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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그리고 한북정맥.
오늘 산행지는 한북정맥 상의 백운산입니다.
보통 백운산의 유래를 보면 실제 이 산이 그런 이름을 갖게된 배경과는 달리 엉뚱한 내용으로 적어 놓은 것이 많습니다.
백(白)자 이름을 가진 산 이름
정상석 뒷면을 본다. ‘흰구름이 봉우리에 걸리고....’
“형. 이거 아주 웃기는데. 마치 백두산 얘기 같네. 산이 높아 사시사철 정상부가 눈에 덮여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됐다는.”
일반인들도 사실 백운산하면 흰 ‘백(白)’자에 구름 ‘운(雲)’자를 쓰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기는 하다.
“일반적으로 그렇게들 이해를 하지. 근데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형도 알잖아. 형같이 열렬한 육당 팬인 사람이.”
“ᄇᆞᆰ‘사상 얘기하려는 거야? 좀 들어보자. 사실 불함문화론에 대해서 아직 정리가 잘 안 되서 말이야.”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하던 육당은 그 유명한 ‘독립선언문’ 작성으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21. 10. 18. 가출옥을 한다. 가출옥이란 곧 ‘회유’의 다른 말이었다. 그는 1925년 ‘불함문화론’을 내놓는다. ‘불함’이란 ‘ᄇᆞᆰ’ 즉 광명, 하늘, 신(神), 태양을 뜻하는 말이다. 육당은 단군사상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천신숭배사상 즉 ‘ᄇᆞᆰ사상’이 고대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다고 주장했다. 이 ᄇᆞᆰ사상의 ‘ᄇᆞᆰ’의 한자어가 바로 ‘백(白)’이라는 논지다.
그러면서 이 ‘백(白)’자 계열의 땅 이름 중 가장 먼저 지목한 곳이 바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인 것이다. 즉 애당초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3,000명의 무리를 데리고 내려온 곳이 바로 태백산(太白山)이고 이 태백산이 바로 백두산(白頭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백두산의 원래 이름은 ‘ᄇᆞᆰ뫼’나 혹은 그 비슷한 이름이 한자어가 들어오면서 ‘ᄇᆞᆰ’에 존경 혹은 우두머리의 의미를 내포한 두(頭)를 붙여 백두산이 되었을 것이라는 거다.
“그래.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사상은 좀 알아줘야해. 그리고 예로부터 각 부족은 이렇게 자신들 고유의 신격화 된 산 즉 ᄇᆞᆰ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 그 부족들이 통폐합 되는 과정에서 이 ‘ᄇᆞᆰ산’ 서열의 높낮이도 결정이 됐고. 그러니 우리나라의 최고 대장인 산은 백두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거야. 물론 ‘백’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 이 ‘ᄇᆞᆰ’에 해당한다고는 볼 수가 없지만 유별나게 ‘백’자 계열의 산이름이 많다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는 거지.”
“맞아. 형. 그리고 그 ‘ᄇᆞᆰ’이 시간이 지나고 또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하게 되었는데 ‘박’, ‘발’, ‘밭’ 등이 그 예잖아. 제천 부근에 있는 박달재의 박달재도 ‘ᄇᆞᆰ(明) + 달(高, 山) + 재(岾)의 조합이라는 것이고.”
“그래. 우리가 이 대간길을 진행하다 보면 박달령이라는 고개 이름도 많이 나와. 박달령의 다른 이름인 단목령도 보게 되고. 그러니 앞으로는 ‘박달나무가 많아서 박달령이다.’라는 말은 삼가자!”
“그럼 이 백운산의 경우는 어떤 뜻인 거야?”
“그러니까 백운(白雲)은 ‘ᄇᆞᆰᄋᆞᆫ’ 혹은 ‘ᄇᆞᆰᄋᆞᆫ애’에서 왔다고 하는 견해가 있어. 곧 천계(天界)를 뜻한다는 거지. 그게 신의 세계, 신의 산이라는 뜻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司祭) 즉 남자무당을 뜻하는 ‘박수’로 되기도 하였고 여러 전형(轉形)으로 백운(白雲), 백암(白巖)이 생기게 된 것이지. 그냥 간단하게 ‘신의 산’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아. 신령스런 산이라는 거지.”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10쪽
이 정도의 산이라면 적어도 우리나라 주요 지방 곳곳에 이런 이름의 산들이 있을 법도 합니다.
서진암 삼거리에서 20분 정도 걸어 임도를 만나 여기서 우회전하면 마을이 나온다. 매점에서 좌회전을 하면 정면으로 백운산과 등구재가 보인다. 백운산이라! 우리나라에는 백운산이 참 많기도 하다. 지리산만 해도 저 백운산과 백두대간상의 함양 백운산1279m, 광양에 있는 호남정맥 상의 백운산1228m 그리고 7구간 정도에 지날 백운계곡의 백운산516m 등 4개나 있다. 신성한 산이기 때문이다.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99쪽
위에 열거한 백운산 말고도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한북정맥 상의 백운산903m, 섬강지맥(신산경표 상으로는 백운지맥) 상의 백운산1086m, 옥동지맥(신산경표 상으로는 두위지맥)의 백운산1427m 등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굵직굵직한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북정맥漢北正脈.....
이름 그대로 한강 이북에 있는 산줄기입니다.
○ 한북정맥
북쪽으로 임진강 남쪽으로 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백봉에서 시작한 한북정맥은 백암산1,110m, 법수령을 지나 휴전선 가까운 오성산1,062m, 철책 넘어 대성산으로 이어진다. 포천 백운산904m, 운악산936m, 서울 도봉 · 삼각산837m, 고봉산208m 등을 지나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 지점인 교하의 장명산102m에서 끝난다.
그런데 이 한북정맥은 당연히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합수점에서 끝나야 함에도 억지로 도성이 있는 한양 부근으로 끌어들이다 보니 산자분수령에 어긋나는 모양이 되었다. 논란이 많은 대목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482쪽
한북정맥의 끝자락에 대해서는 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복잡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도 말이 나왔으니 간단하게나마 살펴볼까요?
더욱이 이글을 작성하는 지금 이 시간 해밀의 정맥팀이 한북정맥 출정식과 제1구간을 진행하기 위해서 수피령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먼저 이 한북정맥을 보기에 앞서 산경표를 봅니다.
이 한북정맥이라는 이름은 산경표에 나온 명칭 그대로입니다.
이제 드디어 산경표다.
“산경표를 처음 잡았을 때 그 놀라움과 설렘은 실로 컸습니다. 한편 화끈 달아오르는 수치심을 어찌 할 수 없었고 온몸을 덮어 오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마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한글 산경표’의 저자 현진상이 산경표를 처음 대할 때의 심경이다.
산경표(山經表)가 뭘까? 그렇다. 말 그대로 산길 즉 산줄기를 나타낸 표다. 곧 산의 시작과 끝을 순서대로 나열해 준 표다. 그런데 그 표는 단절이 없이 즉 물을 건넘이 없이 산 ~ 산 ~ 산을 잇는, 이어주는 표인 것이다.
즉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산지 인식체계를 표로 만들어 놓은 책이 바로 산경표다. 그러니 산경표는 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한 장 한 장의 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귀하고 소중한 보배가 한때는 우리 곁을 떠났었다. 하마터면 그것을 찾지 못하여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날 뻔 했을 지도 몰랐었다. 우리의 무지와 게으름 그리고 그 무서운 식민지 교육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식민지교육이 무엇인가? 사람이 아니라 노예를 만드는 교육. 적(敵)을 태어날 때부터 무기력하게 만드는 교육. 어린 청년의 기개를 미리 꺾고 패배주의를 심어주는 교육. 압제에 굴종하는 인간형을 만드는 교육. 뼛속까지 충성스러운 친일파를 만드는 교육. 그게 식민지 교육 아닌가?
그 식민지교육을 받느라 잠시 우리 곁을 떠났던 산경표. 그것이 뭐기에 그리도 소중하여 우리는 그것을 신줏단지 같이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필자는 이를 우리 민족 특유의 ‘산악숭배사상’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멀리는 환웅이 백두산으로 내려왔을 때부터 가깝게는 어제 우리 동네 뒷산을 다녀올 때까지 우리는 매일 산을 보고 산에 오르며, 산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산에 대한 외경심(畏敬心). 이 단어로는 부족할까? 필자의 생각에는 이 마음이 우리 민족이 산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산경표가 무엇인지는 조선광문회에서 발간한 ‘영인본(影印本) 산경표’의 해제를 보면 알 수 있다.
- 졸저 전게서 365쪽 이하
한편 이 산경표의 저자에 대해서 논의가 있습니다.
즉 이 산경표의 저자가 여암 신경준이냐, 아니냐는 것이죠.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
옛날 책이 언제 펴냈는가를 파악하는 기준은 지질, 활자, 편집, 제본 방식 등 여러 가지를 보고 추정을 한다. 그렇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책의 내용에서 시대상을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조선광문회본에서 여지고는 신경준이 편찬한 것이라고 했다. 반대해석을 하자면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저자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찬자(撰者) 미고(未考)”라고 하여 “편찬자를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이제 ‘산경표’의 내용 중 중요한 사항 몇 가지와 관련 문헌들을 조석필의 분석을 참고하여 좀 더 세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⓵산경표를 처음 발견한 이우형은 문헌비고를 원전으로 본다. 즉 신경준이 문헌비고의 산경표를 집필한 내용을 가지고 누군가가 집필한 것이며 편찬 시기는 순조가 즉위한 1800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동국문헌비고가 1770년 편찬된 거라고 했으니 30년 정도 더 있다가 나온 책이 산경표라는 것이다.
⓶이에 박용수는 여지편람(輿地便覽)의 산경표를 원전으로 본다. 여지편람? 또 골머리 아프게 책 이름이 하나 더 나온다. 그래 여지편람은 또 뭔가? 지난 번 잠깐 봤었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15개로 본 것은 해동도리보의 산경표나 여지편람의 산경표 모두 같다. 다만 해동도리보의 그것이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본 반면 여지편람의 그것은 1대간 2정간 12정맥으로 봤다. 즉 여지편람의 신경표는 낙남정맥을 정간으로 본 것이다. 한편 여지편람은 1769년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들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두 책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책들의 제목이 재미있는 게 건곤(乾坤)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라는 제법 주역(周易)의 냄새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어쨌든 이 여지편람의 1부는 ‘건책(乾冊)’, 2부는 ‘곤책(坤冊)’ 이렇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 해당하는 건책은 ‘산경표’ 그리고 2부에 해당하는 곤책은 ‘거리정리표’라는 속제목이 각 붙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2부인 곤책은 볼 것도 없다. 다만 1책인 산경표만 보면 되는데 박용수는 이 건책이 산경표의 원전이며 당연히 그 편찬 시기는 1769년이라고 하는 것이다.
⓷현진상은 여러 가지를 감안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낸다. 첫째 산경표는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원전으로 하였다. 그리고 증정문헌비고도 보지 못하고 동국문헌비고만 보고 편찬된 것이다. 또한 “ **문헌비고 본문을 보면...”이라는 글에서 신경준이 산경표의 편찬자가 절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근거를 더 제시하는데, 영조의 묘호(廟號) 즉 임금이 죽은 뒤에 붙이는 이름인 ‘영종’을 제시한다. 즉 이 영종이라는 묘호를 근거로 지명을 살펴보면, 한북정맥 상에 있는 추모현은 원래 사현이었던 것을 영종45년에 개명을 한 것이라는 기록이 산경표에 나온다. 영조45년이면 1769년으로 영조는 1776년 사망하였으므로 최소한 산경표는 1776년 이후에 편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1769년 신경준이 편찬하였다고 하는 박용수의 이야기는 우선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다.
⓸학자들 중 산경표 혹은 우리 산줄기에 가장 관대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성신여대 양보경 교수는 역시 재조(在朝) 세력의 학자답게 눈을 일본으로 돌린다.
"일본 정가당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임을 밝히면서, ①내용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책이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조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나, ②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산경표와) ‘도리표’道里表(정리표)로서 ‘문헌통고’와는 체제가 다른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를 맡겼던 책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좀 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산경표에는 19세기 초에 변화된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또한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양보경 교수의 얘기는 결국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찬한 게 아니지만 여지고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얘기다.
이상으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서문과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시기 및 원전에 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보면 이우형, 현진상, 양보경의 견해가 비교적 서로 비슷한데 비해 박용수는 시기를 좀 이르게 본다.
정리하자면 필사본 산경표는 여러 권 있을 수 있다. 그러한 필사본 산경표 중 기술한 바와 같이 주목 받고 있는 두 가지 본이 규장각 소장의 ‘해동도리보’ 중의 산경표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장한 여지편람 중의 산경표다.
그리고 그 ‘산경표’는 영조 46년(1770)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순조 즉위년(1800) 경에 누군가 만든 것이며, 편자는 알 수 없지만 신경준은 확실하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에 덧붙여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서 즉 여지고나 산경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공인한 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토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 졸저 전게서 416쪽 이하
이 산경표의 골자는 결국 산자분수령입니다.
산경표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골머리 아프네. 결국 산경표의 저자는 모른다는 얘기구만. 앞으로 할 얘기는 산경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 그런 거잖아?” 머리에 쥐가 오른다.
“그렇지 아까 얘기했지? 산경표는 그 당시 조선 지리정보의 총아라고! 뭐 다 아는 내용이니까 그냥 지나가도 되지만 중요한 건 이것과 뒤에 나올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와 비교해 보는 일이야. 이런 건 지금 당장 산행을 하면서 써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니 골머리 아플 필요도 없어.”
“형, 그건 그렇고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자분수령하는데 그 산자분수령이란 말이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 혹은 스스로 분수령이다.’ 그 말 맞아? 다른 얘기도 있던데.”
장감독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고 언젠가 해줘야 할 말이었기 때문에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래. 맞아. 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문구는 대동여지도 발문에 나오는 말이야. 그리고 처음에는 나도 그걸 그렇게 이해했었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산경표는 당연히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이다. 그리고 우리는 산경표의 대원칙은 ‘산자분수령’이라고 알고 있다. 그 산자분수령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짐작컨대 대동여지도다. 대동여지도의 발문에 보면 바로 그 구절이 나온다.
한 번 읽어 보자.
東史曰 朝鮮音潮仙 因仙水爲名 又云鮮明也 地在東表日先明 故曰朝鮮
‘동사’에 이르기를 조선(潮仙)이라 소리나는 ‘朝鮮’은 선수(仙水)로 말미암아 이름을 삼음이요 또한 이르기를 선명(鮮明)한 것이라, 땅이 동쪽에 있어 해가 뜰 때 먼저 밝아오므로 조선이라 한다 하였다.
山經云 崑崙一枝 行大漠之南東 爲醫巫閭山 自此大斷 爲遼東之野
‘산해경’에 이르기를 곤륜의 한 갈래가 대막(넓은 사막)의 남동으로 가 의무려산이 되고 이로부터 크게 끊어져 요동 벌판이 되었다.
漉野起爲白頭山 爲朝鮮山脈之祖 山有三層 高二百里 橫亘千里 其巓有潭 名謂達門 周八百里 南流爲鴨綠 東分爲豆滿
마른 벌이 일어나 백두산이 되니 조선산맥의 시조다. 산은 셋으로 층졌는데 높이는 200리, 가로는 1000리에 걸쳐 있으며, 그 산꼭대기에는 못이 있어 이름은 달문이라 하고 둘레는 800리이며, 남으로 흘러 압록이 되고 동으로 나뉘어 두만이 된다.
山自分水嶺 南北逶迤 爲燕脂峰小白山雪寒等嶺 鐵嶺一枝 東南走起 爲道峰三角 而漢水經其中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남북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연지봉 소백산 설한 등의 재가 되고, 철령의 한 갈래가 동과 남으로 달려 일어나 도봉과 삼각이 되니 한수가 그 가운데를 지난다.
위에서 보다시피 山自分水嶺은 ‘산은 분수령으로부터’라는 뜻으로 읽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산자분수령 즉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대원칙이 무너지게 된다.
어떻게 해야 될까?
사실 지리학자들은 산자분수령은 진리가 아니고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라고 했다. 즉 그들은 그 예로 선행하천(先行河川)을 든다. 이것은 융기축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하천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간단한데 생각하는 관점만 다르다. 조금 더 있으면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일단 맛만 보고 넘어가자면 지형학적으로 산맥이란 습곡, 요곡 혹은 경동지괴 운동 등 융기 축이 형성되어 계속 융기함으로서 산맥이 형성된다. 이걸 뭐 1차 산맥이라고도 하나본데 이것도 융기산맥과 단층산맥 두 가지로 나눈다고 한다.
그 다음이 2차 산맥으로 이는 암석의 경연(硬軟) 즉 단단하거나 무른 것들이 대상배열(帶狀配列) 즉 좁고 길게 띠 같이 되어 있을 때 무른 지대는 침식되어 낮아졌으나 단단한 부분은 침식에 강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로 남아 있어 산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때 융기 축 혹은 대상배열을 가로 질러 흐르는 선행하천이 있으면 이 하천은 산맥을 절단하고 흐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자분수령을 이야기할 때 입에 침이 튀면서까지 떠들던 얘기가 뭔가? 바로 차령산맥이 한강을 건너고 광주산맥이 한강을 어떻게 지날 수 있냐고 떠들었잖은가? 그런데 ‘산맥파’는 즉 지리학계에서는 팔짱을 낀 채 “니들이 뭘 알아!”했던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게 바로 이 2차산맥이다. 이 2차산맥으로 형성된 게 바로 우리나라의 산줄기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1차산맥이 그 삭박과정을 거쳐 2차산맥이 형성이 되었고 지금도 삭박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게 바로 지금의 우리나라 산줄기 아니냐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따지자는 얘기다. 그게 현재의 백두대간이고 정맥이며 기맥이며, 지맥이니까....
일반적으로 습곡이나 경동지괴 운동의 융기량은 1년에 mm 단위로 융기한다고 한다. 태백산맥 축도 년 0.1mm도 채 안 되는 융기량이라 한다. 글쎄 이 얘기도 웃기는 얘기다. 학자들이 얘기하는 태백산맥의 경우 신생대 3기에 동해 해저지각이 확장되면서 융기가 일어나 태백산맥이 형성되었다는 것인데 그 당시 태백산맥의 높이가 자못 궁금하다.
신생대 초기 한반도는 준평원 상태였는데 신생대 중신세부터 일어난 그 융기가 지금도 매해 0.1mm씩 융기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5,000만 년 전 정도가 되니 50,000,000 × 0.1mm = 5,000,000mm 그러니까 5,000m 정도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여기는 처음 융기된 높이는 제외하고 그렇다. 물론 그 긴 세월동안 삭박에 의한 것도 넣어야 하지만.
사실 필자도 노인봉 산장지기 성량수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버리고 노인봉으로 들어와서는 태백산맥 동계 단독종주, 국토해변일주 등 남다른 행각을 벌이던 그가 차령산맥 종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단독으로 산맥 종주에 나선 적이 있었다. 노인봉을 출발 두로봉 ~ 비로봉 ~ 호령봉을 지나 계방산 ~ 용문산 그리고 청계산656m을 지나 양평 두물머리에 도착했는데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왔어.”라는 일화는 이미 전설이 되어 버렸다.
사실 그때는 산경표를 몰랐었으니까 그런 말이 가능했다. 산맥은 ‘산산산’이었지 분수계니 산자분수령이니 뭐니 하는 말을 몰랐었을 때니까. 산경표의 정당성을 이야기 할 때 단골 메뉴처럼 떠들던 얘기였다.
어쨌든 그 차령산맥이 몇 천만년을 지나면서 원래 준평원이던 한반도에 남한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태백산맥이 융기하면서 차령산맥 북쪽과 남쪽의 대보화강암은 쉽게 침식되어 낮아지고 변성암으로 구성된 부분은 높은 산지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하천인 남한강이 비록 절단하고 있어도 차령산맥은 차별침식에 의해 만들어진 연속된 산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럴 때 일수록 우린 화가 난다. “학교 다닐 때 지구과학 공부 좀 많이 해둘 걸.”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게 지구과학 과목이 아니고 한국지리 과목이라는 게 더 화가 난다. 교육이란 게 이렇게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쨌든 학자들은 산자분수령에 대해서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분노하고 싶은가?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뒤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우선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산자분수령.
절대적인 개념이라고. 지금도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산줄기에서 다른 하나의 산줄기를 가지 칠 때 분명 그 사이에서는 골이 형성되고 그 골에는 물이 생겨 그 물은 내려오면서 천이 되고 그 천들이 모여 강이 되어 바다로 가지 않는가?
그리고 그 천이 합칠 때 반드시 하나의 크던 작던 산줄기 하나가 그 합수점으로 잠기는 것을 보지 못했던가? 즉 그 산줄기는 천이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을 만나면서 그 맥을 다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두 물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적어도 5,000만 년 정도는 진리였다. 움직이지 않는 진리.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라는 문장도 진리다. 하지만 앞으로 1억 년 뒤에는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山自分水嶺은 “분수령으로부터 오는 산은....”이라고 해석하여야 한다며?
맞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문장 속에 들어 있는 걸 해석할 때 그렇고 우리가 얘기하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관용구(慣用句)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자분수령을 두 가지로 읽었다고 보면 된다.
관용구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관용적으로 둘 이상의 단어가 결합하여 특정한 뜻을 나타내는 언어 형태. 흔히 비문법적이거나 문법적이더라도 구성 요소의 결합만으로 전체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山自分水嶺을 얘기할 때 ‘분수령(分水嶺)’이라는 것을 고유명사로 인식하지 않고 보통명사로 이해하는 것이다.
필자만 그런가? 다들 그렇게 이해했던 거 아닌가?
또 다른 견해를 보자. 대동여지도 숭실대 본을 보면 ‘東分爲豆滿江 自分水嶺’이 되어 강자분수령이 된다. 위의 다른 대동여지도를 보면 분수령에서 물이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분수령이라는 지명이 물을 나누는 산줄기(고개)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므로 이도 크게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山自分水嶺은 이따 산맥을 이야기할 때 또 이야기해야 하니 여기서는 이쯤에서 그만 두자.
-졸저 전게서 455쪽
사설이 길었습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북쪽으로는 임진강, 남쪽으로는 한강의 분수령이 되는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식계산 백봉에서 시작하여 백암산1,110m, 법수령을 지나 휴전선 가까운 오성산1,062m, 철책 넘어 대성산으로 이어져 그러고는 남한 구간은 수피령에서 시작하여 포천 백운산904m, 운악산936m, 서울 도봉 · 삼각산837m, 고봉산208m 등을 지나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 지점인 교하의 장명산102m에서 끝난다고 산경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북정맥의 개념도를 봅니다.
위 개념도의 보라색 선이 산경표 상의 한북정맥 산줄기입니다.
그런데 위 개념도에서 명백하듯 위 정맥의 끝은 공릉천입니다.
이는 위에서 얘기한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한북정맥은 이름이 말해주듯 한강이 끝나는 곳 즉 한강과 서해 바다와의 합수점 혹은 자신의 울타리인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마무리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붉은선이 그것을 말해주며 그 끝은 이 산줄기의 북쪽 울타리인 임진강과의 합수점인 오두산110m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산경표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개념만을 제시해 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즉 산경표를 만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유교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때여서 모든 산줄기는 도성을 지나가게끔 그렸던 것이니 한북정맥은 반드시 임금이 살고 있는 한양을 지나가야 했고 그러다 보니 한강봉475m에서 앵무봉621m으로 가는 줄기를 도봉산으로 끌어당기게 됐고 그 결과 공릉천이 있는 장령산에서 한북정맥이 마무리 되는 우愚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예는 금북정맥이나 낙남정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백제의 고도 부여를 지나게 하거나 가야의 도읍지 김해를 지나게 그었다는 겁니다.
이 정도까지만 보죠.
경기도 북서부의 끝 포천.
거기서도 다시 북서부로 더 진행하여 포천의 끝 광덕고개로 가는 길은 거리는 짧으나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예정 시간보다 13분 정도 늦은 09:43에 도착합니다.
포천은 이름 그대로 내川를 많이 품은抱 고을이니 산도 많고 물도 많은 동네입니다.
날머리인 흥룡사의 백운교를 보고 유격장을 지나면서 예의 꾸불꾸불한 고개를 오릅니다.
카라멜 고개로도 불리지만 일단은 광덕고개廣德峴입니다.
바로 북쪽에 있는 한북정맥 상의 광덕산1044m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기상관측소가 있는 광덕산은 산경학에서는 아주 중요한 봉우리입니다.
여기서 영평지맥(신산경표 상으로는 명성지맥)이 분기하기 때문이죠.
그 얘기는 곧 이 광덕산에서 지맥이 분기하면서 발원시키는 물줄기가 곧 영평천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물은 다 이 영평천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러고는 그 물은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인 한탄강으로 흡수되니 이 영평천과 한탄강의 합수점에서 위 영평지맥은 그 맥을 다하게 됩니다.
지도 #1
광덕산에서 내려오는 등로 즉 정맥길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오는 광덕고개입니다.
정맥을 할 때 첫 구간 날머리와 두 번 째 구간 들머리로 각 한 번.
영평지맥과 상해단맥을 할 때 각 한 번씩.
가평지맥(신상경표 상으로는 화악지맥)을 할 때 한 번.
번암단맥을 할 때 한 번 등 6번을 왔던 곳이니 이번이 일곱번 째 광덕고개 방문입니다.
좌측은 포천시 이동면 우측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10:00
기념 촬영을 마치고 백운산을 향하여 오릅니다.
많이 발전했습니다.
포천시에서 한북정맥도 다 알고....
홍보 잘 하세요.
이정목과 안내도 똑바로 해놓으시고......
뒤에서 홀가분 대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천천히 걷습니다.
이제는 낡은 안내판이 되었고.....
761.8봉을 오르려 된비알을 치고 있는 대원들.
하지만 이 광덕고개 즉 광덕현이 해발638..4m 임에 비추어 보면 그리 높은 것도 아닙니다.
우측으로 잠시 조망이 트입니다.
바로 앞이 조금 전 광덕고개에서 올라온 정맥 줄기.
우측이 중앙이 회목현 그리고 그 좌측 봉우리가 상해봉1024m.
회목현 우측으로 조금 더 가면 463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하오현이고 그곳이 해밀 정맥팀의 1구간 날머리이기도 합니다.
그 좌측 중앙 구름에 살짝 가린 시설물이 '광덕산 기상관측소' 그리고 그 좌측 봉우리가 광덕산1044m입니다.
그러니 그 광덕산 우측 능선이 한북정맥이고 그 좌측 능선이 영평지맥이 되는 것입니다.
10:24
761.8봉에 오릅니다.
포천시에서 제작한 이정목.
땀이 무지 납니다.
9월이 오는 것에 불평을 하나요?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립니다.
가느다란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흩날립니다.
프란체스카가 킨케이드를 위해 뿌린 '바람의 노래'가 바로 이 냄새일 듯 싶습니다.
10:42
군 시설 중 호 하나가 보입니다.
한북정맥이 갖는 특징 중 하나.
아무래도 북쪽 최전방인 관계로 군시설이 자주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남자대원들의 대화의 중심도 '군 생활'로 옮겨지게 되고.....
이건 화천군에서 제작한 이정목.
거리 표시가 포천시 것과 차이가 나 혼란을 줍니다.
10:53
865.2봉으로 오르는 된비알.
고도를 상당히 높입니다.
10:55
865.2봉으로 오르고....
11:13
그러고는 백운산 정상입니다.
2등급삼각점(갈말27)이 박혀 있는 이 백운산 정상은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백운산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봤고....
정상석 뒤로 갑니다.
그렇죠?
양사언의 시가 각자되어 있습니다.
정상석 후면에는 이 지역 포천 출신 문인인 봉래 양사언의 증금옹(贈琴翁)이라는 시가 적혀 있다.
원래 이 시는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에 있는 하천가의 바위에 음각되어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거의 마모되어 해독도 불가능 할 정도라고 한다.
예전에 학창 시절에 고문시간에 배운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에 관한 고사성어인 백아절현(伯牙絶絃)과 지음(知音)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삼각봉으로 향한다
- 2009. 9. 27. 한북정맥 2구간 졸고
3년이 지난뒤 유백아는 당지에서 명성 높은 연주가가 되였지만 예술적으로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인하여 고민하였다.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스승 성연은 그에게 “나는 이미 나의 전부의 기예를 자네에게 가르쳤고 자네 또한 잘 소화시켰다. 음악의 감수성과 이해에 있어서는 나 자신도 아직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스승 방자춘(方子春)은 뛰어난 연주가로서 음악에 대해 독특한 감수성을 지닌 분이다. 그 분은 지금 동해의 한 섬에 살고 있는데 자네를 그 분한테 데리고 가서 계속 가르침을 받도록 하고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고 물었다. 그말을 듣고 유백아는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용품과 먹을 것을 충분히 챙겨 가지고 배를 타고 동해를 향해 떠났다. 배가 동해의 봉래산에 이르자 스승 성연이 백아에게 “ 내가 가서 스승님을 모시고 곧 돌아 올테니 자네는 봉래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게나” 라고 말하고는 배를 몰고 떠났다. 며칠이 지나도 스승이 돌아오지 않자 유백아는 몹시 상심하였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세차게 일고 머리 돌려 섬을 바라보니 삼림은 고요한데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는 구슬픈 노래와도 같았다. 순간 유백아는 감개가 일고 영감이 떠올라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하고 나서 즉흥곡을 연주하였다. 그의 연주는 슬프고 애절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유백아의 연주는 한단계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기실 성연 스승은 의도적으로 유백아가 혼자서 대자연 속에서 일종의 감수성을 터득하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외로운 섬에서 매일 같이 바다를 동무삼고 삼림 속을 날아다니는 새들과 대화하노라니 서서히 감정의 변화를 가져오고 심령이 정화되였다. 유백아는 예술의 본질을 진정으로 터득해야만 대를 이어갈 수 있는 걸작을 창작할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후에 유백아는 뛰어난 연주가로 되기는 하였지만 그가 연주하는 곡을 흠상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유백아가 배를 타고 유람할 때였다. 배를 높은 산과 나란히 저어갈 때 갑자기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배를 산기슭에 멈추고 비가 멈추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주루룩 주루룩 내리는 비소리와 수면에 떨어지는 빗줄기가 조화를 이루어 생생한 풍경으로 한눈에 안겨왔다. 유백아는 거문고를 받쳐 들었다. 한창 거문고를 타던 유백아는 금현이 이상하게 떨림을 느꼈다. 그것은 연주가의 심령의 감응으로서 부근에서 누군가가 그의 연주를 듣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백아는 선창으로 나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 언덕 수림가에 종자기라는 나무꾼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유백아는 그를 배에 청해왔고 서로 통성명 한 후 유백아는 ”내가 당신을 위해 한곡 연주하려 하는데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종자기는 귀를 가시고 듣겠노라고 답하였다. 유백아가 즉흥으로 “고산(高山)”을 연주하자 종자기는 “얼마나 웅위로운 산인가!”하고 찬탄하였고 “유수(流水)”를 연주하자 종자기는 “얼마나 거세찬 강물인가!” 하고 감탄하였다. 유백아는 놀랍고 흥분되어 종자기에게 말하였다.”이 세상에서 당신만이 나의 마음의 소리를 알아 듣는구려. 당신이야말로 나의 지기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생사지교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유백아는 유람이 끝나면 곧 그를 찾아 보겠노라고 종자기와 약속하였다.백아가 약속대로 종자기를 찾아갔을 때 불행하게도 종자기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이 소식에 접한 유백아의 비통은 이를데 없었다. 그는 종자기의 묘소에 가서 그를 위해 그리움과 비통한 마음을 담아 한곡 연주한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나서 가장 아끼던 소중한 거문고를 종자기의 묘 앞에서 박살냈다. 그 이후로 유백아는 거문고와 인연을 끊었고 사람들은 다시는 그가 연주하는 것을 본 적 없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독도에 주의해야 합니다.
진행방향 좌측으로 들어가야 정맥길을 이어갈 수 있으며 흥룡사 방향은 직진하듯 우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봉래굴을 지나 흥룡사로 진행할 수 있게 되죠.
이 봉래굴의 봉래가 이들이 간 봉래산이이기도 하고 양사언의 호 봉래蓬萊이기도 합니다.
두 군데 모두 표지띠가 너절하게 붙어 있어 당황하기 쉬운 곳입니다.
여기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쉬었다 진행합니다.
11:59
883.6봉은 사면치기로 진행하고....
그러고는 삼각봉이라는 정상석이있는 921.0봉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안내되어 있지 않은 산이름입니다.
12:26
그러고는 우틀하면 흥룡사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있는 948.8봉입니다.
이곳 역시 조망은 없고,
다만 도마치봉이라는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도마치봉이라....
아마 한자로는 倒馬峙峰이라 쓸겁니다.
이 봉우리의 이름은 가평지맥이 시작되는 도마치에서 왔습니다.
이 도마치의 유래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보면 이웃한 철원의 명성산에 착안하여 궁예가 등장을 하며 이내 왕건이 나옵니다.
즉 궁예가 왕건의 추격에 쫓겨 도망을 하다 이곳에 이르러 말에서 떨어졌다는데서 유래하였다는 것이죠.
어디 포천시와 가평군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포천시에서는,
구정동과 도리평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 태봉국왕 궁예가 패하여 도망갈 때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며 갔다고 해서 도마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라고 적고 있는 반면 가평군에서는,
이 계곡은 마을회관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4.5㎞지점에 있으며, 적목리 용수목 삼팔교에서 강원도 경계인 도마치 고개까지를 말한다. 심산유곡에서 흘러내리는 도마치 계곡의 하천수는 전국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청정 옥수이다.
이 마을은 6.25를 전후하여 70∼8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화전정리와 함께 전 마을이 이주하였고, 분교도 있었으나 폐교되어 지금은 옛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계곡에는
대골, 무주채폭포, 용소폭포, 국망봉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강원도로 넘는 지방도 363호선의 노선 양측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가을의 정취를 더해주는 듯 하다.
대골(竹谷)은 높은 산에 자생하는 신초(神草)
대나무가 있다하여 대골이라 불리워졌고, 도마치 고개는 옛날 차도가 없을 당시 도보로 가평장을 보기보다는 사창리가 가까워 사창리 장으로 많이
다니면서 혼인도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주민들과 적목리 사람들 사이에 많이 성립되었다고 하여 도와 도의 경계를 왕래하는 고개라는 뜻으로
도마치라 하였다.
고 적고 있습니다.
전혀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여간 그 동네 인물을 끌어들이면 십중팔구 더의 다 거짓말입니다.
다른 곳은 어떨까요?
충북 음성에 있는 도마치는 "옛날 이 고개 넘머에 군량미 창고가 있어 말에 곡식을 싣고 고개를 넘어 다니는 일이 잦았는데 고개峙의 경사가 하도 심해 말馬이 미끄러져 구르는倒 일이 잦아 도마치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 유래가 각각이라는 것은 어느 것도 맞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국어학적으로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즉 이는 우리의 옛말 '두름/둠'에서 찾아야 합니다.
지금의 '두르다'의 원형이 이 '두름/둠'이라는 것입니다.
분지처럼 '주변이 산 등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곳', '우묵하고 깊숙한 곳', '땅 모양이 둥근곳' 등을 둠이라 불렀는데 이 말이 시간이 흐르면서 봉우리 자체를 부르는 말로도 쓰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이 지역에 따라 '도로'라 불리기도 했고, '두로', '도마', '두마', 두로', 더미','때미'로도 불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즉 두류는 옛 우리말 ‘두르’였다. ‘병풍처럼 크게 둘렀다’라는 의미이다. 곧 ‘큰 산줄기’라는 말로 ‘두름/ 둠’의 형태였던 것이다. 이 ‘두르〉두류’로 변천된 것에 적당하고 그럴싸한 한자 頭流를 갖다 붙인 것이다. 또한 ‘지리’는 ‘두르〉드르〉드리〉디리〉지리’의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 ‘지리’에 적당한 한자인 智異를 갖다 붙여 오늘날의 한자어 지리산(智異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지루한 산’, ‘지혜로워 지는 산’이라는 말은 삼가자.
- 졸저 전게서 32쪽
이 단어의 현재의 쓰임새가 '두루마기'나 '두메산골', '(논)두렁', '둥지'. '(변)두리' 등이 그것들이니 대강 머릿속으로 정리가 될 듯 싶습니다.
그러니 대전시 서구의 도마동이 '인근 유등천 북쪽의 산 모양이 도마뱀 처럼 생겨서 나온 이름'이라는 억지 작명에 대해서 실컷 비웃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바로 조금 전 이야기한 하오고개 즉 荷吾峴에 관해서 입니다.
이 하오고개는 안양지맥 자세히는 광청종주(광교산 ~ 청계산)를 할 때 의왕시와 성남시를 잇는 고개도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하오고개 역시 그 유래를 찾아보면 기가막힌 얘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즉 하오-현(荷吾峴)【고개】→하위고개.
그래서
하위고개를 찾아보면,
'하위-고개(何爲峴)〔하오고개.하오현【고개】예로부터
광덕리에서 명월리를 거쳐 철원군 금화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
현 광덕4리에 소재함. 고개가
길어 말고개라고도
한다.'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그나마 양호한데...
하지만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와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 사람들이 만나서 화해했다는 고개길에서 유래되어 음운변화를 거쳐 하오고개라 불리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 유래 역시 위 '둠/두름'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두름이 두루미로 불리다가 이 두루미의 한자어가 학鶴이니 학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니 그 鶴이 학고개로 불리다가 鶴 > 학고개, 하고개, 하오고개, 아우고개, 와우고개 등으로 변해 온 것으로 봐야 합니다.
재미있죠?
우틀하여 흥룡사를 따릅니다.
12:33
된비알을 조심스럽게 내려갑니다.
조망터가 나옵니다.
아!
좌측 정맥길 앞봉이 1111.3봉 일명 신로봉이라 불리는 곳.
그 바로 우측의 뾰족한 봉우리가 국망봉1167.3m.
우측의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그 이름도 아름다운 가리산774.3m.
저 가리산은 통제구역으로 되어 있어 그곳을 오르려면 철조망을 잘 피해 올라가야 합니다.
진행방향입니다.
가운데 봉우리가 향적봉783.5m.
그 뒤 좌측이 흑룡봉728.6m.
그 뒤로 보이는 372번 도로와 47번 도로 뒤의 산줄기 가운데 도로로 푹 파인 곳이 여우고개.
그러니 그 좌측이 사향산737.4m이고 그 우측이 명성산의 신삼각봉906.6m이며 명성산921.9m이니 약간 흐릿하게 보이는 곳이 바로 그 유명한 명성산 억새밭입니다.
* 원래 삼각봉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도계가 되는 곳에 위치한 봉우리로 역새밭 바로 옆에 있는 쉼터 있는 봉우리653m 를 말하는데 포천시에서는 저 '신삼각봉'의 위치에 '삼각봉'이라는 정상석 하나를 설치하였으니 머지 않아 영평지맥을 하는 산객들에게 그 이름으로 회자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영평지맥의 저 억새는 아직 제철이 아니니 그저 푸른 빛을 띄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저 영평지맥의 흐름을 운천의 전자 사격장과 관련하여 그려주니 산도사 홀가분님은 금방 이해를 하시는군요.
즉 저 영평지맥은 전차사격장 아래 능선을 따라 흐르는데 저 전차사격장 때문에 온전하게 지맥 마루금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중앙 명성산을 중심으로 그 우측의 약사령과 약사봉이 보이니 저 약사봉이 바로 장준하 선생이 누군가에 의해 된 곳이기도 하죠.
그 우측으로 툭 솟은 봉우리가 각흘봉836.8m이고 저 각흘봉 뒤로 이어지는 줄기가 바로 문혜지맥(신산경표에서는 대득지맥)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그 각흘봉 우측이 자등현이겠고 그 고갯길은 와수리로 연결이 될 것입니다.
물론 자등현 우측 능선은 바로 광덕산과 연결이 되니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저 능선이 바로 영평지맥임은 아까 얘기한 바와 같습니다.
아!
저 지맥을 혼자 거닐던 때가 그립군요.
그때는 한창이나 젊었을 땐데......
음....
아! 그런데 이쪽에서 좌측으로 박달봉820m과 중앙의 광덕산1044m 그리고 맨 우측의 상해봉1024m까지도 보이는군요.
이제 그만 갑시다.
된비알이니 조심스럽게 진행합니다.
미끄러지기 십상입니다.
12:51
바위로 우회하는구간도 나오고.....
무전기에서는 연신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월드썬 부회장님의 멘트가 들려오고....
가리산....
13:07
지도 #1의 '가'의 곳에서 직진을 합니다.
흥룡사 4.05km 방향을 따라,
13:18
향적봉으로 오르기 위함입니다.
헬기장으로 조성된 이 향적봉은 사실 그저 783.5봉에 불과하나 ,
누군가 부처님 냄새가 물씬 풍기게 향적봉이라 기둥에 적어놨습니다.
향적이란 지난 번 지리의 반야봉 묘향암이 들렀을 때 묘향암을 얘기하며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볼까요?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를 들어보면 이 묘향대가 반야봉의 묘방향에 위치해 있다거나 토끼봉卯峯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묘향대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취지로 묘방卯方과 관련된 이름이라면 당연히 卯向臺·혹은 卯向庵이라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묘향대는 妙香臺이고 妙香庵입니다.
또한 ‘지리 99팀’의 ‘엉겅퀴’님의 연구에 의하면 묘방卯方은 정동正東쪽을 가리키는데, 묘향대는 반야봉의 묘卯방향이 아니고 오히려 축丑방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찰 이름을 지을 때 방향을 보고 짓는 경우는 절대 없다는 얘기도 함께 들려줍니다.
즉 절이나 암자이름은 불교와 관련된 명칭으로 짓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죠.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다문제일인자多聞第一人者인 아난존자가 쓴 여러 경전 중 법화경은 묘법연화경의 줄여서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 여기서의 이 묘妙도 ‘오묘한, 심오한’이라는 의미로 부처님 말씀인 심오한 ‘법’을 ‘연화’를 통해 화엄 사상으로 발전시킨 ‘연화장’ 세상을 말한다고 하니 그분 얘기를 좀 더 들어봐야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묘음(妙音) 묘지(妙智) 묘관(妙觀) 묘행(妙行) 묘심(妙心) 묘향(妙香) 묘적(妙寂) 묘유(妙有) 묘각(妙覺) 묘법(妙法) 등 묘(妙)字가 자주 쓰인다. 이때 妙는 단순히 묘하다는 뜻이 아니다. ‘가장 높고 뛰어나다. 완벽하다’에 가까운 뜻이다. 妙는 불교의 공(空)사상에 바탕을 둔 말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초월한 불가사의, 구족원만(具足圓滿 *다 갖춘, 상대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전무결함)의 뜻으로 쓰이는 것으로 안다.
예를 들면, 묘지(妙智)는 그냥 지혜가 아니라 말로써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할 수도 없는 지혜, 부처의 깨달음을 억지로 이름하여 묘지(妙智)라 할 뿐이다. 그래서 묘지(妙智)는 불지(佛智)라 해도 되며, 다른 단어의 妙도 佛로 교체하여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유마경》 제10품『향적불품』에 “향적불(香積佛)이 있는 중향(衆香)세계는 모든 것이 향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나 문자설법이 아닌 묘향(妙香)으로 삼매(三昧)에 든다.”는 말이 나온다. 《아함경》에는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풍기는 향”을 묘향(妙香)이라 하였다. 그래서 묘향은 갑옷 같은 세상의 논리를 뚫고 전해지는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를 뜻하기도 한다. 물론 다른 불교 경전에도 妙香은 등장한다.
그러니 반야봉般若峯 아래 묘향대가 있고, 그 신비스럽기조차한 묘향을 타고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般若에 이르는 것이니 반야봉과 묘향대는 이름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 2019. 8. 3. 묘햠암에서 쓴 졸고 '구도의 극치' 중에서...
우틀합니다.
군인들은 타종으로 신호를 보내고 산꾼들은 저 걸로 멧선생을 쫓고...
쓰러진 채 방치된 시설물....
줄도 잡고...
조심 조심.
13:46
본부에서는 빨리 하산을 서둘러 달라는 독려 멘트가 연신 날아옵니다.
네.
알겠나이다.
안전 제일로 내려 가겠나이다.
14:10
좌측은 봉래굴 지나 백운산 오르는 길.
우리는 직진합니다.
잠시 씻고 옷도 갈아 입습니다.
좌선하기 딱 좋은 곳.
홀대장님이 묻습니다.
"행님. 저 바위 이름도 있습니까?"
"네. 현오대玄悟臺라고 하지요."
내려가면서 강산형님이나 써냐님, 토르님 등 뒤에 있는 분들 모두 함께 내려갑니다.
너무 맑은 물.
너른 반석.
옥에 티.
여기가 운악산입니까?
영평천.....
그리고 국도.
제 이름을 신고 다니시는 분.
오늘 삼겹살 파티....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임원님들 준비하시느라 너무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특히 오시지 못한 백일홍 총무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 드리고....
사모님들도 고생 많으셨구요...
우리는 먹느라 입만 고생했습니다.
수고들 하셨고 다음 산행 때 뵙겠습니다.
산행거리보다 더 긴 산행기.
읽으시면 후회하십니다.
첫댓글 광덕고개를 캬라멜 고개라고도
불리어 찾아봤더니
미군이 저고개를 넘으며 캬라멜을
먹어서 그리불리웠다는
개똥같은 설도~~ㅎ
미군이 저고개를넘다 오바이트하믄
오바이트고개고
통쌌으믄 똥고개..ㅋ
정맥길보다
흑룡봉으로 가는길에 볼께 많지요~
아니 어느간띵이 부운넘이
감히 형님존함을
냄새나는 발밑에 깔고 다닌답니꺄~ㅋㅋ
태화.
진양.
말표.
국제.
등등 많았는데~
로얄티도 안 내고 말입니다.
건방진 쉬키들...
@현오 그러게요.
왕싸가지~^^
잘 봣슴다..어제 백운산으로 갈까 하다가 걍 신로봉으로...
신로봉과 국망봉을 볼 때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선배님이셨군요.
이번 주 설악드시던데 행선지는 저희랑 다르시겠죠?
그게 아니고 고개를 넘던 미군 장성이 한국군 운전병에게 졸지말라고 계속 캬라멜을 까서 입에 넣어줬다는 야그가...
아~
그런거 였군요ㅎ
산세가 험하니 여차하믄..
설악가시더군요. 버스에서 뵙겠습니다.
유격장에서 뒹굴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당시에는 도로 옆 계곡이 그야말로 신선들이 사는 곳 처럼 좋았었는데...
그 유격장 담밖에서 봐도 천혜의 요새던데...우리 맹호부대 유격장인 운악산보다 더 멋진 곳!
한북정맥을 오랫만에 다시 봅니다.내려오신 산줄기는 홀산에서 여름 야유회를 하느라 갔던 길하고 겹쳐보이네요.
덕분에 주변 산과 더불어서 잘 감상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