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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호 저술가 ·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지도자가 없는 듯해도 잘 되는 국가. 요순시대의 이상이다. 현실은 그럴 수 없다. 지도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빈곤한 자질과 저급한 품성의 지도자, 또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유권자의 잘못은 사회를 퇴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다. 다른 경우도 있다. 나름의 역량과 식견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기대와 희망을 감당치 못한 지도자의 한계와 개혁의 실패가 그것이다. 이 역시 반동의 정치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사회를 후퇴시키는 요소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다. 미국은 어떨까? 트럼프가 앞이라면 오바마는 후자에 속하는 가장 최근의 사례이다.
전 세계적 기대 속에 등장한 오바마의 세 가지 실패
“내 생전에 흑인이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2008년 11월. 오바마의 당선에 대해 많은 미국 시민들과 진보인사들은 그렇게 말했다. 당선이 확정된 5일, 기대와 희망을 담은 축하의 집회가 동부에서 서부에 이르는 미국 곳곳의 도시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그날을 ‘희망의 밤’이라고 불렀다. 가수 밥 딜런은 미니애폴리스 공연 중에 오바마의 당선 소식을 전하면서 “이제야 세상이 조금은 달라지리라는 희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부인 미쉘은 흑인을 당선시킨 미국이라는 나라에 드디어 자부심과 애국심을 가지게 됐다고 고백했다.
오바마 지지 열기는 국내적 현상만이 아니었다. 그해 7월 중동에서 유럽까지, 대통령 후보자로 대순방 길에 나선 그에 대한 국제적 환대는 유명 연예인 급이었다. 베를린 집회에는 20여 만 명의 군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전쟁과 패권적 일방주의 미국’이 아니라 ‘신뢰와 협력의 미국과 세계’를 외치는 장래 지도자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취임식이 열린 2009년 1월 20일, 의사당에서 워싱턴 모뉴먼트를 지나 링컨 기념관에 이르는 내셔널 몰은 200여 만의 군중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2008년 7월, 오바마의 베를린 연설 집회.
그러나 2017년 1월 퇴임하기까지 두 번의 임기를 거치는 동안, 변화와 희망의 기수로 나섰던 오바마는 국내외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대통령 당선뿐 아니라 하원과 상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으로 올라선 2008년 선거의 정치적 대반전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당선 이후 2010, 2012, 2014, 2016년 이어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것을 제외하면, 민주당은 하원에서는 매번 졌고—패배의 규모 또한 역대급—, 14년과 16년에는 상원의 다수당 지위마저 잃었으며, 정권은 결국 트럼프로 넘어갔다. 같은 기간 연방뿐 아니라 주지사와 주 의회 선거를 합할 경우 낙선한 민주당 정치인은 무려 1000여 명이 넘었다. 50년대 아이젠하워 정부 이래 역대 어느 대통령 임기 중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트럼프의 등장에 오바마의 책임은 결코 작지 않다.” 2017년 1월,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 교수를 역임한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 C. 웨스트는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그렇게 탄식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와 관련, 오바마의 한계 또는 실패를 드러내주는 세 가지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는 유권자들이 오바마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첫 번째이자 결정적 계기인 금융공황사태 대처, 두 번째는 본인 스스로 가장 큰 대외정책 실패라고 말한 리비아 군사개입. 세 번째는 인종갈등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소극적 대처.
1. 양쪽으로부터 비판받은 금융위기 대책
20세기의 대공황에 버금가는 금융공황이 80여 년의 시차를 두고 21세기에 터졌다. 2007-8년 부시정부 말기에 벌어지면서 대책의 실질적 집행과 추가조처는 오바마 정부의 몫이 됐다. 공황은 부동산 시장에서 시작했다. 1998년부터 10여 년간 부동산 가격이 연이어 급등했다. 개인도, 국내외 은행도, 투자회사도 뛰어들었다. 2007년 들어 집값이 폭락하자 담보 이자율은 치솟았고 대출상환 불능 및 주택 압류사태가 폭증했다. 담보증권의 가치 역시 끝 모르게 추락했다. 개인이든 기관이든 투자자는 모두 파산했거나 파산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부채에 시달리던 유럽의 몇몇 나라(예: 그리스)는 국가부도 위기까지 몰렸다.
정부의 대책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구제금융을 통한 금융기관 파산위기 해소와 개인 피해자 구제, 둘째는 경기 활성화, 셋째는 금융규제 개혁. 모두 긴급입법을 통해 마련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구제금융 조처는 사태의 주범인 대형은행에 집중됐다. 중소지역 은행과 개인 투자자들은 사실상 배제됐다. 돈을 쏟아부었으나 경기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투기행위를 금지하는 금융개혁 법안은 은행의 반발과 소송에 부딪치면서 거의 사문화됐다. 금융기업인 누구도 체포되지 않았고 부시 정부의 부자감세 정책도 그대로 유지했다. 여론의 반발은 극심해졌다. 2010년 8월, 오바마의 지지율은 취임 시점 대비 절반 정도인 41%로 추락했다. 좌파는 오큐파이 운동으로, 우파는 티파티 운동으로 뭉쳤다. 오큐파이로부터는 ‘1%를 위한 정부’라는 비판을, 티파티로부터는 투자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 오바마에 대한 지지자들의 실망과 배신감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2. 대책없이 중동 혼란만 키운 리비아 개입
리비아 개입 실패: 2016년 4월, 오바마는 Fox뉴스와의 인터뷰에서 2011년의 리비아 군사개입이 자신이 저지른 최악의 실책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가다피 이후의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2010년 12월부터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빈곤과 부패,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는 시위사태가 벌어졌다.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투쟁이었다. 봄은 2011년 2월 리비아로도 확산되었다. 40여 년 독재체제를 이어온 가다피 정부도 흔들렸지만, 이집트나 튀니지처럼 정권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고,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시위대와 정부 간의 대립도 다른 나라에 비해 소규모였다. 반군은 사태해결을 위한 가다피의 대화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미국과 나토는 ‘민간인 학살’ 방지를 명분으로 2011년 3월 UN 안보리의 제재조처를 끌어냈고 리비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전쟁도 채 끝나기 전이었다.
가다피는 미국과 서방에 사태해결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다시 거절당했다. 미국과 서방의 목표는 ‘인명보호 차원의 개입’이 아니라 실은 ‘가디피 축출’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습과 반군을 피해 달아나던 가다피는 결국 그해 10월 자신의 고향 시르테에서 체포됐고 잔혹하게 처형됐다. 가다피 정권은 몰락했다. 이후 들어선 것은 새 정부가 아니었다. 무정부상태의 혼란과 지역 반군 간의 분쟁, 이슬람 테러집단의 조직과 확산이었다. 민간인 살상도 멈추지 않았다. 국제앰네스티는 민간인 살상은 공습과 함께 반군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후 리비아는 두 번에 걸친 참혹한 내전을 치렀고 결국 동서로 나뉜 분단국가가 되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개입할 이유가 없는 나라에 거짓 명분으로 개입, 국가를 망가뜨린 것, 그것이 오바마의 실책이었다.
나토공습으로 초토화된 가다피의 고향 시르테 2011.
3. 더 깊어진 미국의 인종갈등
2009년 4월, 오바마 취임 100일을 맞아 인종관계의 분위기를 묻는 뉴욕타임스/CBS 여론조사에서 긍정적 답변이 2/3 이상이었다. 그러나 2016년의 같은 조사에서는 반대로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악화되었다고 답했다. 흑인 대통령 시대에 인종갈등이 오히려 심해진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경찰폭력 사태이다. 총이나 기타 물리력에 의한 경찰의 ‘인명살해(police killing)’는 매년 평균 1000건이 넘는다. 사망자의 절대 수로는 백인이 많지만 인구 비율로 볼 때 흑인은 백인보다 3배 이상 더 많이 죽는다. 그럼에도 정당방위라거나 공무집행 중이었다는 이유로 98%의 경찰은 무죄처분을 받는다. 흑인의 입장에서 경찰폭력은 ‘백인경찰의 흑인살해’ 사태인 셈이다. ‘흑인 편들기’라는 비난을 원치 않는 오바마 정부의 소극적 대처도 갈등을 키웠다.
2012년부터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경찰에 의한 흑인살해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고 주요 도시에서는 그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와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언론은 1992년 LA 폭동사태 이후 흑인사회의 분노가 이토록 살벌한 것은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우리의 소중한 목숨’이라는 뜻을 담은 ‘Black Lives Matter(약칭 BLM)’라는 사회운동 조직이 이즈음 만들어졌다. 앞서 인용한 뉴욕타임스/CBS 조사에서 ‘인종관계가 실제로 좋아졌는가’라는 물음에 백인의 23%, 흑인의 32%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음울한 징후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사회통합을 강조해온 오바마는 모두에게 흑백 간의 대립적 사고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깊게 뿌리내린 백인종주의 미국의 현실 앞에서 구체적 대책이 결여된 통합의 논리는 매우 순진한 관점이었다.
‘개혁의 실천’에 취약한 정치인
2008년의 선거는 오바마에게 정치적 반대를 넘어설 수 있는 제도적, 사회적 환경을 확보해주었다. 그런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존의 워싱턴 당파정치를 넘어설 진정성과 열정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의 가슴을 흔든 ‘희망과 변화’라는 오바마 선거공약의 핵심은 그것이었다. 그는 한 사람의 정치인을 넘어 거대한 사회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오바마와 민주당은 그 열망을 받아 안지 못했다. 물론 무조건 반대로 일관한 극우 공화당의 방해전술에 기인한 바도 크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볼 때, 오바마는 ‘개혁의 언어’에는 강하지만 ‘개혁의 실천’에는 취약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초선 상원의원으로 대선에 출마 당선됐다. 워싱턴의 경험은 물론 정치적 자산이 일천하다. 오바마의 선거조직도 선거에 집중하면서 그와 당의 외연을 확장하는 정치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내각구성에서도 그는 상당 부분 클린턴 인맥에 의존했다. 참모들은 ‘클린턴 관료(apparatchik)’라고 불릴 정도였다. 왜 클린턴(국무장관 H. 클린턴)을 기용했는가라는 질문에 ‘최선의 인물이라는 자신의 믿음’이라고 답했다. 바이든 부통령에 대해서도 ‘전쟁을 누구보다 잘 마무리할 것 같은 생각에서’라고 답했다. 경제노선에 대해서도 오바마는 중도 나아가 중도우파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경제자문이나 각료들은 월가의 인물이었고 금융기업들은 그의 주요한 정치후원 집단이었다. 오바마가 금융개혁 과제에 대해 ‘자칫 자본시장의 균열과 붕괴를 가져오고 경제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소극적이었던 배경의 하나였다.
한편 민주당의 이념은 자유주의라고 볼 수 있으며 그만큼 사회복지 정책을 공화당보다는 중시하는 정당이다. 그 때문에 종종 ‘인민의 당(party of the people)’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좌-우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유럽의 정치지형에 비하면 중도우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공화당과도 국내 사회정책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에서는 자본-기업 친화적 보수정당이다. 대외정책에서도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앞선 이라크 전쟁이 보여주듯, 민주당과 공화당은 방점의 차이일 뿐, 모두 미국 우선주의 정당이다. 사실 민주당의 이미지, 즉 뉴딜 루스벨트 시대의 리버럴이 상징하는 강한 자유주의적 개혁 정당으로서의 민주당은 신보수-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세력이 주도하는 1980년 레이건 치세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후 민주당(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은 신보수·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지배 속에서 지속적으로 우경화의 길을 걸어왔다.
‘선량한 의지와 지성’이 우경화된 정치지형에서 무얼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바마는 흑인 정치인으로 최고의 도전과 성취를 이뤄냈다. 실제보다 이미지가 더 부각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재임 기간 달성한 의료보험의 확대, 쿠바 이란과 이룬 외교적 성과 등은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통령으로서의 전반적 평가도 높은 편이다. 공영 케이블 방송사 C-SPAN의 2022년 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10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도 그를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정치가 스스로와 소속 정당의 보수적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나름의 역량과 품격, 선량한 의지와 지성을 겸비한 오바마 같은 정치인의 한계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한계—보수적, 자본주의적, 친 기업적, 미국 중심의 제국적 전통—를 드러내 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미국의 미래를 현재의 정치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년의 대선과 총선도 연례행사 수준에 그칠 것이다. 새롭고 역량 있는 지도자의 배출은 커녕 비슷한 과거의 반복이거나 더 악화될 가능성도 크다. 안타깝지만, 미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지금과 같은 불안한—아니 더 불안한—정세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오바마의 한계와 실패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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