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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는 나에게 울렁거리는 한 주였다.
업다운이 심했다. 기분이 좋았다가 급속히 우울해졌다가 슬펐다가 또 괜찮았다가....이걸 한 주 내내 반복했다.
상담가기 전날에는 심지어 혼자 담겨진 방 안에서 꺽꺽대며 울기까지 했다.
뭐가 슬픈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너무 슬퍼서 막 울었다.
어렸을 적 몇 살쯤 뒤부터는 나의 주요 정서가 '슬픔'과 '우울'이었는데, 왜인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냥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앤가부다...했을 뿐.
지속적으로 상담을 받아오면서, 내가 크게 의식하지는 못해도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중심인 '핵'이 빠진 느낌이었다. 계속 맨틀 주변의 문제들만 건드리고 있고, 뭔가 중요한 것이 한 번쯤은 건드려져야 모든게 풀릴 것만 같은...그런 느낌.
그 코어에 다가온 것 같다.
이유없이 모든 것이 마음에 안들고, 내가 쓸모없이 느껴지고, 나를 둘러싼 모든것들이 나를 착취하기만 하고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쓸쓸하고, 외롭고, 우울하고, 슬펐다.
처음으로 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상담소에 찾아갔었다. 지금 상담받는 선생님과는 다른 분이었다. 선택한 이유는, 그냥 집에서 걸어서 5분거리라는 것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큰 곳도 아니었다. 그냥 오피스텔에서 혼자 일하시는, 여자 교수님이었다.
그냥 푸근한 친구네 엄마같은 느낌이었다. 약간 개그우먼 이성미를 닮은...ㅎㅎ
그때 내 나이 25였다. 나는 지금보다 훨씬 혼란스러웠고, 아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첫번째 사회생활에서 심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너무 큰 상처를 받고 다른 아이들과 내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심각하게 들고나서, 혼자서는 도저히 답이 안나오고 이러다 말라 죽을것같아서 도움을 청한거다.
그렇게 닿은 첫번째 인연은 2년여 상담기간을 갖고 내가 재정적으로 힘든 것을 이유로 스톱했다.
선생님한테는 이제 그만 해도 괜찮을것 같다. 많이 안정을 찾았다. 이렇게 말했지만...
그 선생님은 나에게 '안심'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지금 받는 상담과 비교해보면 좀 더 얕은 느낌의 상담이었다.
그 시절 내가 지금과도 같은 상담 작업을 진행했더라면, 난 어쩌면 못견뎠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정말 너무너무 약했으니까.
상담을 접겠다고 합의하고 1년인가 2년정도가 지났나, 나는 운좋게도 다른 곳 같은 업종에서 일을 할 수가 있었고, 다행히 회사 사람들도 좋았고 동료들도 많이많이 생겨서 즐겁게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상담이 깊은 곳을 건드리지는 않았다고 하나, 나에게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안정감을 다져주긴 했었나보다. 예전과 같은 방식이긴 했지만 미묘하게 다른 느낌으로, 사회란 이런 거라는 걸 알고 시작했기 때문인건진 몰라도, 나는 비교적 흡족하게 일할 수 있었다.
어느날 그 상담선생님한테 연락이 왔다. 집 근처에서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상담사가 사적으로 이렇게 내담자였던 사람에게 연락해서 밖에서 보자고도 하나? 그리고 연락도 그간 안했었는데... 이런 마음이 들었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한번 만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스스로 스톱하겠다고 했었고, 선생님도 나를 보내주었지만 내심 계속 생각이 나셨었나보다. 과연 그 후로 잘 지내고 있을지...
나는 그때 꽤 잘 지내고 있었고, 그 모습을 확인하고싶어서 한번 만나자고 하셨었던 것 같다. 의외로 개인적인 얘기들도 꽤 나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그래도 안정을 찾아서 상담을 스톱하게 했지만 간혹 궁금하셨던 것 같다. 정말 잘 버티고 있나...ㅎㅎ
나는 따뜻한 상담사를 만났었다.
그리고 나는 거의 3년을 그 직장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자친구도 만났었다. 나이가 많았다. 11살이 많았다 나보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엄청난 환희를 주기도 하고 엄청난 절망을 주기도 했다. 참 이상했다. 어느 순간에는 너무너무 좋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무서워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더없이 푸근하고 편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더없이 남같고. 결국 나는 1년여를 질질 끌다가 헤어졌다. 헤어졌다가 밑바닥을 다 보이면서 매달리기도 했다. 막 매달려서 겨우 그가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 나는 뭔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건 아닌 것 같은 그런 불안. 내 자아가 둘로 분열되는 것 같은, 엄청난 초조함과 불안감. 결국 나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에게 두 번이나 상처를 주고 말았다.
처음엔 혼자서 견뎌보려고 했다. 일에 매진해보기도 하고,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여운이 너무 길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가족을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나도 그와 저렇게 꾸리고 싶었는데 하는 생각에. 아니라는 걸 아는데 여운이 길다 못해 극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울증이 올것 같았다. 아니 이미 우울증이었다. 내 영혼은 뭔가가 빠져나간듯이 저 깊이 가라앉아 다시 떠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별의 상실감으로 상담소를 찾는다는 게 희한할지 모르지만, 나는 다시 상담을 받을 때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러나 예전 그 선생님은 그때 만났을 때 상담소 운영을 정리하고 있다고 하셨었고, 나는 그래서 다시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지금의 상담선생님을 만난 건 약 2년 반 전쯤이다.
우리 집에서 번화가로 나가는 마을버스를 자주 타는데, 왔다갔다 하면서 중간에 '분석심리상담소'라고 써있는 간판을 봐뒀던 걸 기억했다. 상담소는 무조건 가까운게 최고다. 난 멀리 왔다갔다하는게 싫다. 특히 내가 편해야 하는 곳은...
간판도 좀 허름하고 뭐 그러긴 했지만 나는 그냥 어떤 도움이라도 받고싶어서 거기로 들어갔다.
지금 이 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던 것 같다.
이전의 선생님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이전 선생님은 같이 위로해주면서 토닥토닥 달래주는 스타일이었다면 이번 선생님은 첫 인상은 좀 사무적이었다.
이 사람이 나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분은 딱 선을 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아무튼 뭔가 좀 감정적이라기보단 이성적에 가깝고 따뜻하다기보단 냉정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이런것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모르게 나를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것은 같았다. 위로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내 문제를 끌어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학파가 달랐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상담소는 굉장히 분석적이었다. '분석심리상담소'라고 써 있을때부터 느꼈어야했나.ㅎㅎ
나는 간단한 설문을 작성하고(집안 환경 등등) 지금의 선생님과 상담을 시작했다.
중간에 선생님의 권유로 웩슬러 지능검사와 몇몇 종합검사(30만원이나 했다!)를 받기도 했다.
나는 뭐든 좋으니 내 속시끄러운 마음좀 어떻게 해달라고 매달리고 싶어서 뭐든 하겠다고 했다.
아.....상담은 길고 지루했다.
처음에는 의욕적이었다. 선생님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노력했고, 나는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선생님도 중반부쯤 '히유씨는 정말 잘 따라온다~'하면서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강점이자 약점이 있었으니.
나는 머리를 참 잘 굴린다. 사람을 어떻게 하면 조종할 수 있을지도 빨리 파악하고, 이게 이런 메커니즘으로 흘러가는구나 하는 것도 빨리 알아챈다. 나에게 주어진 몇 가지 단서를 활용해서 답에 가까운 것을 도출해 내는 것도 빠른 편이다(이게 '정'답인지 주관적인건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하면 되는건지 안다. ....이것이 나를 병들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는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선생님한테는 '이렇고 이렇고 이래서 이랬던거에요'하면서 뭔가를 깨달은 듯 얘기하고 그랬지만, 그건 순전히 머리로만 알았던 것이었다. 머리로 이해한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머리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처럼 안돼'라고 하는 말이, 가슴이 움직이지 않으면 늘 분열적인 상태가 되기 때문에 머리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가 신경쓰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도 머리로 알아낸 것들을 내가 가슴으로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낸 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크고작은 사건들이 있었고, 내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니까 보인 것이었다. 나는 상담을 잘 따라가는 듯 하면서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하지만 뭔가가 나를 놓아주지 않은 느낌...그런게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큰 사건(나에게는.)을 터뜨렸고, 나는 그 이후로 엄청난 슬럼프를 겪어야 했다.
나는 게임을 레벨 3까지 진행했는데 죽어서 다시 레벨 1부터 시작해야하는 그런 상태같다고 선생님한테 말했고, 선생님은 인생에는 깊이가 있는건데 그걸 그렇게 레벨업으로 생각한단 말이에요? 하면서 나에게 인생이란 입체적이고 깊이가 있으며 복합적이다. 여지껏 쌓아온 것들은 내 안에 머물고 있다가 언젠간 상승곡선을 그릴거다....(물론 이건 내가 이해한 주관적인 느낌)하면서 조언해주었다.
상담선생님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달을 엄청난 자기비하와 더는 회복되지 못할거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보냈다. 인간관계도 다 작살난 것 같았고 나는 혼자인 것 같았고 이때는 자신감에 도취되었을 때 일을 그만두어버렸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려고 학원에 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열심히 해야 할 때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정말로 절망의 나락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걸 뭘 위해서 하고 있는거지? 재미고 없고 의욕도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학원 수업만 겨우겨우 들었다. 그나마 나는 컴퓨터를 다루거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나마 그나마 어영부영 어떻게든 따라는 가고 있었다. 학원 선생님과의 관계도 인간관계이므로 나는 그 관계에서 또 허우적댔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정말이지 엄청난 대 공황과 카오스였다. 자꾸만 내면에서는 우울하고 슬프고 절망적인 감정들만 올라오는데, 뭘 어떻게 시작하고 회복해야 할지 모르겠고, 아빠랑은 몇 달간의 엄청난 말다툼으로 사이가 영 좋지 않았고, 아빠는 삼십 넘은 다 큰 딸내미때문에 혈압올라서 병원신세를 지기도 하고,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고, 내가 날 어떻게 돌봐야 할지를 몰라서 허우적댔다. 정말 그냥 늪에 던져져서 혼자 허우적대는 꼴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전 직장 동료들도 싫어졌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인간들이 싫었다. 아 그냥 다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엄청나게 방어적이었다. 나를 우습게 볼까봐 사람들을 엄청나게 경계했고, 그래서 혼자 벽을 쌓고 지냈다. 선생님은 나의 이런 상태를 보고도 계속 진행시켰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절망할때는 적절한 위로를 해줬고, 조금 힘이 있을 때에는 객관적 사실을 찔러주었다. 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게 받아들이기 나름인데, 나의 상태에서는 반발심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했다. 선생님 앞에서는 끄덕이고는 있지만 내 내면의 아이는 '쳇, 자기가 뭘 알안다고 그래'하는 식으로 빈정대기도 했다. 이 아이에게 너무 휩쓸려 가도 문제가 된다.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현재의 성인인 내가 알아차려줘야 한다. 그 아이에게 대신 그러지 말라고는 하지 말고, 그런 마음이구나. 그냥 그렇게 알아차려 주는 것. 이게 좀 힘든부분이긴 하다.ㅎㅎ
그렇게 허우적대면서도 시간은 가서 나는 6개월 학원을 마쳤다. 포트폴리오도 허술하지만 하나 건졌다. 취업활동을 시작했고, 몇 군데 면접을 보기도 했다. 한 군데 가보고싶은 곳이 있어서 운이 좋게도 갈 수 있었다. ......3일 나갔다.ㅎㅎㅎㅎ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뭘 원하는지를 계속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회사에 나감으로써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내가 하고싶다고 내 능력이 다 되는 건 아니더란 말이다.ㅎㅎ 그 회사에서 3일이었지만 내적갈등이 많았다. 하지만 거기서 날 불러주지 않았고 거기서 일해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지금도 그렇게 목메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에게 불쾌한 어떤 경험도 내게는 내 한계를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난 그 후로 또 한 번 직업적 슬럼프를 겪었다.
내가 지망했던 것에 대해 내가 그닥 흥미도 없고 특히나 능력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마구잡이로 회사에 지원하고 있었지만, 썩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또 변덕 시작인가...생각해서 더 마음을 다잡고 해보려고 했다.
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는 내가 원했던 게 아닌거 같았다.
나는 참 내 마음을 모른다.ㅎㅎㅎ
그러던 와중에 한 군데서 또 면접콜이 왔다.
사장님이랑 나랑 둘이서만 일하게 되는 회사였는데, 학교 회지 등을 발간하는 곳이라서 딱히 크게 바쁜 것도 없고 야근도 바쁜 겨울 시즌 빼고는 거의 없을것이며 원한다면 칼퇴하고 집에 가져가서 일해도 된다는 등 최대한의 편의를 봐 주는 곳이었다.
사장님이 좀 음흉하게 생기긴 했지만...그래도 착한사람 같았다.
아무튼 내가 이쪽 경험이 없다는 것만 빼고는 나를 무지 좋게 봐 주셔서 내가 '할 수 있다'고 말만 하면 그냥 출근이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선배도 없이 나 혼자 해야하는데 왠지 선뜻 말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못할것같기도 하고...
그래서 결국 힘들것같다고 해버렸다.....사장님도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냥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 상담선생님이랑도 이 부분을 얘기했지만 선생님은 나더러 '대체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하고 물었다. 직업이 뭐? 나에게는 직업이 뭔가를 이뤄내는 수단이었나보다. 하지만 선생님은 직업은 말 그대로 생계. 재능이 있고 없고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했다. 뭘 그렇게 이루고 증명하려고 하냐면서 웃으셨다.
내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그것과는 다른 또 미묘한 뭔가를 느끼고 있어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이루고 싶어 하는 건 맞다. 상담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나의 생각과 타자인 상담선생님의 조언을 어떻게 조율해서 받아들일것이냐 하는 것인 듯 하다. 상담선생님은 나의 내면적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를 100% 알지는 못한다. 선생님이 알려줄 수 있는 부분이 따로 있고, 나는 내 안에서 그 단서들을 가지고 답을 찾아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취업도 그렇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나는 애초에 왜 전 직업을 떠나 여기까지 왔을까도 생각해봤고, 난 뭘 어떻게 살고 싶은거지를 생각했다.
아 모르겠다, 그냥 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걸 하자 하고 나를 그냥 놔뒀는데, 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오, 나름대로 못하진 않는다. 아니 쫌 잘하는것도 같다.
편집디자인 할때는 뭔가 재미도 없구 내가 능력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림은 얘기가 좀 달랐다.
애초에 나는 그림이 좋아서 내려왔는데, 왜 디자인에 묶였던 걸까? 돈벌이 때문이었다. 취업을 하자면 그림으로는 힘드니까.
쨌든 난 그래도 학원을 다닌 덕분에 손그림 말고 그래픽도 활용할 수 있게 됐고, 그렇게 되니까 또 다른 그림이 나왔다.
선생님이랑 상담을 하는데 이 얘기를 했다. 선생님은 좀 많이 걱정하는 눈치셨다.
내가 또 이리저리 옮기는 것 아닌가....나도 그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기에 좀 조심스럽다. 선생님도 그런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느낌이 있다. 내가 이거는 마구 잘하지는 않더라도 흥미를 갖고 숨쉬듯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거.
그렇게는 생각했어도 그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고는 있었다. 선생님은 직격탄을 날렸다. '절실하지 않은 거 아니에요?'
이 말이 그렇게 울렸다.
다음날 나는 큰 고민때문인지 기분이 많이 다운되어 있었고, 나는 진정 변덕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나는 절실하지 않은가 등등...많은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캐릭터디자인에 대한 강좌를 찾고 있었다.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학원도 안다니고 있었고 일자리 구하는데만 혈안이 되 있었는데, 이러다가는 둘 다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다. 일 하기 싫으면 내가 벌어둔거 더 투자해서라도 배워. 니 실력이 안된다고 생각되고 니 생각이 맞다고 판단이 들면 더 투자해. 나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해....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진짜 기가막히게도 딱 그 시점으로부터 다음주에 개강하는 클래스가 입소문 좋은 학원에서 있었다. 나는 당장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금 다니고 있다.
지금도 계속 고민중이긴 하다. 이걸로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학원은 스킬을 가르쳐 줄 뿐 진로를 확정해주지는 못한다는 거.
나도 살길을 계속해서 찾으면서 수강해야 할 거다.
그렇지만 이전 학원과는 달리 수강생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면서 수업을 듣는 방식이고, 선생님도 좋고 학원 분위기도 좋아서 뭔가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이전 편집클래스와는 달리 남의 그림을 끌어다 쓰는 게 아니라 내가 그림을 그려내는 클래스라서 더 재밌다.
나는 디자인을 배우려고 마음먹으면서 엔터테인먼트 디자인을 희망했었다. 있어보이니까. 캐릭터? 생각도 안했다. 난 원래 만화가가 꿈이었는데, 만화부에 들어가서 보니까 애들이 정말 찌질해보였다. 나도 그런 사람인건가에 충격을 받고 나는 이 길은 다시 생각을 안하겠다고 나름의 선언을 하고는 쭉 돌아서 다시 온 거다.ㅎㅎ 사람은 변하지 않나보다.ㅎㅎ
세상이 많이 변했다. 그림쟁이들은 여전히 자기 세계에서 허우적대는 면이 있지만 내가 그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개인차가 있을 거다. 나는 늘 외부에서 날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에서 모든걸 결정했기 때문에 내가 엄청나게 소외되어 있었는데, 여전히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고싶은지, 그걸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겠다.
내 가슴에서 뭔가가 움직였다고 느낀 부분이 참 희한하다고 생각되서 자탐에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왜 지난 나의 상담 히스토리를 적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스쳐지나간다. 뭔가 중심에 있던 것이 풀린 느낌이랄까?
그렇게 울렁대는 한 주를 보내고 나는 그저께 상담을 받았다.
꿈도 적어갔다.
선생님에게 정말 혼란스럽고 울렁댄 한 주였다고 얘기했다. 좋았다 나빴다를 하루간격으로 계속 반복했다고.
얘기도 어디서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막 뒤죽박죽이었다. 두서없었을거다.
막 어린 시절 생각도 많이 났었고, 성장에 관련된 영화도 많이 생각나고 보기도 하고,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이 읽어보고싶어져서 책도 빌리고, 그랬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이 구절이 갑자기 생각나서였다.
데미안을 읽은 적이 없지만, 이런 내용인지도 몰랐지만 이 구절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알고 있었다.
영화 버드맨을 봤는데 그것도 존재에 대한 이야기여서 그랬을까.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연극 대사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아'가 크게 울렸다.
자기가 딸을 낳을 때 그 곳에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장면도 기억에 남고.
많이 친했고 나를 아껴줬던 언니와 요즘 사이가 시큰둥한데 그 언니와 오랜만에 카톡을 했고 언니가 나에게 뭔가 좀 조심하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나를 다운되게 만들기도 했고, 즐겨 보는 드라마에서 주인공과 아주 친했던 친구가 이별하는 장면을 보고 막 울기도 하고(이게 그냥 슬픈장면이라 울었다기에는 뭔가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면 그게 그냥 일상적으로 처리됐고 지나가는 장면이었으니까!)....아무튼 이런 저런 것들이 있었는데 별 일 아니었지만 자꾸만 내 마음은 요동을 쳤다.
자꾸만 소격동이라는 노래가 생각났고, 계속 어릴때 생각이 났고,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 순수했던 내 어린날이 생각나고,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아이가 생각나고, 그래서 서러워서 꺽꺽대고 울게 된다고, 그런 생각과, 나는 사실 아빠가 미운게 아니라 너무 좋아하는 건데 하는 생각도 들었고.....이상했다.
이 얘기를 한시간이었는데 모두 다 해버렸다.
안할수가 없었다.
이상하다고.
다섯살에서 일곱살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고. 이게 뭔지 모르겠는데 뭔가 상실감을 느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고백이었다 나한텐.
선생님은 '상실감? 구체적으로 그게 뭐죠?'하고 물었다. 나는 순간 이게 틀린 답인가 생각했지만 내가 나를 알지 답이 어디있어 하고는 그 생각을 무시했다.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
그냥 모르겠다고...상실감같다고. 특히나 아빠에 대한 상실감같다고. 분명히 아직도 내 옆에 존재하고 있고 그런데 상실감을 왜 느꼈을까. 그냥 어느 순간 갑자기 나한테 등을 돌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내가 알던 아빠가 아닌 것 같고...갑자기 나한테 나쁘게 구는 것 같고...배신한 것 같고?
등등 나는 막 떠오르는대로 말했다. 말하면서 막 서러워서 꺽꺽댔다.ㅎㅎ
선생님은 내가 '상실감'이라고 표현한 그것을 겪으면서 아이들은 부모와 나는 다른 사람이구나를 느끼는 거라고 했다.
그 상실감을 가지고 내가 또다른 인격체로 나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상실감을 나는 다르게 채워버린 거라는 대충 그런 뉘앙스의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대개는 엄마와 겪는건데 나는 아빠랑 겪어서 그게 희한한 부분이라고. 그런데 그 상실감이 너무 일찍 왔네~너무 일찍 왔어. 그렇게 얘기했다.
어릴때 아주아주 어렸을 때 아빠가 나를 무지하게 이뻐하긴 했다. 아빠와 나 둘만의 세상이었던 것 같다. 그게 그렇게 좋았나보다.
상담할때까지는 잘 몰랐는데, 집에 돌아오면서 문득 든 생각이, 그랬다.
어릴때 아빠와 나 둘만의 세계는 완벽했고 나는 그렇게 평생 살아야지~하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는데 아빠가 나를 거부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의 의견이나 생각에 반대를 하고, 심지어는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기도 하고. 우리 아빠는 소박한 사람은 못되어서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니까. 내가 아빠를 보고 그랬듯이.
소격동에 가사가 대충 이랬다.
등밑 처마 고드름과 참새소리 예쁜 이 마을에 살거에요. 소격동을 기억하나요? 지금도 그대로 있죠.
아주 늦은 밤 하얀 눈이 왔었죠.
소복히 쌓이니 내 맘도 설렜죠.
나는 그날 밤 단 한숨도 못잤죠.
잠들면 안돼요.
눈을 뜨면 사라지죠.
이 부분이 무척 울렸던 것 같다.
내 어렸을 때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들어있는 가사라서 정말 놀랍다.
나는 아빠와 나 둘만의 파라다이스를 나도 모르게 꿈꿨었나보다.
여기선 소격동이 나와 아빠 둘 만의 파라다이스가 되는 거겠지.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하얀 눈은 뭔가가 일어났다는 걸 의미한다(내 어린 시절 마음에서).
나는 아빠와의 낙원을 꿈꾸면서 마구 설레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거다. 아마도 아빠와 나는 다른 사람인건가 하는 의구심에 대한 시작이겠지. 나는 그로부터 초긴장상태에 빠진거다. 잠을 못 잘 정도로...내가 긴장을 풀어버리면...그 낙원에 대한 꿈은 사라질테니까.
결국 나는 현실일수가 없는 그 낙원을 꿈꾸면서 살았던가보다. 하지만 아빠랑 나는 다른사람이라 자꾸 다른점이 보이고...그게 날 불안하게 만들고...나를 잃는건 또 싫고...그러니까 아빠가 나한테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혼내거나 화낼때(사실 이건 좀 애매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긴장되고 불안했던것 같다.
아...
이게 핵이었다고 생각한다.
코어를 건드렸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드니까 뭔가가 풀린 느낌이다.
어제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예전처럼 심장이 뛰지 않는다.
크게 긴장이 되지 않는다.
아빠가 맞서야할 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빠가 막 그렇게 밉지 않다.
오히려 미안하다.
그동안 아빠가 배신했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배신감에 아빠가 미웠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게 아니라 그저 나와 아빠는 다른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게 진실인 것이다.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혼내고 다르게 말한 게 아니라,
그냥 아빠가 나랑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하....
이걸 알아버리고 나니까 너무너무 미안해졌다.
되도않는 반항심도 없어졌다.
아빠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나는 내 생각이 있지만, 아빠도 아빠 생각이 있지 하는 느낌이다.
아빠 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내 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는 그저 자기 생각대로 살아갈 뿐인거다.
희한한 기분이었다.
집에 지금 엄마가 안계셔서 아빠 드실 밥을 지어놓고 나왔다.
아빠가 끼니 혼자 못챙기는 것도 짜증나고 그랬는데.
나한테는 주는것도 없으면서 바라기만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뭔가 아주 사소하고 작지만 묵직한 응어리가 풀린 느낌이다.
이건 내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같다.
서서히 외부에서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깊이 파고 들어가서 결국 움직였다.
큰 한 발을 움직인 느낌이다.
이 상태로 30년을 살았기 때문에 습관상 굳어진 버릇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겠지만,
중심부에 가장 큰 상처가 희석됐다는 건 나머지 사소한 것들이 그 영향으로 풀려나갈거라는 기분좋은 신호가 아닐까?
이 묘한 기분..
겉으로는 별로 바뀐 것이 없지만 단단했던 내면이 부드러워진 느낌.
다투고 싸우는 건 별 문제가 안된다.
소박한 것이 뭔지 약....간 알것도 같다.
작지만 큰 깨달음이었다.
항상 그 시기에 뭔가가 있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저런 내용일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희한한 경험이었고 희한한 느낌이었다.
늘 거의 다 왔다고 선생님이 그랬는데,
정말 거의 다 온 것 같다.
늘 지고 다녔던 부담감, 짐이 내려진 느낌이다.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이 사실을 알기 위해(느끼기 위해) 그렇게 오랜동안의 분석이 필요했구나.
다음 상담에서는 이 깨달음을 얘기해야지.
아직도 나는 나의 경계와 한계에 대해서는 좀 무지하지만,
가장 큰 핵심을 건드렸으니 이제 괜찮아질거야.
삶을 견디는 무게가 좀 더 가벼워질거야.
그래서 난 오늘 좀 좋다.
마음이 훨씬 가볍다.
날씨도 좋아지고,
좋다.
이제 그 높은 곳에서 인간으로 서서히 내려오겠지?ㅎㅎ
지루하고 긴 싸움이지만 이렇게 버티고 잘 해나가는 내가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또 다른 어떠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난 좋다.
좋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