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奇大升)-제영(題詠)(시를 지어 읊다)(한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
松竹蒼蒼色映關(송죽창창색영관) 송죽의 푸르른 빛 사립문에 비치니
向來幽興獨盤桓(향래유흥독반환) 깊은 흥취에 젖은 채 홀로 배회하노라
浮生蹤跡誰如意(부생종적수여의) 덧없는 인생에 뜻대로 되는 사람 얼마나 되리
留取芳盟到歲寒(유취방맹도세한) 꽃다운 맹세 간직하여 세한에 이르리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고봉집高峯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이정원님은 “우리는 봄에 새싹의 파릇함을 본다. 그 새싹이 여름에는 무성해졌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어 사라져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절기의 순환 속에서 이러한 모습은 자연스럽기만 하다.
논어에서 공자(孔子)가 ‘날이 추워진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라고 한 이후 군자들은 소나무를 더욱 사랑하였다. 추운 겨울이 되어 모든 나무가 잎이 지고 시들 때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변치 않는 지조에 비유하여 높이 평가한 것이다.
풀과 나무가 계절에 따라 생장하고 시들어 가듯 인간도 그러하다. 어린 시절 우리는 저마다 원대한 꿈을 설계하고 노력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는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현실에 떠밀려 생활하게 된다. ‘세한(歲寒)’은 시련의 시기를 비유하는 말로도 쓰이나, 세한의 소나무란 시련과 곤경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강인한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기대승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퇴계 이황과 다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주요 개념인 이기理氣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 논쟁을 벌여 성리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관점은 이후 율곡 이이 등의 기호학파畿湖學派로 계승 발전되었다.
이 시는 기대승이 몇 세 때 지은 것인지 자세하지는 않지만, 내용으로 보아 중년 이후에 과거를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던 시기에 지은 것이 아닐까 한다. 시인은 송죽의 푸르른 모습을 보고 홀로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상념에 잠긴 듯하다. 부침이 반복되는 인생사에서 애초 마음먹었던 일을 다 이룬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인도 여의치 않은 일이 많았나 보다. 그러나 어떤 시련 속에서도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다.
한겨울 소나무 하면 떠오르는 작품으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있다. 허름한 집 주위에 소나무와 잣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아주 소박한 그림이지만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그림은 김정희가 그의 제자인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 보낸 것이다. 당시 김정희는 제주도에 귀양 가 주변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공궁한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역관으로 중국을 오가던 이상적이 스승을 잊지 않고 중국에서 구한 귀한 책을 멀리 제주까지 보내주었다. 김정희는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곤궁에 처한 자신을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 주는 마음을 무척 고마워하였다. 그의 변함없는 마음을 공자가 말한 세한의 송죽에 빗대어 그림을 그려 칭송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세한의 푸르름’이란 나 자신과의 약속뿐 아니라 벗과의 신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나의 주변 사람들을 늘 변함없이 푸르른 모습으로 대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겠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기대승[奇大升, 1527 ~ 1572, 본관 행주(幸州). 자 명언(明彦). 호 고봉(高峰) ·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전남 나주(羅州) 출생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3권)을 편찬하는 등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다.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로 유명하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주서(注書)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삭직(削職)되었다가, 1567년(명종 22)에 복직되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집의(執義)가 되고,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로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다가, 1570년(선조 3) 대사성(大司成) 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후에 대사성에 복직되었는데 이듬해 부제학이 되어 사퇴하고, 1572년 다시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하여 31세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 호남의 석유(碩儒)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선학(先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 2권에 남아 있다.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1590년(선조 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요저서에는 《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盤桓(반환) : 1.어정어정 머뭇거리면서 그 자리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일. 2.어떻게 할지 결정(決定)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하는 일.
*桓(환) : 굳셀 환 1.굳세다 2.크다 3.머뭇거리다, 𣒯(동자)
*如意(여의) : 일이 뜻대로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