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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42-47
형제들은
42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43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44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46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47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들을 들려줍니다.
곧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라고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할 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3)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곧 신뢰로 사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하는 일, 곧 ‘자비를 베푸는 일’이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탈출 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용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걸머져주며, 짊어져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고 ‘위해’주는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시고,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짊어져주고 걸머져주시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그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 ‘사랑이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의 공동체>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제 생각에 오늘 사도행전에서 소개되는 이상적인 초대교회는 '함께' '같이'와 '하나'라는 말이 열쇠말인 것 같습니다.
함께 지내며 함께 먹었다고 얘기하고 있고, 모든 것을 같이/공동으로 소유했다고 하고,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이고 빵을 나눴다고도 합니다.
공동체共同體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共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이고, 同이라는 말은 '같은'이나 '다같이'의 뜻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공동체란 함께 다 같이 이룬 같은 몸이 아닐까 또한 생각합니다.
여기에 한마음으로 모였으니 초대 공동체는 그야말로 일심동체一心同體가 아니겠습니까?
먼저 함께 이루는 공동체성을 보겠습니다.
너무도 지당한 것이 공동체는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점점 늘고 있고 그래서 ‘혼밥족’이니 ‘혼술족’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저는 처음 혼밥족, 혼술족이라는 말이 신문에 등장했을 때 한동안 이게 무슨 신조어인지 몰라 이해를 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늙은이들은 가족들과 같이 살고 싶지만 사별하였거나 자녀들이 원치 않아서거나 독거노인으로 혼자 살고, 젊은이들은 공부나 직장 때문에 가족과 떨어지거나 혼자 사는 것이 좋아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삽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는 것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지만, 요즘 문제는 같이 사는 것을 싫어하거나 같이 살 수 없어서 혼자 밥을 먹고 술까지 혼자 먹는 ‘혼밥족’과 ‘혼술족’입니다.
어떤 때 보면 같이 살겠다고 모인 수도 공동체 안에서도 무엇을 해도 같이 하려 하기보다 혼자 하려는 경향이 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잘못 기능을 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안타까운 현상이지요.
다음으로 같은 몸을 이루는, 같이 하나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도 보겠습니다.
‘같은’은 ‘다른’의 반대말입니다.
그러므로 같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다른데도 같이 하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를 이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다름’이나 ‘차이’를 인정치 않는 획일적인 공동체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름을 인정치 않고 같아야만 한다면 성격이 달라서 같이 살 수 없다고 할 것이고, 취미나 신분이 다르면 같이 어울릴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다름에도 하나를 이루지만 그 이유가 저속한 경우입니다.
권력이나 이익 등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라도 그래서 싫어도 한 배를 타는 오월동주吳越同舟 같은 경우지요.
요즘 정치에서 이런 형태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이나 이익과 같이 이기주의적인 차원의 목표를 넘어서는, 말하자면 좀 더 숭고한 목표를 위해 하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처럼 같은 이념理念과 주의主義 때문에 같이 모이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고의 공동체라고 하겠지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꼽는 최고의 공동체는 역시 사랑의 공동체일 겁니다.
성격, 취미, 능력, 출신, 생각, 민족, 종교 등 모든 것이 달라도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사랑이 제일 숭고하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를 이룰 수 있고,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가 최고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는 초대공동체는 이것도 넘어섭니다.
차이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와 자기 것이 없기에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초대공동체는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주님의 수난과 부활로 부활의 기쁨, 거듭남의 기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세례로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소유했기에 이 세상 것을 다 내놓아도 기쁘기 마련이지요.
하느님 나라가 내 것이기에 이 세상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그런 부활의 기쁨과 그런 부활의 공동체를 꿈꾸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있지만 주님의 사랑은 한결 같습니다.
당신을 배반한 사람, 부정한 사람들에게까지 보여주신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기 바랍니다.
자비는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 자신이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신 것처럼, 측량할 수도 없고 다 써버릴 수도 없을 만큼 한없이 많고 큽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지만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고, 유령으로 여겨 무서워 떤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 알아 뵙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날 토마스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토마스에게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를 살리기 위해서 유다땅 베타니아로 가려고 했을 때 위험에서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동료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외친 적이 있고,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 자리에서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할 것이라고 얘기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고 말씀하시며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하셨는데, 토마스는 주님이 떠나신다는 생각에만 묶여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2-5) 하고 말한 적이 있는 용맹하고 충성심이 높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신의 사도로 더 기억합니다.
토마스는 의심했지만,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확인하고 만질 엄두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최상의 고백입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누구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토마스가 처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문들이 잠겨 있는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신 주님, 주님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이 한 말을 다 알고 계신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 오늘도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인간적인 생각, 완고함이 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 11,1)
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합니다.
어찌 되었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 되어 실망하고 좌절하여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마태 12,20) 주 예수님께서 토마스의 내면을 가득 채운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고자, 그의 의심을 신앙으로 바꾸시고자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송봉모).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만 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확고한 믿음으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참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을 품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믿음을 갖고 사는 우리를 위한 사랑,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당신 두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십자에서의 승리로 나누어 주신 평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기쁨과 평화가 있다면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평화로 가슴을 충만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채워 주시고 허물과 잘못을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길 청합니다.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사십시오.”
(마더 데레사)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한계를 주님께 의탁하면서 자비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평소 우리 감정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증명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사도들에게 첫 번째, 두 번째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토마스 사도는 첫 번째 발현 때는 함께 있지 못했고 두 번째는 함께 있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가 여기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감정’의 변화입니다.
복음은 제자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가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었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행복하지 않으면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부활하여 하느님 나라에 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공동체나 그 공동체를 유지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 결속력은 결국 ‘믿음’입니다.
만약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교회는 금방 해체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싶으면 토마스처럼 그 공동체에 속하여 일정 기간을 버티어내면 됩니다.
헝가리인인 ‘라즐로 폴가’는 천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 공동체나 누군가가 믿어주면 자녀가 그 믿음대로 천재가 되는 것임을 증명하고 싶어서 자신의 딸 셋을 그렇게 키웠습니다.
정말 딸 셋은 다 세계적인 체스 기사들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상이 거의 나오지 않고 유태인들은 많은 노벨상을 탈까요?
그것은 믿음에 기인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주는 믿음이 다르고 유태인들 교육이 주는 믿음이 다른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백성으로 바다도 가를 수 있고 광야에서 40년을 아무것도 없이 버틸 수 있는 존재들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무신론적 믿음을 줍니다.
그리고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세계적 싱어송라이터가 된 에드 시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눈 주위의 커다란 점을 수술하였는데 마취하는 것을 잊어버려 청각 장애, 사시 현상, 심지어 말더듬증 현상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생 말더듬증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바꿔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래퍼 에미넴의 음반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에드 시런은 아버지의 뜻대로 1년 동안 그의 음악을 달달 외우고 따라 하며 말더듬증을 고쳤습니다.
아버지는 유명 가수들을 만나게 해주고 그가 가수가 될 꿈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에드 시런은 길거리 가수부터 시작하여 미국으로 무작정 건너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사람이 제이미 폭스였습니다.
제이미 폭스는 자신의 공연에 무명인 에드 시런을 참여시켜 주었고 첫 앨범을 내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유명해진 에드 시런은 이제 더 클 수 있음을 믿어주는 톱스타 테일러 스위프트를 만납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처지를 살아온 에드 시런을 자신처럼 세계적 스타가 되게 해줍니다.
에드 시런은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여행을 다닙니다.
이때 애인 체리 시븐으로부터 무엇을 얻었겠습니까?
더 큰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낸 앨범은 경이로울 정도의 인기와 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나가며 살아갑니다.
그 어려움을 겪을 힘은 바로 언젠가 부활할 것이란 믿음입니다.
그러한 공동체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을 맛보고 힘든 중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두 팔이 없고 한 다리는 30cm밖에 안 되는 중증 장애인인 레나 마리아는 장애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고 노래와 그림 실력은 프로급이며 인기 도서 작가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오로지 발 하나로 합니다.
하지만 그녀도 “엄마, 난 친구가 없어요!”라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는 “왜 친구가 없어. 예수님이 네 안에 계시잖아!”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녀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엄마니까 그렇게 말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즈음 전화 한 통이 그녀를 바꾸어 놓습니다.
“레나 마리아 씨죠?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많은 사람이 응원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려주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믿음 공동체의 힘입니다.
부활을 믿느냐는 질문에 레나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나약한 저의 육신과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제 입술을 당당히 보여주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신앙이 맹목적이지 않고 이성의 빛, 진리의 빛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불신과 의혹이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까웠던 나머지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사도들 가운데 가장 의심이 많았던 토마스를 향해 이렇게까지 행동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복음 20장 27절)
아마도 의심이 많았던 토마스는 자신의 손을 뻗어 아직도 못 자국이 뚜렷한 예수님의 손바닥에 갖다 대어 봤을 것입니다.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제야 토마스는 의혹의 시선을 떨치고 외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사람들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토마스 사도의 불신과 의혹을 질타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강요에 의한 신앙, 맹목적인 신앙, 군중 심리에 따라가는 신앙은 위험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신앙의 길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응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망설이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고, 고민을 거듭합니다.
이윽고 초대에 응답해서 신앙의 길로 접어듭니다.
그걸로 다 끝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시련과 고통이 따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의 신앙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맹목적이지 않고 이성의 빛, 진리의 빛, 성령의 빛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이나 식물이 아니라 이성과 지성을 겸비한 인간입니다.
때로 신앙의 길로 귀의하는 과정에서의 의심과 진단, 고민과 성찰은 지극히 인간적인 노력이고, 필요한 노력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 성령의 현존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성령께서는 때로 기적의 바람을 불러오시는 분입니다.
한 인간 존재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분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길 인내롭게 기다려야겠습니다.
언젠가 그분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토록 이해하기 힘든 신앙의 신비도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는 예수님의 부활로 신앙인들이 얻게 된 ‘은총의 선물’들 가운데에서 ‘첫 선물’입니다.
‘평화’는 ‘온갖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박해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에 대한 두려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문’까지 잠가 놓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은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과 당신의 부활은 단순히 되살아난 일이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고 정복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박해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나중에 성령을 받은 뒤에는 힘과 용기로 가득 차게 되었고, 숨어 있던 방에서 나가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2,1-4).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곧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에페 2,14).
평화가 무슨 물건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신앙인들이 저절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잘 받아서 누리려면 우선 먼저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는 것, 부활하신 다음에는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평화’는 나 혼자 편안하게 지내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잘 받아서 온전히 누리려면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미움, 증오, 원한이 있다면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용서하면 참 평화가 이루어지고, 용서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의심’이 있다면 참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신앙 교리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이미 “평화를 누리려면 믿어야 한다.” 라고 말했는데, 제대로 믿으려면 의심부터 없애야 합니다.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동료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그분인지, 아니면 유령을 본 것인지, 아니면 어떤 영적 존재를 본 것인지, 그런 의심입니다.
이것은 토마스 사도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 전체의 신앙에 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고, 바로 그분이 부활하셨고, 자신들이 바로 그분을 만났다고 증언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사도들이 그 확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그들 모두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한 최초의 신앙인으로 평가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기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토마스 사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의 인간 세상을 보면, 옛날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즉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전쟁, 전염병, 재난, 인간들 사이의 갈등들.
평화를 해치는 악인들을 모두 제거해버리면 참 평화가 올까?
하느님의 뜻은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끼리만 골방에 숨어서, 우리끼리만 평화를 누리면 그만인가?
그것은 참 평화가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한다면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9).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면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선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쉬운 일도 아니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기도하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고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피하고 쉬운 일만 하려고 하면 몸은 편안하겠지만 참 평화는 얻지 못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 - 공동체, 평화, 희망>
오늘 부활 제2주일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대희년을 맞이한 2000년 부활 제2주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사도’라 불리는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수녀를 시성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주일을 제정했습니다.
교황은 시성식에서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20세기 격변의 상황을 돌아보며 “비극적 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비의 메시지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3년이 지난 2023년 지금도 여전히 갈수록 자비의 메시지는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도처에서 계속되는 전쟁에 내외적으로 계속되는 혼란한 상황이 하느님의 자비뿐이 답이 없다는 사실이 절박하게 마음에 와닿는 시대입니다.
말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잊어 자초한 재앙입니다.
한밤중 밤1:30분 강론 쓰다가 체험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어제 키보드 청소하다 손상을 준 듯 강론을 쓰다 보니 키보드가 고장이 났는지 아무리 해도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 손으로 쓸 때는 전혀 문제될 리 없었지만 디지털 시대는 대책이 전무합니다.
어쩔수 없이 이 방면에 전문가인 한밤중에 곤히 잠자는 원장 수사를 깨울수 뿐이 없었고, 쾌히 웃으며 잠깬 원장 수사가 자신의 키보드와 교체해 줌으로 강론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말그대로 천우신조天佑神助, 구사일생九死一生, 강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비상한 상황에서 형제애를 통한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한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를 노래한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그윽한 위로가 되는지요!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시편 118,1)
아무리 불러도 정겹기 한이 없는 가사와 곡의 화답송 후렴을 오늘 종일 기도 노래로 바치며 지내고 싶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셔라” 계속되는 후렴의 감미로운 시편 136장도 읽으며 감상하려 합니다.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홀로 당신만이 큰 기적을 하셨나니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136,1-4)
무려 26절까지 계속되는 주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시편을 노래하면 깊은 감동에 젖게 됩니다.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수도자들입니다.
새삼 이런 주님의 자비도 공부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부단히 노래할 때 하느님의 자비는 온삶에 스며들어 자비로운 사람들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생과제도 단 하나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의 심판도 자비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지요.
날로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겠습니다.
바로 자비가 영성의 잣대이자 심판이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참 좋은 자비의 선물에 감동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보답하려는 의욕도 충만해짐을 느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 셋입니다.
첫째, 사랑의 공동체 선물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은총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사랑에 넘치는 아름다운 주님 자비의 공동체인지요!
순전히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열매입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활짝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원이 꿈꾸는 공동체입니다.
말 그대로 자발적 사랑의 공산주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세상을 꿈꾼 공산주의 혁명이었지만 언감생심, 하느님 자비의 은총없이는 어림없습니다.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집 저집에서 빵을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었다.”
참 아름다운 공존공생, 사랑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순전히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은총의 선물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숙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적극 참여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고 실천의 훈련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공동체에 대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자비의 배움과 훈련으로, 자비의 실천으로 화답해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상천국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니, 우리 수도공동체의 이상이자 희망이기도 합니다.
둘째, 평화의 선물입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모든 것을 다 소유했어도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의 선물이 절실합니다.
참평화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쟁취하거나 거금으로 사올 수 있는 평화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임이 드러납니다.
자비와 평화의 주님이 임재하시면서 불신과 불화, 두려움의 벽은 활짝 열린 평화의 문으로 바뀝니다.
말 그대로 벽이 변하여 문이 된 것입니다.
활짝 열린 문으로 평화와 함께 물밀듯이 들어오는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벽은 문이 되고 공동체 한 가운데 자리 잡으시고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크게 기뻐하니 평화에 이은 기쁨의 선물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와 더불어 선사되는 성령과 용서의 선물입니다.
성령과 용서의 선물이 평화 공동체의 완성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참으로 집요하십니다.
여드레 후에 마지막 남은 회의주의자 토마에게 나타나 그의 의심의 벽을 평화로 허물어 버리고 그의 고백을 받아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즉각적인 토마 사도의 감격에 넘친 고백의 반응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평화로 인해 이제 제자들은 평화와 기쁨, 성령과 용서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협조도 필수적입니다.
평화의 은총의 선물에 응답하여 우리 또한 평화를 배우고 공부하며 평화의 실천 훈련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역시 평생 평화의 배움. 평화의 훈련입니다.
산상설교 중 참행복이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피스메이커(the peacemakers)”가 되라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the peacemakers)!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셋째, 희망의 선물입니다.
희망이 죽으면 이어 사랑도 믿음도 시들어 죽습니다.
그리하여 성서는 한결같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 합니다.
파스카의 희망,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기쁨이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최고의 선물이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공동체든 개인이든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희망이 없으면 건강할 수 없습니다.
부패와 타락, 유혹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희망의 빛이 사라지만 바로 거기가 지옥이요 사람들도 품위와 향기를 잃고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파스카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희망입니다.
아니 하느님 자체가, 파스카 예수님 자체가 희망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전체가 ‘희망에 대한 감사’입니다.
희망 찬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우리를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게 합니다.
바로 희망은 기쁨과 평화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 평화입니다.
그러니 자녀나 이웃에게 희망을, 꿈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실질적 사랑인지 깨닫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인지 대부분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은 금보다 훨씬 값지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은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일이 없디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그분을 희망하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기에,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되어 살기에 시련과 고통중에도 충만한 기쁨중에 즐거워하는 베드로와 그의 교회공동체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신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베드로입니다.
역시 희망도 우리의 최선을 다한 응답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우리 역시 끊임없이 희망을 배우고 공부하고 훈련하자는 것입니다.
희망의 배움, 희망의 훈련입니다.
매일 자비하신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두고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에 정성을 다함이 제일 좋은 희망의 배움, 희망의 훈련일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에게 참 좋은 선물 셋을 선사하십니다.
사랑의 공동체, 평화, 그리고 희망입니다. 우리 또한 자비하신 주님께 끊임없고 한결같은 찬미와 감사의 삶으로, 평화와 희망의 배움과 훈련의 삶으로 충실히 응답하도록 합시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리는 날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31)
요한 복음서 저자가 자신의 저술 목적을 밝힌 부분이 오늘 복음 대목의 말미에 나옵니다.
이는 단순히 요한 복음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책이 지향하는 바일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피조물 중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는 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의지의 절정이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으로 표현되었지요.
하느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나는 ... 직접 보고 ...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 20,25)
이 어깃장에 가까운 항변은 단 한 번의 부재로 부활하신 스승과의 해후를 놓친 토마스의 속상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대변합니다.
사실 그도 사랑하는 주님을 얼마나 얼마나 뵙고 싶었겠습니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요한 20,29)
토마스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준엄한 꾸짖음이나 질책, 실망의 표현이 아니라 제자의 심정을 잘 아시기에 던지는 애정 어린 다독임으로 들립니다.
"네 맘 다 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온 거 아니니! 이제 됐지?"
다른 제자들 모르게 슬쩍 윙크까지 날리셨을지도 모를 정도로 사랑이 듬뿍 느껴집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오늘 토마스로 인해 촉발된 이 말씀은 사도들을 통해 전해내려온 신앙을 받아들인 우리 모두를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보고 믿는 이들" 즉 신앙의 일세대를 평가절하하시려는 의미도 아닙니다.
두 눈 시퍼렇게 뜬 채 모든 걸 목격하고도 믿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시 믿음을 선택한 이들이야말로 신앙의 영웅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신자들"(사도 2,42) 즉 믿는 이들의 생활이 나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이들은 신앙과 삶이 유리된 관습적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함께 지내고 공동으로 소유하며 빵을 떼어 나누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오직 믿음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의 지평입니다.
실질적인 구원의 삶이 태동한 것이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믿음과 구원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못박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베드 1,8-9)
영혼의 구원이 곧 믿음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육의 눈으로 만나본 적 없는 분을 영으로 감지하고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다는 증거는 바로 영혼의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교회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하느님의 자비는, 알면 알수록 믿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납니다.
그분 품으로 달아들어 숨는 자체가 곧 자비의 품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믿음의 용기입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부활 팔일 축제를 마감하며 용서와 화해의 은총이 가득한 오늘, 부족하고 죄스런 자신을 잊고 믿음으로 구원을 쟁취하는 축복의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십니다"
(화답송 참조)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모든 움직임은 그 시작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은 충전을 해야 작동합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시작을 신이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태풍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든 일의 최종 원인을 신이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필연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있어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의 시작을 신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성과 오성 그리고 감성으로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진, 선, 미는 더 높은 존재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진, 선, 미의 시작을 신이라고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야 가을에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우주의 씨를 뿌린 시작이 있는데 그 시작을 신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철학자들에게는 교과서와 같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인 신의 존재 증명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으로 깊이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선한 마음을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구름, 꽃, 산, 강, 바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에게 하느님을 닮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측은지심의 마음, 수오지심의 마음, 사양지심의 마음,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인간은 이 마음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나 더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이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높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모세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도 크시기에 이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 주셨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이 구원의 역사, 사랑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쁜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기쁜소식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기쁜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해 주셨고,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셨고, 무덤에 묻힌 지 3일이 지난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이 기쁜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새로운 권위를 보여 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멍에와 짐은 편하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둠에 빛을 주셨고,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셨고,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했던 대사제와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기쁜소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권력에 의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에 의해서, 믿었던 제자의 배반으로, 군중들의 무지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랐습니다.
무참하게 하느님의 아들이 허무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지 삼일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는 이상한 소문이 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입니다.
그 소문의 시작은 ‘빈무덤’이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서 무덤을 찾았으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으로 달려갔으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봐야만 믿겠다는 토마사도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성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앙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였고,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이 기쁜소식이 온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글을 읽다가 감명받은 구절이 있어서 소개해봅니다.
“우아한 장밋빛을 띠고 향이 달콤해 인간의 기술로는 그런 과즙을 만들어낼 수 없는 아름다운 복숭아를 생각해 봐.
하느님께서 그렇게 아름다운 빛깔을 만드시고, 그렇게 부드러운 벨벳 같은 껍질을 만드신 것이 복숭아 자체를 위한 것일까?
그것을 그렇게 달콤하게 만든 것은 복숭아를 위한 것일까?
아니야. 그건 우리를 위해서야.
복숭아 자체이고, 그 존재에 본질적인 것은 씨앗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이 글을 읽고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복숭아를 사람으로 대체하면 어떨까요?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 많은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을 자체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함께 사는 우리를 위해서이고, 결국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족에만 그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자기만족은 항상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소유/욕망’이라는 도식을 보십시오.
자기만족은 소유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소유가 크면 클수록 동시에 늘어나는 것이 욕망입니다.
결국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 노력한들 행복은 커지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욕망은 줄어듭니다.
소유가 적어도 행복해질 수 있게 됩니다.
자기만족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토록 갖고 싶던 행복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 토마스 사도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토마스 사도는 제자들의 주님 부활에 대한 증언을 믿지 못합니다.
자기가 직접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그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자기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자기만족만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함께 있던 자리에 다시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토마스를 향해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함을 통해 자기의 부족한 믿음을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면서 자기만족만을 추구합니다.
이로 인해서 더욱더 불신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그 세계에서 나와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의 삶이 함께 어우러지는 ‘함께’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셨지, “평화가 너와 함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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