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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2일 금요일 설
제1독서 : 민수 6,22-27
제2독서 : 야고 4,13-15
복 음 : 루카 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때 산악부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부가 되어서도 계속 등산을 좋아할까요?
사실 신부가 된 뒤에는 산에 간 기억이 몇 번 없습니다.
아마 10번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했던 등산에 대한 재미를 잃었을까요?
곰곰이 생각하니 ‘속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학생 때는 체력이 좋아서 거의 산을 뛰어다녔습니다.
심지어 산 정상까지 누가 빨리 다녀오는지를 산악반 동기와 내기했던 기억도 많습니다.
등산을 이렇게 속도전으로 하니 산의 또 다른 맛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얼마나 빨리 정상에 다녀오느냐만 관심사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 꾸준히 운동하지 않았고 또 등산도 자주 하지 않다 보니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이 상태에서 산을 뛰어 올라갈 수 있을까요?
제가 가졌던 등산의 목적인 ‘속도’를 채울 수 없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등산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속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그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면서 걷는 산책과
상쾌한 바람을 느끼는 자전거 하이킹은 계속하게 됩니다.
체력 문제보다 주변을 바라보려는 넓은 마음만 있으면 되니까요.
주님께 다가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른 응답만 요구하면 금세 주님한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곳 안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려고 노력하면
오랫동안 커다란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오랫동안 함께 하는 것, 오랫동안 주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커다란 준비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간의 만족만을 원하고, 짧은 노력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빠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입니다.
올 한 해도 주님께서는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빠른 응답만을 요구하고, 크고 화려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요구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복음에 나오듯이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는 사람만이
올 한 해의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언제나 깨어 준비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속도를 요구하는 종이 아닌, 긴 시간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을 갖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올 한 해를 멋지게 만들면 어떨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 복 많이 받으세요.
류해욱 요셉 신부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한 해 어려운 여건에서도 보살펴 주심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하시고자 하는 일 모두 성취하시길 바라며
여러분의 가정과 행복과 건강이 항상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동녘 하늘에 먼동이 터오듯 희망으로 가득 찬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9년 전에 쓴 재원 엄마의 글을 올립니다.
제가 사실 부끄러운 내용도 있지만, 이 글을 여러분들과 나눕니다.
류해욱 신부님께서 Daniel A. Kister 신부님을 모시고 오셔서
우리는 두 분 신부님을 모시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Fr. Kister 는 예수회 신부님이시고 영문학자시며 우리나라에서 40여 년을 지내시며
무속신앙을 연구하시고 서강대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셨으며
현재는 서강대 예수회 공동체 원장 신부님으로 계신 분입니다.
우리말을 우리보다 잘하시는데 중국 베이징 신학대학에서
10 년 정도 계시느라 조금 어눌해지셨다고 합니다.
류 신부님께서 미사를 드리는 중간에 갑자기 코피를 흘리셔서
좀처럼 멈추지 않는 바람에 더 황망하고 죄송했습니다.
그래도 류 신부님께서는 피를 닦아내시며 강론을 마치셨고,
키스터 신부님께서 이어서 미사 집전을 해 주셨습니다.
재원이는 키스터 신부님께서 미사를 이어가시자 처음 뵙는 외국 신부님이니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헬로우~~’라고 점잖게 한마디 해서
좌우에 있던 보라와 우리는 웃음을 참느라 큭큭댔지요.
초라하고 비좁은 상록수 제대이지만,
두 분 신부님께서 함께 계시니 따사롭고 평화로운 기운이 가득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분 신부님을 내려다보고 계신 예수님을
간간이 올려다보며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식사 후에 헤어지기 서운하여 자연스레 조촐한 여흥이 열렸는데
상록수의 대들보, 두 청년 재식과 진용의 노래가 이어지고 류 신부님의 화답송이 있었습니다.
류 신부님은 어제 노래가 무척 ‘되시는’날이었는데,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무아지경으로 한계령과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들려주셨습니다.
흐뭇하게 들으시던 키스터 신부님께서도 아이들을 위해
row row row your boat~ gently down the stream~을 들려주셨는데
우리는 미나리~고사리~~~유리 항아리~! 하며 즉석에서 개사를 해서 따라 불렀지요.
엄마야 누나야~도 조용조용 들려주셨는데, 목소리가 참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어린 시절 엄마가 불러주시던 엄마야 누나야.가 생각났습니다.
엄마도 그 노래를 좋아하셔서 자주 들려주셨는데
하얀 머리에 연한 푸른 눈동자의 노 신부님께서 들려주시는
엄마야 누나야.에서도 어머니의 소박하고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외교관이신 아버지를 따라 그리스로 온 가족이 떠날 예정이라
마지막 상록수 미사를 드리게 된 영훈이네 가족과 아베마리아를 같이 부를 때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서 또 주책맞게 눈물을 찔끔거렸지요.
만남만 있고 헤어짐은 없으면 안 될까요?
“신부님 되는 시험에 목소리 테스트도 있나 보다. 그렇지?”
딸내미랑 소곤거리며 두 분 신부님을 배웅해 드렸습니다.
운전해 가시다가 또 코피가 나면 안 되는데,
걱정이 되어서 떠나는 신부님 차 뒷모습을 보며 화살기도를 올렸습니다.
류 신부님 글이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행복은 다 좋은 모습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지요.
힘듬과 어려움과 고통으로 다가오는 행복도 있다고.
행복이란 따스하고 포근하고 편하고 신나고 만족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행복이 더 많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재원이가 장애가 없었으면 일산에 올 일도 없었고,
상록수 식구들을 만나지도 않았을 테고,
그 인연으로 여러 고마운 이들과의 만남도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재원이의 장애를 행복의 범주에 넣어야 할까요?
아직은 제가 내공이 부족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재원이의 장애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에게 날을 세우는 그런 마음은 아닙니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모습을 행복의 여러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을 할 여유는 생겼습니다.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나쁜 기억 지우기’이라는 책을 사다 놓은 저 자신이
허약해 보이는 것은 하는 수 없지만, 이제 그런 저에게도 실망의 눈초리를 주는 대신
그래. 그래도 괜찮아. 하고 순한 눈길을 주고 싶습니다.
이 자리를 빌며 재원 엄마에게 힘 내시라고 용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이는 진정 복된 이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는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십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설”을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용솟음치는 ‘축복’이 먼 하늘로부터
무수한 시간을 달려와
“설”이라는 고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베푸신 ‘축복’이
날마다 온몸에 사랑의 지문을 새겨 주고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펴 줄 것입니다.
꺼지지도, 식지도 않는 변함없는 보살핌으로 감싸며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는 줄기찬 사랑을 퍼부어 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한 삶의 반려자가 되어 주고
하는 일마다 전폭적인 사랑과 신뢰로 지지하고 성원해 줄 것입니다.
혹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더라도
늘 다정한 벗이 되어 주고 사랑을 강화시켜 주며
올 한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건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 안에 머무르고
또한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저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설날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배, 세뱃돈, 선물, 복 받으세요. 덕담, 떡국, 고향방문, 씨름대회”가 떠오릅니다.
신앙인들은 연도를 바치고, 설날 미사에 참례합니다.
설날을 기억하는 것은 조상들에게 감사드리고,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모여서 안부를 전하고, 정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세배를 받으시고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을 기원해 주셨고, 수도자와 성직자의 길을 가는 동생수녀와 제게는
늘 겸손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손자들에게는 직장생활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아버님이 계신 하느님 나라로 가셨으니 이제 덕담을 들을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아버님과 함께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가슴이 찡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1월 17일에 나온 ‘미카엘의 순례일기’입니다.
13세기 중반의 프라하에는 베드로라는 신부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사제의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는데,
고민의 한가운데에는 미사 중 변화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에 대한 의심이 있었습니다.
작고 동그란 밀떡과 검붉은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축성을 통해 평범한 음식이
살아있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로마로 순례를 결심합니다.
베드로 성인의 유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시기를
간구했는데도 여전히 성체의 거룩한 신비에 대한 의심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순례에 큰 기대를 걸었던 베드로 신부님은 크게 상심한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로마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볼세나에는 성녀 크리스티나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열 명 남짓 둘러앉아 전례를 행할 수 있는 작은 경당이 있는데,
베드로 신부님도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깊은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누룩 없이 만들어진 흰색 제병을 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양성체를 하는 순간, 갑자기 성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붉은 피는 베드로 신부님의 손을 적시고 흘러내려 그 밑의 성체포까지 빨갛게 물들였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이 사건이 분명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기적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1290년 사람들은 이 놀라운 기적의 성체포를 보관하고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으며,
300년 후 그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은경축을 맞이하면서 한국에서 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온 사제가 있었습니다.
볼세나의 성체포 기적 성당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신자들과 함께 순례를 가는 길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습니다.
성체포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었고 말씀이 선포된 후,
강론대에 오른 신부님은 고개를 떨구고 한참이나 서 있기만 하였습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신부님은 말을 하였습니다.
매우 짧은 강론이었습니다.
‘저 역시 베드로 신부님과 같은 의심을 떨치지 못한 채 은경축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얼마나 의심하면서 살았는지 여러분은 모르십니다.’
신부님의 눈물과 신자들의 흐느낌이, 수면 위에 떨어진 물방울의 파동처럼
작은 경당 안에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부족한 사제가 열심한 신자들 앞에 서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5처를 묵상하면서, 6처를 묵상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신자들은 기꺼이 시몬이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지극한 정성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저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가식과 위선으로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신자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고, 은총이 가득한 ‘십자가의 길’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설날을 맞으면서 바라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면 좋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연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설날입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을 빌어주는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데에
근신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 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고 한 해를 살아갈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덕담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사실 명절을 기다려온 것은 서로의 만남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만남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덕담도 성경말씀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설 명절에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하며
‘통통,통통’복을 받으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1. 의사소통, 2. 운수대통, 3. 만사형통. 4. 쓰레기통입니다.
서로의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통해야 합니다. 잘 통하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아픕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잘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립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열어주신 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는데 있어서 하는 일 마다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든 것을 담고 품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되시길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여기다가 '전화한통'을 덧붙입니다.
자주 인사하고 먼저 안부 전하는 '전화한통'입니다.
예전에는 세뱃돈과 설빔을 받는 기쁨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의 만남에 의미를 두고 고향을 찾게 됩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병이 생기기도 했지만
고유명절은 그래도 가족의 유대관계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명절이 되면 도심으로 나가있던 삼촌과 누나를 기다렸습니다.
명절에는 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용돈을 얻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선물이나 돈의 액수가 줄어들면 마음속으로는 서운해 하였습니다.
그저 공짜로 받는 주제에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크게 받으면 다음에 받을 때는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게 되고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받았으나 감사할 수 없으니
줄때도 잘 줘야 하고 받을 때도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짜로 언제든지 주십니다. 알맞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 잣대로 재고는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받은 것에 감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이 또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명절의 의미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합니다.
바로 명절의 두 번째 의미는 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 치례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순간순간을 늘 깨어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오복의 첫 번째는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두 번째는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세 번째로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또, 네 번째로는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큰 행복으로 여겼던 이 오복(五福)을 염원하기 위해
새 집을 지으면서 상량(上梁)을 할 때는 대들보 밑에다가
"하늘의 세 가지 빛에 응하여 인간 세계엔 오복을 갖춘다"는 뜻의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인간지오복(備人間之五福)"이라는 글귀를 써 넣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복을 받았다 해도 일시적입니다.
믿는이들은 영원한 복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복 중의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주관하시고 천상의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성을 넘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이미 하느님을 차지하시고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복을 결코 잃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너희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머리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복을 받으시길 희망합니다.
시편에서는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고 하였습니다.
만사형통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낮은 사람들에게도 높은 사람에게도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께서 너희를, 너희와 너희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시편115,11-15).
복을 주시는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행복하게 한 해를 살아갈 지혜를 일러줍니다.
복음의 "깨어 있음", 제1독서의 "축복의 소명", 그리고 제2독서의 "하느님 중심성"입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한 해를 시작하는 설에 우리 민족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 가신 조상들을 기립니다.
새로운 시간을 열면서 다가올 미래를 두근두근 기대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또 언젠가 맞게 될 죽음을 상기하는 것은
지혜롭고 의미 깊은 전통입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 각자의 마지막 날과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오직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만 아시는 그날 그 시간은,
그래서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교만하게 살아가는 이들까지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게 만들지요.
그렇기에 하느님 계획에 대한 무지는 오히려 인간에게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
예수님께서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이들이 행복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깨어 있음"은 물리적으로 잠에서 벗어난 상태라기보다, 영적인 각성 상태입니다.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의 근원과 목적지를 인식합니다.
하느님의 숨이 아니면 흙의 먼지와 같이 보잘것없고 미소한 존재임을 아는 겸손에,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함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이들이지요.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을 기억합니다.
기억은 그 은총과 환희와 감사를 현재화해서 살아가게 하지요.
하느님과 누린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면서,
지금 여기서 그 사랑을 살아가는 것이 곧 깨어 있음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깨어 있는 영혼을 본 주인의 기쁨이 이렇게 표현되다니 놀랍지요!
종과 주인의 세속적 주종 관계를 생각하면
마치 종과 주인 사이의 신분이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요.
강생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낡고 병든 계급 관념을 깨뜨리고 내려오신 신비입니다.
주인이 깨어 기다리던 종에게 해 주는 섬김의 모습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고 싶어 늘 준비하고 계신 사랑입니다.
그분은 언제라도 그렇게 해 주고 싶어 노심초사 기다리십니다.
이 기다림은 그래서 그분과 우리, 쌍방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제인 아론 집안에 내리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복을 지향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주님께서 사제들에게 축복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들이 백성을 향해, 주님께 복을 받고 그분 얼굴을 마주하며
은혜와 평화를 누리라고 빌어 줄 때,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서로를 축복해 주는 이 아름다운 소명은 직무사제직에 불리운 이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편 사제직으로 불리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 누구나 축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축복은 타인을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축복을 빌어 주는 이들에게도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축복하는 마음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우리 삶이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들려 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5)
치열한 물질주의적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족의 미래와 직업, 재산과 관련해 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동동거리지요.
하지만 재산이나 건강, 커리어 등 기껏 쌓은 공든 탑이 계획과는 상관없이
일순간 무너져 버린 허무한 경험을 자신에게든 타인에게서든 목도한 적이 없지 않을 겁니다.
그 중심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제 능력이나 우연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모든 것 뒤로 당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의 겸손을 몰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얕은 꾀와 조급한 계획, 엉성한 실행력에도 불구하고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외면한 채, 제 능력인양 오만하고 교만하게
하느님과 세상을 낮추어 보기 일쑤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면“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이제부터 우리의 계획이나 지향 앞에
늘 이 말씀을 새겨 넣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살라는 뜻이 아니지요.
모든 일이 그분께 달렸다는 듯이 겸손하게 의탁하고,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렸다는 듯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대림시기 첫 날, 1월 1일,
그리고 오늘까지 우리에게 벌써 새로움의 은총이 세 차례나 주어졌습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사랑을 향해 깨어 준비하며,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있어 올해의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이고, 주님도 뿌듯하고 기쁘실 겁니다.
아론의 측복으로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새해 주님 복 많이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