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연약한 부분이 있듯이 내게도 자주 넘어지는 부분이 있다. 사람의 약점을
잘 보고 판단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실수나 잘못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난다.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내 마음에 걸렸다. 더 이상 참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객관적으로 보거나 도덕적인 면에서 봐도 그건 엄연한 잘못이고
질서를 어겼다고 생각했다.
시편 82편 묵상을 하는데 하나님이 재판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나왔다.
우리 사람은 ‘불공평한 판단’을 한다고 했다. 내가 옳은 것처럼 보여도 내 판단은 옳은 게
아니라 불공평한 판단이다. 공평한 재판과 심판을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새벽기도 때 나는 주님께 여쭈었다. 자꾸 사람들의 결점이 보여 힘들다며 말씀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이 말씀을 주셨다. 요한복음 8장 6절이 떠올랐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서 데려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장면이다.
나도 바리새인처럼 사람들을 볼 때 ‘고발할 조건’을 찾고 있었다. 돌을 집어 들고 간음한
여인을 향해 던지려 했다. 바리새인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었다.
나는 주님께 다시 여쭈었다. “주님, 그러면 그 사람이 죄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질서를
따르지 않고 잘못했잖아요. 분별을 해야지요?”
그러자 마음속 감동이 왔다. “내가 간음한 여인에게 죄가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했다. 죄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나와 예수님의 관점의 차이가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셨다. 죄를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죄를 용납하고 품으라는 뜻이
아니고, 죄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과거의 죄만 보고
자꾸 정죄를 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사랑의 마음으로 그가 죄에서 자유하게 될
미래적인 관점으로 대하고 계셨다. 곧 바리새인은 과거의 죄를 보고 정죄했다면,
예수님은 미래에 소망을 두고 영혼을 품으셨다.
“오! 주여 맞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용납하는 게 아니라 그가 성숙하도록 위해서
기도해야하는군요. 죄송해요. 이 부족한 자를 자꾸 가르쳐주시고, 고쳐주소서.”
연약한 부분을 감싸주지 못하고 함부로 정죄한 것을 회개했다.
♥☺♥☺♥가족편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