 염씨었죠.
철종이 군주가 된 때는 계사대운 중 전반기 5년인 계수 운인 편관운에 해당하는 시기였고
그 다음 후반기 5년은 안동 김씨라는 강력한 경쟁자이나 훼방꾼과 옥신각신해야 했던 사화 겁재운이었습니다.
그리고 철종 일생 마지막 대운인 임진대운(壬辰).
10년 대운 중 전반기 5년에 해당하는 임수 정관운 때
정관은 자식을 의미하므로 딸 영혜옹주(1859년 기미년 출생)를 얻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辰 상관운에 방탕에 빠져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폐결핵으로 3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게 되는 것이죠.
흥미로운 것은 사주의 년간(年干)이 辛金인데요. 이것은 인체상 폐를 말합니다.
폐가 아주 고립된 형상이라 金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요.
철종이 33세의 나이로 그것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사주의 영향이 이처럼 큰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적절한 운동이 철종에게는 운동의 비결인데
왕이기 때문에 운동도 제대로 못하고 말년에는 방탕하고 무절제한 삶에 빠지니까 병이 더 도진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역대국왕 중 일개 평민에서 제왕으로서 극적으로 벼락출세한 철종 이변(이원범)은 정유일주(丁酉)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미월(未) 양력 7월철에 태어난 분으로서 신묘년(辛卯)생에 해당하는데요.
乙木과 辛金이 같이 있고 未가 지지(地支)에 있다면
대개 부귀로울지라도 형벌을 받게 되거나 혹은 요절할 수 있다는 이론이 있는데요.
철종은 벼락출세한 위인이지만 실제로 이론 그대로 단명한 것도 묘하게 일치합니다.
33세. 현재 의학이 발달된 시기라면 한창 창창할 나이며 꽃다운 나이죠.
그러나 철종은 3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丁이 육신인데 월(月)이 12운성 건록(健祿)인 경우에는 자신이 노력함에 따라 튼튼한 건강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몇차례 큰 수술도 받아야 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기도 하는 극과 극의 건강운을 타고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철종은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활동했을 때는 건강했으나
왕이 되고 난 뒤부터는 극심한 스트레스, 불규칙하고 방탕한 생활습관으로 인해 건강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상을 상징하는 별(星)인 편인(偏印)이 월과 년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고
년(年)에 태극귀인으로 조상의 후광이 대단히 강하기 때문에
제왕이든 뭐든간에 한 순간에 구중궁궐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중궁궐에 들어가 산해진미 수라상을 받고 수많은 궁녀들의 시중을 받는 호강을 누렸을지라도
철종에게 무엇보다도 진짜 행복했던 시절은 강화도에서 일개평민으로서 살아갔던 시절이었습니다.
철종은 평민들의 애환을 직접 몸소 겪었던 인물이었으므로 왕위에 올랐을 때
한 때 누구보다도 더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철종 자체부터가 식신(食神)이나 편인(偏印)이 강하고 묘미합으로 木이 강해지는 사주를 타고났으니...
철종 자체부터가 카리스마적이거나 대담하지 못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게 되는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지만
철종 다음으로 즉위한 고종 초기에 10년 간
집권하게 되는 흥선대원군이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으로 세도정치를 한번에 타파한 사실을 보더라도
철종이라는 위인은 어느 정도 의욕적이고 다정다감한 인물로 보이지만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한 멧집과 정신력, 권모술수를 지닌 냉혹한 정치가라고는 절대 볼 수 없습니다.
철종은 시름시름 앓다가 슬하에 딸 하나를 남기고 1863년 33세를 일기로 승하했습니다.
철종에게 어울리는 삶은 구중궁궐 옥좌 위에 앉아있는 제왕이 아니라
강화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봄날에 꽃구경하듯 신선처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온 제왕의 길은 세상사람들이 봤을 때는 극적인 벼락출세,
인생 대역전(팔자가 크게 폈다)일 수 있지만
철종이변에게 개인적으로는 사실 엄밀히 말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왕이 되지 말았어야 했으나 사도세자라는
조상의 피가 몸 속에 흘러있었기에 운명적으로 용포를 입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슬픈 군주는
조선의 25대 왕이라는 타이틀만 남긴 채
쓸쓸하게 예릉에 묻혀 지금까지도 자신의 행복했던 옛 초년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눈썹역학=
첫댓글 **@運命이란, 인간넘어 작용하는 힘입니다!
강화도령에게는 그 힘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케이스쥬!
나뭇군에서 왕으로 등극한것이 운 덕이나 사주덕이었겠읍니까
왐족으로 태어난 덕이죠
신약자주에 묘와 을의 인성을 의지하고 사는 사주인데 묘는 묘미로 합거되어 을목하나 의지하고 사는데
계사년
신약사주에 계수 편관이 들어와서 을목 용신을 생하니 좋은일이 있지만 한펀 계수가 일간을 치니 왕자리에 앉았리만 좌불안석이고
사대운은 좋은 운인데 역시 사유합으로 가니 내편이었다가 변질이되니 배신자가 많이나오고
다행인것은 아내자리에 재가 앉아있으니 가정적으로는 처노릇을 잘하나 신강사주가 아니어서 처의 재가 용희신이 아니니 정치적으로는 도움이 안되는 처였고
33세이면 어느 대운에 속하는지 모르겠으나
기왕이면 임진대운 다음 대운인 신묘대운의 신금운이었으면 용신 을목을 신금이 치니까 사망운과 맞아들어지는데
글이 너무 길어서 중간에 읽기를 중단해서 모르겠네요 어느대운에 사망했는지의 내용이 있었는지를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명리학자는 명리학적 시각으로,사물을 해석합니다!
사주가 아닌데서,이유를 찿으려면, 사주 안보고,찿는데서 가서 구해야쥬!
대운을 세워보면 안 나옵니까!!!
무학님!
학인들의 이론을 감사로도 받아 읽으시길 바랍니다.
답글이 훈계조라서 보기 민망합니다.
이 곳에서 글을 쓰는 분들은 어느정도 레밸이 있는 분들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아침부터 언짢으셨다면 지송~하고요~
좋은 하루 맞이하세효~~^^
**@왕족이 청종만 왕족이었나유!!!
수많은 왕족들이 다 王이 못되고,시들었구먼유!!
**@조선 시대 왕자의 난을 보셔유!!!
다 왕족이면, 다 왕이 되어야쥬!!!
그러나 현실은 안그렇잖소!!
**@1+2=3이라는 답을 제시하는데,훈계라!!
모르면, 훈계라도 받아, 바르게 가야쥬!
아비가 자식한테,기냥 훈계합니까!!!
모르니,알라고 가르치는거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