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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다 채워 줄 것 같다. 그 어떤 잘못이라도 가을 들녘에 담아 용서해 줄 것 같다. 마냥 풍성하기만 한 가을이다. 인간이 감정의 동물이라지만, 나이가 들수록 달라지지 않는 계절의 맛은 왜 똑같기만 할까? 바이러스에서 벗어나 조금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가을이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밝아진 표정에서 선선한 바람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피부로 느끼기엔 충분한 풍경이다.
방과후학교 수업이 진행되는 8, 9교시다. 학교를 한번 둘러보다가 눈에 딱 들어온 것이 학교 뒤, 논이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거기에다가 이름 모를 들꽃까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누군들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이곳저곳을 개념 없이 눌러댄다. 사진이 정말 환상적이다. 마치 유명한 사진작가가 된 듯 흥이 절로 난다.
쉬는 시간 길가에서 웃으며 다가온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다. 내일 있을 독서의 날 행사에서 시 낭송을 위해 자작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이다, 녀석들은 시 창작의 고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익어가는 벼를 중심으로 한 편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제목은 ‘행복’이다. 이렇게 행복한 아이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얼마 만인가? 항상 좋은 일만 있다면 좋겠다. 그렇지만 살아온 과정을 뒤돌아보면, 5분 행복하고 55분 그 과정을 위한 준비 시간이 아니던가?
앞을 바라보니, 이제는 하나하나 정리하고 준비하고 인수인계를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중간에 떠나는 직장 문화가 유행처럼 문화로 자리 잡은 시대다. 얼마 남지 않은 정년에 미안한 마음도 있다. 욕심의 끈을 놓지 못해 떠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 아닌 고민이 동반되는 시간이다.
8월 모임에서 1년 만에 떠남을 신청하신 마지막 인사말이 마음을 바늘로 찌르는 듯 아프다. 부임해서 1년 동안 기억에 남은 단어가, 아동 학대, 교권 보호, 검사, 고소, 고발, 해임, 파면 등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누군들 떠남의 공문을 복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지 않은 선생님이 없다고 했다. 정말, 나도 그래야 하는가? 소신껏 나름 교육 철학을 가지고 근무한 시간이었지만, 회의감과 박탈감을 느끼는 현실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아직은 아이들이, 학교가 기대치를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힘든 일도 행복한 일도 모두 나누며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한다. 사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대화와 소통이 되지 않는 현실은 그 방어벽이 점차 높아지기만 한다.
교육은 백 년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근시적인 태도가 더 큰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다. 숲을 이루기 위해 잔가지나 필요 없는 나무를 솎아내야 하는 아픔은 감당해야 한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서로 행복하며 손잡고 발맞추어 함께 손잡고 걸어갈 수 있는 교육공동체가 이루어지길 희망해본다. 교정을 가득 채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지켜줘야 한다.
가을, 당신이 보이는 삶이 가득하길 소망한다. 떠남보다는 열매가 풍성한 곳간이 되었으면 한다. 불확실한 미래나 아무런 노력 없이 대가를 바라는 몰염치는 멀리하자.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하며 행복 프로젝트 만들어가자. 손을 내밀자. 그리고 그 손을 잡자.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다.
노란 들녘을 동해 만난 가을이 사랑스럽다. 그 사랑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가둘 연가가 그립다.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의 이마에 머금은 한 송이 땀방울과 수고가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미소를 지어 보자. 풍성하게 자리 잡은 마음의 고향 한 언저리가 따뜻해지도록 말이다.
가을에 몸을 낮추고, 마음을 숙이고, 내가 자유로워질 때가 가장 행복하다.
시인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충북 옥천 청산 출생
시산맥 특별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
현대시문학(2022-23) 시인투데이(2021) 작품상
문화예술창작집발간수혜(2022)
시집 『하여(何如), 슴슴한 디카시에 』, 시산맥사(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