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 파괴 운동
726 – 843년 사이에 비잔틴 제국에서는 성상 파괴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단순히 종교 이념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미술은 직접적으로 영향받았다. 기독교의 초기에는 기독교의 전도를 위한 이미지 차원에서 미술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미술품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미술이 미술을 떠나 문화나 사회적 관점에서 이처럼 심각한 논쟁의 대상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성상 반대론자는
성 화상을 만드는 자체가 바로 우상숭배라고 공격했다. ‘비물질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신을 물리적인 형상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데도 성상을 만드는 것은 바로 우상숭배다.
찬성론자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하여 그 너머에 있는 세계를 직관적으로(논리적으로 따지지 말고 지각되는 그 순간의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는데 (신에게 다가가는데) 성상이 필요하다.
성 화상에 대한 우상 숭배는 단순히 우상을 숭배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각지로 전파되면서 역사와 문화 전통이 다른 지역에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 자세가 다양했다. 다양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신의 실체에 대한 의견이 다양해지먼서, 이때부터 교리 논쟁이 치열해지고, 이단성을 부각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논쟁은 예수가 순순한 신이냐, 아니면 인간의 인자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느냐의 문제로 죽고, 죽이는 논쟁이 있엇다.(성 삼위일체로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처음에는 교회당이나 수도원을 장식하려는 용도로 성화상을 만들었으나 민간인 사이에 성 화상이 숭배의 대상이 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6-7세기 때에는 성화상 숭배 열기가 지나쳐서, 들고 다니는 성화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은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위협할 정도였다.
(성 화상은 성인을 그린 것이 많았다. 성 화상 숭배는 성인 숭배로 이어졌다.)
성상 파괴운동이 현안으로 떠오른 배경에는 6-8세기 경에 이슬람의 발흥도 중요 요인이 된었다. 이슬람의 영향이 즉각적으로 그리스토교에 미쳤다.
그리스도 교의 교리 논쟁이 지속하면서 이단설도 끊이지 않았다.
성공한 장군으로서 717년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위를 찬탈한 레오 3세는 730년에 칙령을 발표하여 성상으로 되어 있는 모든 종교 미술을 파괴하라고 했다.
성상파괴 운동은 기독교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로서 교황과 성직자가 나서서 성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성상 없이 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성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교회에 성상이 다시 돌아오면서 초기 기독교 미술은 중세 미술로 접어들게 된다.
첫댓글 가치관이 다르면 이렇게
소동이 일어나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