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학기 (외 2편)
신용목
한 권의 사라진 책을 두 권의 사라진 책으로 만들고 복삿집 창 너머로 구름을 보았다 푸른 쓰레기통, 하늘에 던진 것 같은 내가 구긴 종이에는 모두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하루를 더 사는 일은 한 명의 사라진 나를 두 명의 사라진 나로 만드는 일이다 차임벨이 울리고 복삿집 문틈으로 빛이 쏟아졌다, 한 사람이 들어오고 한 사람이 나가고 하나의 하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빛 속을 지나가는 구름, 하나의 몸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나 매번 걸리고 만다, 차임벨 소리를 내며 멈췄을 때 바람이 하루의 덮개를 열고 사이에 낀 나를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던질 때, 원본은 잠들어 있을 것이다 가방 안에 하나의 빛이 두 개의 눈을 찌르는 복삿집, 의자에 걸어 놓은 가방 안에 들자마자 느닷없이 쏟아지는 가방 안에 이면지 같은 희망 안에 문을 열고 나오면 신호등에 걸려 있는 인파, 구겨졌다 펴지는 횡단보도 버스에는 잠든 사람들, 서자마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그러나 나는 이미 수업에 늦은 사람 학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를 세 명의 사라진 사람으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빳빳하게 다린 옷을 입고 걸었다 유리마다 빛이 지나가고, 천천히 흘러내린 구름이 어디론가 쓸려 가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나는 가방 안에 있을 것이다 슬쩍 몸을 비틀면 까맣게 타버릴 것이다 밤이 될 것이다 가방에 달린 지퍼를 길게 열고 차임벨 소리가 나를 구길 것이다
눈사람에게 공장을 돌리게 하자
검은 그림자 같다. 짙어지는 어둠 같다. 투명한 밤 같다. 편의점 간판과 유리창, 좁은 화단을 타고 저 끝까지 길게 흐르며 횡단보도 앞에 귀가자를 세워놓은 저녁 신호등처럼 비는, 겨울 공터에 눈사람을 세워놓고 봄 끝까지 길게 흘러온 것 같다. 저녁 그림자처럼 긴 하루의 끝까지 흐르는 사람. 터벅터벅, 걸으면 신호등은 금방 깜빡거리고 잠시 푸르게 물든 사람이다가 꺼지면 검은 나무 같다. 붉게 타는 잎 같다. 그림자에서 자라나는 머리카락, 헝클어진 비 같다. 번지며, 절반쯤은 이미 어둠이거나 깜빡이며 지워지는 얼굴. 나는 비에 달린 작은 손을 본 적이 있다. 낮술을 팔던 수리된 고택이었지. 일제히 쏟아지더니, 어느 순간 유리창을 붙잡고 멈춰 있었어. 끈질기게, 마치 두드리다 멈춘 것처럼. 손바닥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 비의 입술을 본 적도 있다. 길 건너 맥도날드 간판이 켜졌을 때, 비는 제 얼굴의 가장 둥근 끝에서 붉은 입술을 열고 이렇게 말했어. 눈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찾고 있다 고. 자신을 이곳까지 흘려보낸 슬픔을 찾고 있다고. 영원히 녹으며, 비에게 끝나지 않는 저녁을 입혀준 계절을 찾다가 나를 보았지. 비에게 나는 횡단보도였을까. 언제나 건너편을 가지고 있어서 잠시, 유리창 안에서 두 눈으로 깜빡이는 신호등이었을까. 푸른빛과 붉은빛. 거기 으깨어진 내 비 오는 저녁 속에서 바퀴 소리를 내며 이번 생을 굴러다니는 자동차들을 세우고 싶었을까. 귀갓길. 우산을 들고 있어도 바지는 비에 젖고, 바지가 젖으면 꼭 내 그림자가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데, 조금씩 그림자가 되어 나는 흘러온 것 같은데, 고백하지 않았어. 내가 눈사람이었다 고. 건너편을 지나 비탈 너머엔 집, 저녁을 먹고 빨래를 하고 슬픔도 없이 자고 나면 다시 공장을 돌리러 갈 시간이거든.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열아홉의 내가 자신의 미래를 보고 싶어서 삼십 년을 살았다
내 미래는 이런 거였구나, 이제 다 보았는데 돌아가서 알려주고 싶은데, 여전히 계속되는 시속 한 시간의 시간 여행을 이제 멈추고 돌아가서 알려주면, 열아홉의 나
자신 앞에 놓인 삼십 년의 시간을 살아보겠다 말할까 아니면 살지 않겠다 말할까
까만 먹지 숙제에 영어 단어 대신 써 내리던 이름과 아무렇게나 쓰러뜨린 자전거 바큇살처럼 부서지는 강물을 내려다 보며, 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끝없이 뛰어내리는 거라고
생각하던 긴긴밤으로부터
나는 겨우 하루를 살았는데, 생각 속에서 삼십 년이 지나가고 넌 그대로구나 꿈에서는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 지낸 삼 년을 다 살고 깨어나면 또 죽고
열아홉 살 다락방, 고장 난 시곗바늘을 빙빙 돌리다 바라보면 창밖은 시계에서 빠져버린 바늘처럼 툭 떨어진 어둠, 그러니까 열아홉을 떠올리는 일은 열아홉이 되는 일이 아니라 열아홉까지의 시간을 다 살게 하는데, 어둠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시곗바늘처럼
눈을 감으세요,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이미 죽어서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귀를 막으세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는 죽어서 이 이야기를 영영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어디 있나요, 두리번거리며
태어나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찾습니다 긴긴밤이라면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 잠으로는 견딜 수 없는 어둠을 발끝으로 더듬으며 죽은 사람의 생일이 지나가는 것처럼
나는 삼십 년을 살았는데, 네게는 하루가 지나갔구나 어느 날 삼십 년 후의 내 기억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열아홉 나에게 닿아서는
다락방, 시계 속 단단하게 감겨 있던 검은 태엽처럼 같은 밤을 돌고 도는 생각으로부터
나는 시작된다, 꿈의 긴 복도가 늘어선 형광등처럼 하나씩 꺼지는 아침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내 몸에서 빠져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내 몸으로 들어간다 내 몸은
내가 영원히 졸업하지 못하는 학교, 점심시간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나니 아무도 없고 리넨 커튼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낮이라는 피를 잔뜩 묻힌 톱처럼 그 빛은 짐승의 배 속에서 죽은 새끼를 꺼내듯 정오의 단단한 시간을 갈라 잠시 내 인생을 전부 보여주었지, 도굴꾼이 다 털고 간 공동묘지처럼 모든 창문이 파헤쳐진 풍경을 한칸씩 열고 안녕,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열아홉의 나에게 인사를 한다 네 얼굴 앞에서도 이상하게 나는 참을 수 없이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가만히 손을 내밀었는데 손가락이 닿자 부드러운 모래처럼 은빛 비처럼 네 얼굴이 흘러내리고, 그것이 작은 알갱이로 부서지는 네 목소리라는 것을 안 나는 말했지, 끝까지 닿을 수 없는 수평선 그것이 나를 감았다고 아름다운 것 그것이 나를 죽였다고, 끝까지 아픈 것 산수유 노란 꽃들이 공중에 속삭여놓은 목소리처럼 흩어져 있었다 말려도, 내 손가락이 너를 잃은 오후의 운동장에서 햇빛은 교문처럼 닫히고 네 목소리는 사라져 사물함 자물쇠처럼 허공에 채워진다, 그랬잖아
우린 모두 매점 앞에 내놓은 파란 의자에 앉았다 갔잖아, 그때 물속인 듯 느리게 날리던 낙엽들을 모두가 당첨되는 가을의 추첨식을 이별을 다 치렀잖아, 딸기우유 갑을 노을처럼 남기고 하루의 깊고 짙고 흔들리는 커튼 뒤로 뒷모습으로 떨어졌잖아, 저녁의 바닥에서 발견된 것은 차가운 밤뿐이지만 내 몸은 영원히 졸업하지 못하는 나의 학교, 그러나 우리의 계절이 같았을까 생각하며 혼자 등교한 마음들이 나란히 책상 줄을 맞추고 공책을 펼치면 한 명의 내가 '나는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써놓고 웃고 또 한 명의 내가 '나는 잘하고 있습니다' 써놓고 울고, 열아홉의 내가 책상 위에 걸상을 올리고 그러나 우리의 밤은 같았다고, 생각하며 스무 살의 내가 창문을 닦는다 그건 스물하나의 내가 깨고 만 창문, 바람이 운동장 모래를 들고 와 깨진 자리를 문지른다, 내 기억 속 삼십 년이 단 하루 그날을 지워내듯 단 하루 그날에 베이듯 이제 그만하자, 그 말 속에 미래가 들었는지 과거가 들었는지 몰라서 책을 펼치면,
미래는 결국 망하는데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서 절망이 있다면 과거는 이미 끝났는데 아직 죽지 않은 마음이 있어서 희망이 있다면 현재는 어디에도 없는데
어딘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살고 있다면
그런 망각에 대해서라면 비가 전한다, 바닥에 부딪쳐 빗방울은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렸어 그렇지 않고서야 흙탕물로 고여 첨벙일 리 없잖아 거기 한 바가지 보태진 구정물 같은 마음으로 아니, 허기진 짐승처럼 바닥을 핥으며 앞다퉈 하수구 속으로 뛰어들 리 없잖아 비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산은 망각의 현장을 바꾸는 거겠고, 뺨은 망각을 슬픔으로 바꾸는 귀갓길인데 아니 서른에는 뭘 했나, 서른하나가 지우고 간 서른 살 어쩌면 서른아홉이 지우고 간 마흔의 나는 간혹 지인의 졸업식을 찾아다녔네, 검은 교복으로 갈아입고 흰 꽃을 바치고 우두우두 시계에서 빠져버린 바늘처럼 하나같이 구부정히 앉아서는 술을 마셨지, 아무도 누가 시침이고 초침인지 묻지 않으며 밤낮이 돌아가는 창문을 태엽으로 바라보았지, 한 번은 사랑이었으나 나머지는 후회여서 채점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생을 복습하며, 이제 강을 버리고 페트병에 담긴 물이 삐뚤빼뚤한 책상줄처럼 환한 냉장고에서 흐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 종이컵으로 건너가는 것을 습지를 알기 위해 상 위에 쏟아지는 것을 복기하며, 그러나 그 순간 투명한 물에 담겼던 형광등 빛이 내 몸속에 들어와 책상을 긋던 도루코 칼처럼 하루를 가르고 일 년을 가르고 내 몸속에 바다를 꺼내 과학실 해부대에 핀으로 꽂아 놓은 것처럼 삽십 년 전부가 환하게 걸려 있는데
그때 알았을까, 어쩌면 내 몸은 삼십 년을 뚫어놓은 구멍이라는 것을, 어둠마저 환하게 비추는 슬픔 속에서 어쩌면 어제와 오늘을 뚫어놓은 잠처럼, 내 몸은 뾰족하게 깎은 인생으로
시간을 뚫어놓은 구멍, 그 속에서 회오리치는 사랑이 붉은 피로 돌고 있어서 연필심처럼 짧아지는 청춘을 감추려고 때로 숨었을까, 시간이 후라시를 비추며 어슬렁거리는 밤의 능선이 있어서 망각의 덤불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내 속의 아이가 깨지 않기를 그래서 울지 않기를 바랐으나, 매번 아이는 울고 다급히 아이의 입을 틀어막느라 아침마다 한 명씩 몸속의 나를 죽이고
텅 빈 구멍으로 깨어나는,
그게 내 잠이라서 꿈은 죽은 자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삶이 죽은 자들의 꿈을 보여주는 것처럼 삼십 년의 절반을 가져간 밤의 깊은 곳에 몸을 누이고, 슬픔의 학교를 여는 것 태어나지 않은 자의 생일처럼, 책상의 유언은 자신을 나무로 기억해달라는 것이 되겠지 걸상의 유언은 자신을 높은 곳으로 솟구치는 분수의 바닥이나 먼 풍경을 고스란히 앉혀놓은 전망대로 기록해달라는 것이 되겠지만 어느 날 깨어나면, 여전히 불 꺼진 교실에 줄지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겠지 한때 새들의 집성촌이었으나 거미의 생가로 남는 밤, 지평선처럼 그어진 칠판에 '자율 학습' 네 글자를 현기증으로 건네주며 밤이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시작하는 이야기, 그러나
그건 지나온 길에 모르고 흘린 빵 부스러기 같은 것, 새들이 쪼아 먹고 퍼덕이며 하늘을 온통 시리게 만들던 것 쥐들이 주워 먹고 작고 날카로운 이빨로 밤의 물컹한 몸통을 갉아내며 벌겋게 신음하게 만들던 것 어느 날, 삼십 년 후의 내 기억이 쉬는 시간 매점 앞에 나란히 모여 앉은 열아홉 머리 위에서 물들기 직전의 산수유꽃으로 바람에
이유 없이 흔들렸던 것, 긴긴밤이라면
눈을 뜨세요,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만 여태 살아서 이 이야기를 잊기 위해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귀를 여세요,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는 살아서 이 이야기를 영영 듣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잠은 망각을 잡히는 전당포라서, 우리는 꿈을 들고 가 슬픔을 바꿔 옵니다 긴긴밤이라면 그건 우리 다 모르는 이야기, 잠으로만 오를 수 있는 계단을 한 걸음씩 더듬으며 나는 당신의 다락방에서 하루를 청합니다
거기 태고가 있으나 나는 겨우 삼십 년, 하루가 지나간다
—시집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2024.7 ----------------------------- 신용목 /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