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오묘하게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오는 파스카 축제를
열렬한 믿음과 정성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와 해방으로 주님의 분노와 자비가 드러난다.>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36,14-16.19-23
그 무렵 14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이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고,
주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서 성별하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15 주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16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19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궁들을 모두 불에 태우고 값진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20 그리고 칼데아 임금은 칼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그와 그 자손들의 종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1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땅은 밀린 안식년을 다 갚을 때까지
줄곧 황폐해진 채 안식년을 지내며 일흔 해를 채울 것이다.”
2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3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제2독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2,4-10
형제 여러분, 4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10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도약: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의 필연성 이해
인간은 집과 같습니다. 집은 그 주인에 의해 정체성이 결정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는 무엇을 주인으로 삼고 삽니다. 문제는 그런 주인을 모셔 놓고 살다 보니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모든 만들어진 것의 반드시 만든 자의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계명’입니다. 자동차가 핸들과 거꾸로 움직이면 큰일입니다. 고쳐질 수 없다면 폐기 처분 되는 게 당연합니다. 인간이 창조 된 게 맞는다면 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지옥 보내느냐고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인간 답도록 당신 창조 목적인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잘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그도 십계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어야만 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장대에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들어 올려져야 하고 당신을 믿는 이들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책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평생 모은 것을 일시에 날려버릴 아들에게는 물려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높고 험준한 산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두 아들이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열 개의 비석을 찾아서 그 길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두세 개의 비석을 지난 뒤 지쳐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형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동생은 비석에 새긴 글씨가 옅어지는 것을 눈치챕니다. 아버지는 자신들을 위해 비석을 새기며 지쳐갔던 것입니다. 이 말에 형도 여덟 번째 비석까지는 갔지만, 결국 편한 길을 택합니다. 동생도 형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검붉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피까지 흘리셨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의심한 것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올라 아버지를 만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형은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누구든 무언가를 만들 때 그 안에 땀과 피를 섞습니다. 손흥민 선수도 아무리 축구를 좋아해도 아버지의 고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까지 오를 수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자녀에게 힘을 주려 하는데 자신은 편히 쉬며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뜻은 항상 부모가 자기를 위해 흘리는 피에 대한 ‘감사’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지만, 마음 안에서는 여전히 ‘내가 이렇게 많이 봉헌했는데 주님이 주시는 것은 고작….’ 이라고 불평했습니다. 이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나’가 내 안의 불평 불만인 ‘나’를 죽이기 위해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수난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영적으로 몹시 지쳐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기도실에 들어갔는데 어느 축일을 위해 들여온 성상을 보았습니다.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를 표현한 성상이었습니다. 성녀는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 때문에 그런 상처를 받으신 것에 비해 주님께 아주 조금밖에 보답해 드리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분 앞에 엎드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성녀는 다시는 주님을 거스르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9,1 참조).
민수기에서 뱀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만’이었습니다. 십계명이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믿음의 부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뱀을 보내시고 그 치유 방법으로는 또 다른 뱀이 장대에 달리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함으로써 우리에게 오시는 은총의 선물은 우리 안에 자아라는 뱀에 물린 죄의 독이 눈물로 빠져나와 치유되는 열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천민 아이도 기둥에 들어있는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면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는다면 그 수난 때문에 항상 ‘감사’의 감정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부모는 자녀에게 늘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쏟아붓지만, 자녀가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왜 자녀는 그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느 정신과 의사가 쓴 책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경제적 안정, 신체적 건강, 좋은 관계를 가진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녀에게 주는 선물이 부모 자신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공감 갑니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면 자녀가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느라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부모가 혼자 병원 다니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이면 그만큼 부모 간호하는 데 드는 힘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부모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자녀에게 의존하게 않게 되지요. 실제로 부모에게 자녀가 유일한 ‘베스트 프렌드’가 된다면, 자녀에게 부모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을 멈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늘 거룩한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규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아가 마침내 밤을 몰아내는 빛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진짜 사랑을 알 수 있었고 이로써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입으로만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우리 역시 실천해 나갈 때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참 기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자존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어요(글로리아 게이너).
사진설명: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