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이스터먼의 ‘코닥 카메라’
1888년은 죠지 이스트먼(1854-1932)이 코닥 카메라를 만들어 낸 해이다. 코닥이 태어나자 일반 사람들도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진기의 대중화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스트먼은 은행원이었지만, 발명가이기도 했다. 사진기에서 성공 여부를 판가름 하는 것은 인화하는 필름의 발명이었다. 새로운 필름의 발명은 사진기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1888년에, 이스트먼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기 쉽게, 작은 카메라를 발명했다. 가로 + 세로가 16.5 + 8 cm 이었다. 주머니에도 들어갔다. 이스트먼은 사진기의 이름을 ‘코닥’이라고 하였다. 코닥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이름은 아니었다. 그냥 붙인 이름이었다.
이스크먼은 코닥에 광고 전략을 펼쳤다. 광고 문구는 이랬다.
“버튼만 누르십시오. 나머지는 우리가 합니다.”
회사에서 써비스를 대행해주었다. 최초로 필름의 현상과 인화를 써비스 해주는 회사가 코닥사였다. 10달러만 들고 가면 사진기에서 필름을 뻬내어 100장을 인화해주었다. 사진기에 새로운 필름을 채워서 주었다.
100장의 필름을 모두 사진 찍고, 10달러와 함께 사진기를 코닥 대리점으로 보내면, 인화된 사진 100장과, 새로운 필름으로 채운 사진기를 보내 주었다.
65세인 감리교회 목사 한니발 규윈(1822 – 1900)은 종이 필름 대신에 셀루로이드 필름을 발명했다. 종이 필름은 잘 찢어져서 불편했다. 코닥 사는 1891년부터 셀루로이드 필름을 사용했다. 코닥 사는 한니발 규윈으로부터 500만 불을 주고, 특허권을 사들였다.
코닥은 카메라 대중화라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스트만은 소형 카메라의 발명뿐아니라 점점 더 값싸고, 멋진 카메라를 잇달아 소개하였다. 광고에도 떼돈을 쏟아부으면서 떼, 떼, 떼돈을, 떼돈의 몇 배를 벌어들였다.
이때를 아마추어 발명가 시대라고 하였다. 아마추어 발명가 시대에는 다양한 품종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통계 자료를 보면, 특허 건수도 폭증했다.
이스트먼은 결혼을 하지 않고 침실 12개를 포함하여 방이 37개인 호화 저택에서 어머니와 살았다. 1932년에 전 재산을 병원과 대학에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