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찾아온 귀한 손님,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 무렵
전화가 왔다.
“형님, 저요, 집에 있습니까?
설이라서 어머니 집에 내려왔다가 형님 집에서 차 한 잔 하려고요.”
오재성 판사였다.
전주지방법원장을 지내고 의정부지방법원으로 간 오랜 도반이자
형제처럼 지내는 그를 만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그 당시 전주지법의 판사로 근무하면서
아들 윤탁이와 하진이를 데리고 황토현문화연구소의 <남녘기행>에
두 부부가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오로지 법전만 끼고 사는 법조인들과 달리 오재성 판사는
역사교사인 아내와 함께 인문학에 능통해서
시시때때로 답사길에 동행을 했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기념사업회 행사를 진행할 때
고창 부안 정읍, 전주, 이곳, 저곳을 얼마나 많이 다녔던가?
그는 판사를 천직으로 알고서 폭넓은 인문학 공부를 하며
욕심없이 사는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두어 시간 나누고 그가 돌아간 뒤
지나간 추억들로 오랜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해서
서가의 책들을 쳐다보며 글 한 편을 썼다.
서가書架에 핀 수만 송이 꽃,
어쩌다 보니
내가 사는 집에
수만 송이 꽃이 피었다.
물을 주지 않아도,
가꾸지 않아도 언제나
활짝 미소짓고 나를 바라보는 꽃,
내가 누군가를 편애해도
시기나 질투를 하지 않고 나만 바라보는 꽃,
잠을 자기 전까지
내 눈을 즐겁게 하고,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내 눈과 마주치기를 갈망하는 꽃,
내 손길이 닿기를 소원하는 꽃,
저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그 꽃이 유혹하면
나는 지체없이 다가가
그 꽃들에 입을 맟추고
마음에 들여놓는다.
그윽한 꽃의 향기가 내 영혼을
포근히 감싼다.
산다는 것이 ‘시절 인연’이라서
그렇게 자주 만났던 사람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김지하 선생님은 작고해서 이 세상에 없기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지나간 추억들이 떠올라
그리운 것이 사람이고 지나간 추억이다.
그리운 사람이 느닷없이, 불쑥 찾아온다.
기쁘지 아니한가?
2025년 1월 26일,
출처: 길위의 인문학 우리땅걷기 원문보기 글쓴이: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