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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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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영광기행3) 백제불교최초 도래지 영광 법성포(1/2)
현림 추천 0 조회 246 18.11.07 21:4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영광기행3) 백제불교최초 도래지 영광 법성포(1/2)


두륜산 기행을 끝냈고 영광으로 향했다. 백제 불교 최초 가람이라 일컫는 불갑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영광에 다다르니 날은 이미 저물고 어둠이 시야를 가린다.

영광에 왔으니 영광의 명물 영광굴비를 맛보고 가야 한다기에

한 음식점을 들러 식사를 한 후 모텔을 찾아 들어가니

영광을 소개하는 책자가 카운터에 있어 보았더니 <백제불교최초도래지>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 아직 여명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불갑사를 들러보고 바로 귀경해야겠기에

서둘러 모텔을 빠져나와 <백제불교최도래지>로 향했다.

이른 아침 내비게이터에만 의존하고 갔더니 후문 쪽이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있어 편하게 올라갔지만, 백제불교도래지는 현재 보수 공수가 한창이었다.


법성포의 포구에서 마을 뒤편을 두르고 있는 능선을 바라보면

지평선에 가로로 길게 조성된 수림대를 볼 수 있다. 바로 영광의 명소인 법성진 숲쟁이.

고려 시대 이래 전라도에서 가장 번창한 포구였던 법성포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인의산 자락의 잘록한 능선과 법성진성(法聖鎭城) 위에 조성된 숲으로

 느티나무군락지가 유명하며 현재 국가지정 명승지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법성사가 있고 그 맞은 편에 위령탑이 있으며

그 아래 좌측으로 나아가면 승강기 있는 백제불교최초도래지 후문으로 연결된다.





한반도 불교 전파는 삼국시대 고구려(소수림왕 2년 전진의 왕 부견)

신라(눌리 마립간 때 묵호자)의 경우는 불교의 전래경로와 초전 법륜지가 분명하나

 백제 불교의 전래는 전해진 경로와 최초도래지가 불확실하였으나

인도의 명승 마라난타 존자가 영광의 법성포로 들어와 불법을 전하고

불갑사를 새로 세워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구전되어 왔다.

이를 근거로 1998년 영광군의 학술고증(동국대학교)을 통하여

영광 땅이 백제 불교의 최초도래지라는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다.

정확한 지명은 영광 법성포 좌우두(左右頭) 포구인데

이는 인도 승 마라난타가 A.D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파키스탄 (팍툰크와) 정부로부터 관련 유물을 기증받아

관광명소로 개발한 것이 현재의 영광 법성포의 <백제최초불교도래지> 이다.

 

@파키스탄 팍툰크와는 파키스탄 북부에 위치하며 27백만 명의 인구가 사는 지역으로

 백제 침류왕 원년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 땅에 불교를 전파한 마라난타 존자의 출생지이며

간다라 지방은 오늘날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서 대승불교의 본고장이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로 알려진 법성포는 백제 시대는 아무포(阿無浦),

고려 시대는 부용포(芙蓉浦), 조선조에는 법성포(法聖浦)로 바뀌었는데

이는 이곳에 고려 시대로부터 조창(漕倉)이 개설되어 있었던 지역이다.

 

@영광 법성포의 옛 이름인 아무포(阿無浦)는 나무아미타불의 음을 함축해서 아무포(阿無浦)라 하였으며

고려 때는 불법이 활짝 피었다는 의미의 부용포(芙蓉浦),

고려말에는 성인이 불법을 전했다는 의미에서 법성포(法聖浦),

영광(靈光)은 신령스러운 빛이 머문다고 의미에서 영광(靈光)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승강기에서 조금 내려오면 저 멀리 영광대교가 보이고 법성 포구가 보인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에 조성한 이 탑원은 탁트히바히의 주탑원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둠형의 굴안에 간다라문화의 석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런한 간다라의 석불의 양식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간다라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다 담아 보았다.



간다라 지역은 파키스탄 북부에 있는 페샤와르 지방을 말한다.

간다라 미술은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한 인도 서북부에서 5세기 무렵까지 발달한 양식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간다라 지방에 들어와 살던 그리스인들이 신의 조각상을 보고

그들의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간다라 지방의 불상의 특징은 그리스 조각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곱슬머리,

오뚝한 코, 입체적이고 굵은 옷 주름 등과 비슷하다.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간다라 미술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까지 영향을 미쳤다.

 

@간다라 미술은 부처를 인간과 같은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초기의 불교도들은 연꽃 등으로 부처를 표현하였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침공 이후 사실적인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부처를 인간의 형태로 묘사하게 되었다.

표정을 부여하였고, 복장도 현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인도의 불교 문화는 불상이 제작되기 이전

불교와 관련된 여러 상징적인 예배대상을 숭배하던 때를 무불상(無佛像) 표현시대라고 하며,

1세기경 인도의 쿠샨 시대부터 불상(佛像)표현시대라고 한다.

 

(유아의 보시)





이때에는 부처의 전생을 이야기한 본생담이나 일생의 여러 중요한 사건과

그 가르침을 알리는 불전도(佛傳圖)가 회화나 조각으로 표현되었으며,

불족이나 빈 의자 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 등으로

석존의 존재를 알리던 자리에 인간 모습의 부처형상이 나타난다.

당시 인도 서북부 간다라(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과

파키스탄 북서부지역) 지방에 퍼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부처의 신상 표현에 자극을 준 것으로 생각되며,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도 중북부 마투라 지방에서도 그 이전부터 전해오던

토착 신앙의 예배대상 표현의 전통 위에 불상이 출현했다.










 


간다라 불상의 특징은 소조나 회색 편마암을 주로 사용해

서구적인 불안(佛顔)에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이다.

마투라 불상은 붉은색에 흰 반점이 있는 사암질의 재료를 사용해 표정을 엄격하게 표현하고

신체묘사에서도 내면적인 정신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인도 불상은 불교 문화의 절정기인 굽타 시대에 이르면 사색적이고

 엄숙한 불안에 균형 잡힌 불신과 완벽한 조각 솜씨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불상표현이 이루어진다.

마투라 지역에서는 간다라 조각과 쿠샨 왕조부터 내려오는

마투라 조각 양식이 융합되어 일정한 굵기의 융기된 옷 주름을

 몸에 꼭 달라붙는 듯이 조각하여 신체적인 양감과 정신적인 내면성을 강조했다.








(종탑)





 반면에 사를나스 지방에서는 옷 주름 표현이 없어지고

 팽팽한 불신에 꼭 달라붙는 옷은 긴장감이 도는 조형성을 보여주며,

 불법 자체가 불상 전체에 응결된 집합체로서의 신성한 느낌을 강조했다.






(승려상)






탑원을 내려오면서 바라 본 전경


설법도


귀부인공양자


유물관인데 이른 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내부 공사 때문인지 문이 잠겨 안을 들어가 보지 못했다.







@인도 전역에는 룸비니의 석주를 비롯하여 아소카 대왕이 세웠다는 석주가 30여 개가 있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에 세운 이 석주도 이를 모방한 모양이다.

참고로 룸비니의 석주는 기원전 250년경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 왕이 이곳을 순례하고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을 하신 자리라고 해서 아소카 석주를 세워 표시해 놓았는데,

 13c 경에 불교가 망하자 모든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다행히 120~130년 전에 석주가 발견되어 이곳이 초전법륜지라는 것과

그 당시 살던 승려의 수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석주(石柱)는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

역사적으로 실존 인물임을 밝히는 주요한 근거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부처님의 탄생지로 알려진 네팔의 룸비니에 지금도 우뚝 서 있는

아소카 대왕(BC268~BC233년 즉위)의 석주에는

“hida budhe j?te S?kyamuni(여기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셨도다).”로 명기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석주에는 여기에 사는 비구, 비구니들은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며 생활하여야 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추방한다는 것과 이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세금을 면제해 준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현재 2m 정도의 기단부만 남아 있는 석주는

본래 높이 15.25m의 장대한 외양에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현장 스님의 기록에는 높이가 70척이 넘는 돌기둥이며

표면은 윤기가 나서 거울같이 모습을 비춘다.”라고 쓰여 있다.

석주 표면에 브라흐만 문자로 된 아소카 왕의 포고문은 다음과 같다.

 

상가는 누구에 의해서도 분열될 수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느 비구나 비구니가 이 상가의 화합을 깬다면,

그는 흰옷을 입고 승단에서 축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상가의 화합을 유지하는 금계이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의 정문이다. 이곳 방문은 정문에서 보면 오르는 길이고, 후문에서는 내려오는 길이 된다. 






존자정에서 바라 본 영광대교


가운데 전각이 부용루이고 그 뒤편에 사면대불이 보인다.



사면대불은 높이 27m로, 그 아래 31가지 석각을 조성하고 중심건물은 부용루다.

탑루 사면대불에는 마라난타존자, 아미타불, 관세음, 대세지보살이 부조되어 있다.










족적





<마라난타존자와 불두에 얽힌 이야기>  

마라난타는 인도의 간다라(지금은 파키스탄지역)에서 대대로 부와 영화를 대물림받고 살 수 있는

브라만 계급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연대는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출생지는 지금의 파키스탄의 초타 라호르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라난타는 나이가 들면서 브라만교 율법이 비인간적 규율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자책하면서

브라만의 엄격한 차별 잔인한 계급제도 감옥 같은 부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출가를 결심한다고 전한다  

출가 후 마라난타는 순례의 길에 올라 탁실라를 거처 페사와르, 스와트, 카라코람산맥을 넘어

실크로드에 위치한 구자국에서 구마라습을 만나 경전 번역작업을 하면서

 불교의 참뜻을 깨닫고 돈황을 거쳐 동진에 입국하여

본인이 습득한 도술과 의술에 힘입어 12년 동안 동진 왕가의 도움으로 포교 활동에 전념한다.

 

그때 백제 왕실은 근구수왕이 죽고 침루왕(3844~38511월 재위 17개월)

병마에 시달리는 개인적인 이유로 서기 3847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

마라난타를 초청 2개월 후(3849) 마라난타 46세에 백제에 입국한다.

 

동진의 수도 건업에서 양쯔강을 따라 내려와 바다로 이어져 서해를 지나야 하는 대여정은

 9월의 북서풍 풍랑을 겪어야 하는 어려운 항해였다. 순조롭게 이어지던 항해는

 3일째 지나던 날 심한 폭풍우를 만나 배를 삼킬 듯한 파도가 일어

가지고 오던 불두(佛頭)가 걱정된 마라난타는

배 밑 창고에 보관된 불두를 확인하기 위해 배창으로 내려갔는데

 불두가 부처님으로 변해 마라난타 앞에 나타나

 나를 바다에 버리면 바다가 조용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마라난타는 불두를 버릴 수가 없어 망설이는 순간 벼락같은 소리로

 빨리 바다에 던져라.”라고 하는 독촉에 부득이 불두를 바다에 던지고 말았다,

바로 바다가 잠잠해지면서 배는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두를 바다에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사흘 밤, 낮 물과 음식도 먹지 않고 불공을 드린 후

아무포(지금의 영광군 법성포)에 입항하였다.

부두에 내리는 순간 광채가 환한 불두가 눈에 들어온다,

마라난타는 가까이 가 보니, 신기하게도 그 불두는 3일 전 풍랑으로 바다에 버린 불두였다,

그 연유를 알아보니, 동이 트는 아침에 선착장에 밀려온 불두를 주민들이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불두는 서해의 순조로운 항해를 도와 마라난타가 백제에 입국하는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법성면(法聖面) 진내리(鎭內里) 925번지 벼랑 밑에 가면 난타존자(難陀尊者)

도래시(渡來時)에 모시고 왔다고 전하고 미륵불(彌勒佛)의 두상부분(頭上部分)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백제 침류왕의 도움으로 불갑사와 불회사를 창건하여 백제에 불교를 포교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그 후 간다라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 지역에서는 마라난타가 동양의 신비스러운 나라에

불교를 전래했다는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영광 법성포의 옛 이름인 아무포(阿無浦)는 나무아미타불의 음을 함축해서 아무포(阿無浦)라 하였으며

고려 때는 불법이 활짝 피었다는 의미의 부용포(芙蓉浦),

고려말에는 성인이 불법을 전했다는 의미에서 법성포(法聖浦),

영광(靈光)은 신령스러운 빛이 머문다고 의미에서 영광(靈光)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부용루라는 전각명은 여기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부용루에는 전각 안밖으로 31기의 불전도가 부조되어 있다.


























~제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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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11.08 10:57

    첫댓글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 18.11.08 12:30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나무아미타불을 함축한 아무포라고 이름부르게 된 것을 보면 나무아미타불 염불법도 함께 전해졌음을 알 수 있네요.
    중생들의 유일한 희망인 나무아미타불 염불의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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