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젊음의 열기 속에서
— 잠실야구장 직관 후기
며칠 전 세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잠실야구장에 LG와 KT의 경기가 있는데 구경가겠냐 묻는다.
야구라면 프로야구만이 아니라 초등학교 리틀야구도 재미 있는 것을.
당연히 ok였다.
애비 성향을 알고 있기에 LG응원석 부근이라며 양해를 구한다.
구경하는 데에 자리를 탓하겠는가.
표는 이미 예약했고, 누나 내외도 함께 한단다.
프로야구 직관을 한 것이 언제였던가.
잠실야구장, 문학구장에 갔던 기억이 언제였던지~~~
가족 단톡방에 딸내미가 이렇게 공지를 했다.
(내 손전화에 딸은 '공주'로 아들은 '세자'로 저장되어 있다.)
야구장에서 제 1은? 치맥이 아닌가.
그래, 치맥은 애비가 쏜다고 했다.
곧이어 아들 녀석이 LG 응원 영상을 올렸다.
오기 전에 숙지(?)하란다.
LG 응원가만 아니라 선수마다의 응원가가 따로 있다.
게다가 율동까지.
내가 그걸 따라 한다고?
대뜸 물었다.
나야 그저 조용히 선수들의 행동을 보고 있다가 멋진 광경이 나오면 박수만 보내는데~~~
게다가 특정 팀을 응원하지 않는다.
선수들 하나하나 그들의 멋진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야구 그 자체를 즐길 뿐이다.
딸내미가, 응원가는 동생이 네 명 몫을 다 부를 것이니
애비는 그저 조용히 구경만 하면 된단다.
.
.
27일 늦은 6시.
나는 정확하게 제 시간 맞춰 잠실야구장 제1 매표소 앞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은 '작전중사망'이니까.)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나는 좀 늦는단다.
그런데 배고프단다.
배고프면 먹어야지.
치킨을 사오라 했다.
KFC치킨 한박스를 혼자 꿀꺽하는 아들 녀석.
참 잘 먹는다.
나도 콜라에 요기만했다.
그러고 나서야 도착한 딸내미 내외.
얼른 들어가자.
지정된 자리에 앉고 보니 아들 좌석은 본격적인 응원석으로 우리 셋과 떨어져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일 먼저 치맥부터 주문했다.
치킨을 먹으며 눈은 운동장을 바라본다.
원정 팀인 KT응원석에도 꽤나 많은 관중이 앉았다.
당연히 홈팀 LG팬들이 많았고.
내가 손수찍기로 인증샷 찰칵.
사위가 다시 손수찍기로 찰칵.
가운데 앉은 딸내미가 다시 찰칵.
KT의 경기이니 당연히 어머니께서 TV를 보고 계실 것.
전화를 드렸다, 잠실 야구장에서 경기를 보고 있다고.
딸내미 바뀌 조손 간에 통화도 하라 했다.
어머니는 아들인 나와의 통화 시간보다 손녀와의 통화시간이 길다.
오남매 단톡방에도 알렸다.
그랬더니 웬 걸.
미술학원 원장인 조카딸이 곧바로 답장을 보낸다.
KT응원하는 할머니 사진까지 첨부해서.
LG 응원석에 앉은 나를 보고 조카는 KT 응원석으로 이동하란다.
(우리 집안에서는 '큰아버지'를 '맏아버지'라 부른다.)
KT 선수 옷까지 챙겨 입으신 어머니.
SK 자회사에 다니는 딸내미(어머니께는 첫 친손녀) 때문에 SK를 응원하셨는데
둘째 손자가 KT연구원이 된 이후 KT를 열성적으로 응원하신다.
90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주변에서 다들 놀라지만, 프로야구 광팬이시다.
'아, 짜식, 점수 한 점 주더라도 더블아웃을 시켜야지~~~'
종종 작전까지 나무라신다.
나야 그야말로 야구 자체를 즐기는 사람.
그런데 오늘 자리가 영 아니다.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공 한 개 한 개에 좌석이 들썩인다.
'제발 야구 좀 보자'고 할 수가 없다.
여기는 홈팀 LG 응원석이 있는 1루이다.
돌아보니 아들 녀석이 응원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 담지는 않았는데
야구 경기보다 나는 오늘 아들이 응원하는 모습에 놀랐다.
내 아들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구나.
고등학교 교사 신분이지만 저렇게 감정을 노출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노래도 율동도 참 열정적이다.
내가 몰랐던 아들의 모습, 그런데 기분이 참 좋다.
무엇이든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면 되니까.
연애도 그렇게 해서 얼른 장가가야 할 터인데~~~
하긴 옆에 앉은 딸내미도 응원수건을 펼쳐 들고 몇 번 일어났다.
젊은이들의 응원 열정, 보기 참 좋았다.
나는 LG, KT에 관계없이 안타가 나올 때마다, 호수비가 나올 때마다 박수만 쳤다.
경기가 끝나고 나오다가 아들과 다시 찰칵.
이런 모습의 아들 그리고 딸.
얘네들이 내가 이 세상에 다녀간 흔적이 될 아이들이다.
녀석들이 내 딸 내 아들인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전철역까지 태워다 준다는 것을, 나야 전철타고 신도림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면 된다.
나 때문에 부러 돌아가지 말고 딸내미 차에 셋이 타고 올림픽대로로 빠져 얼른 가라고 했다.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를 먼저 보내고 천천히 걸어내려 오는데
곧바로 물밀 듯이 밀려 내려오는 관중들.
그리고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이들은 서로 누구인지 모른다.
오로지 LG팬이라는 것 하나로 이렇게 하나가 된다.
2002년 '대한민국~~!!!'을 외치며 하나가 되었던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환호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젊은이들이 참 부러웠다.
젊음, 그리고 그 열정이 내게는 시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도 저런 열정을 다시 찾아야 한다.
아들 덕에 딸과 사위와 함께한 프로야구 직관.
얘네들이 있어 즐거웠고,
젊은이들 틈에, 응원의 열기 속에 앉았었기에 뜨거웠다.
나는 야구경기 직관한 덤으로 젊은 열기를, 그 뜨거운 기를 받아간다.
그러니 오늘 딸과 사위 그리고 아들, 이들 셋 덕에 나는 참 행복했다.
— 9월 27일 일기 중에서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