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명(趙顯命)-제석감음(除夕感吟)(섣달 그믐날 느낌이 일어 읊다)
我齒居然五五春(아치거연오오춘) 내 나이 어느새 오십 하고 또 다섯
年光欲挽奈無因(연광욕만내무인) 세월은 붙잡으려도 어찌할 도리 없네
常時惜日如今日(상시석일여금일) 평소에 가는 세월 오늘처럼 아꼈다면
未必徒爲此樣人(미필도위차양인) 분명코 지금의 이런 모습 아닐 텐데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귀록집歸鹿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이정원님은 “한 해가 시작될 때 우리는 많은 계획을 세우고 앞날에 대한 희망찬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연말이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를 하곤 한다. 그런데 계획과 후회를 반복하기는 선조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시는 조선 후기 영조시대에 영의정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조현명이 55세에 한 해를 보내며 지은 것이다. 그는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대사성, 대사헌, 한성 판윤, 예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높은 지위에 오른 그도 한 해를 보내면서 지나온 세월을 아끼지 않은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우리는 생각이 없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나이의 숫자만큼 후회를 더하는 연말을 보내왔다. 늘 연말이 되면 시인의 말과 같이 지난 세월을 오늘처럼 아꼈으면 좋았을 걸 하며 후회를 하곤 한다. 하지만 지난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그런데 지난날에 대한 회상은 잠시 묻어두고 꼭 1년 뒤의 오늘을 미리 상상해 보자. 오늘과 똑같은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난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연말 그것도 12월 31일에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월에도 할 수 있고, 3월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날을 잡아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매일 매일도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꼭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몰아서 한 해의 일을 반성한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또 지난 해와 변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이어간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는 매일 다음의 세 가지로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였다고 한다.
첫째, 남을 위하여 행한 일에 성심을 다하였는가?
둘째, 벗들과 교류하면서 성실하였던가?
셋째, 전수받은 학문을 복습하여 실천하였던가?
증자는 공자의 여러 제자 중에 영민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둔하다는 평가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성실함으로 인해 결국 공자의 도를 이은 사람이 되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난 일을 거울삼아, 현재 또는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사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역사를 쓰는 마음으로 지난날을 돌이켜 보고 내일을 계획한다면 하루하루를 신중하게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 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어김없이 연말을 향해 시계를 돌리게 된다. 나이가 많건 적건, 재산이 많건 적건, 업무가 많건 적건 간에 누구에게나 똑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누구에게는 알찬 시간이 될 것이고, 누구에게는 부질없이 허비한 시간이 될 것이다. 하루하루를 섣달 그믐날 한 해를 돌이겨 보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내년의 오늘은 분명 지금의 오늘과는 다를 것이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조현명[趙顯命, 1691~1752,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 · 녹옹(鹿翁).]-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조형(趙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고, 아버지는 도사(都事) 조인수(趙仁壽)이다.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1713년 (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 · 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 · 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 · 부제학, 이조 · 병조 ·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 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 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 · 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했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 · 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 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 · 송인영 · 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挽(만) : 당길 만 1.당기다, 잡아당기다 2. 끌다 3.말다, 말아 올리다
, 挽(동자), 輓(동자), 鋔(동자)
첫댓글 역사를 쓰는 마음으로 지난날을 돌이켜 보고 내일을 켸획한다는 말이 좋네요.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위해 노력해야 겠네요.
ㅎ, 한시가 제 이야기 같아 많이 부끄럽네요.
총무님의 배려에 깊이 감사드리고,
유쾌한 설 연휴 보내시고,
늘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가는 세월 아꼈다면 지금의 모습은 아닐 것 같다는 성현의 말씀에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겠네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 열심히........
ㅎ, 지난날 후회만 한들 소용없으니,
지기님 말씀처럼 이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배려에 깊이 감사드리고,
좋은 설 연휴 보내시고,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