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六世 諱 希齊 漢城公 할아버님 이십니다. 公은 正憲大夫 判漢城府事 贈 左贊成 벼슬을 하셨습니다.우왕6년에 태어나시어 八十八歲로 별세 하셨습니다 配位는 南陽洪氏 아버지는 檢參贊 潛(잠) 墓는 양주시 남면 입암리 合葬 舊譜에는 公의 묘가 장단에 있다하고 官啣은 檢參議로 기록하고 있어 믿기 어려웠으나 입암에 살고있는 宗人 元敎가 산소 자리를 구하려다가 구단표를 발견하고 세 조각으로된 비석을 마춰보니 公의 諱와 夫人의 姓貫과 전후 돌아가신 날과 아들의 이름이 자세히 刻字되어 있어 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구보의 墓山 職啣이 誤傳임이 분명하여 제 종인과 상의하여 통고하고 改竪石에 舊表大少字를 다시새겨 옮기고 부인의 享年八十 아래 한자가 빠져 알수없고 舊譜에 贈贊成도 左右가 분명치 못합니다. 孫子이신 領議政 諱 弼商의 貴로 議政府左贊成에 증직 되셨습니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셨으니 諱 坰 白川郡守 贈領議政 諱 垠 參議 贈右議政 諱 增 副使 諱 培 掌令 贈都承旨 諱 壎 牧使郡事參議掌令. --------------------------------------------------------------------------- 한성공 묘소 전경1
한성공 묘소 전경2
비문 표석(본 비석)
비문 표석(후 비석)
*漢城公墓表 公의 名은 希齊니 坡平人이요 夫人은 南陽洪氏라 丙戌에 夫人이 逝하니 享年 八十'缺'이요 丁亥에 公이 又逝하니 享年 八十八이니 合葬于 積城 笠巖山하고 五子는 坰. 垠. 增. 培. 壎이니 嗚呼라 此乃 積城縣 笠巖山에 我先祖 判漢城府事府君과 貞夫人 南陽洪氏 合葬之墓也-라 舊譜에 以爲墓在 長湍하고 官啣은 又以 檢參議로 書之而俱未有考信矣러니 去年 冬에 漣이 居宗人 元敎가 因求山이라가 適到墓下하니 舊有短表하야 今折爲三段而合而看之則刻畵이 幸無傷剝하야 府君 諱字와 夫人 姓貫과 前後卒年과 子行名次가 一一詳載하야 無少疑晦하니 未知舊譜의 墓山職啣이 何以 誤傳至此也오 諸宗人이 相與謀하고 通告中外하야 後孫이 改竪石而舊表大小字를 一依前刻하야 移之로되 獨夫人의 享年下 一字缺을 更無可考之處하고 且舊譜에 書贈贊成而未知其左右요 平日言行事蹟은 又無由尋考하니 此爲後裔無窮之恨也-라 子 坰은 郡事 贈領議政이요 垠은 參議 贈右議政이요 增은 副使요 培는 掌令 贈都承旨요 壎은 牧使郡事參議掌令이라 三房下子孫이 至今十餘世에 冠冕이 不絶하니 此豈非積善餘慶之所及耶아 玆庸附錄於舊記之下하야 以資憑信云이라 十世孫 吏曹參判 趾仁 謹識 公이 辛禑庚申에 生하야 以勳蔭進하고 丁亥間에除提이 監務하다 太宗己丑 十月에 坐仲父原平君獄하야 與伯氏護軍公으로 奪職被流러니 庚寅에 伯氏는 移海珍하고 公은 移光州라가 後宥歸하야 間歷工曹參議와 檢判漢城府事하다 丁亥에 卒하니 後以孫 領議政 弼商 貴로 贈議政府左贊成하다 한성공 신도비 전경
신도비 전면
*漢城公 神道碑銘 高麗黎明 직전 新羅末期에 松嶽山과 彌羅山 기슭에서 一大精氣 탄 人脈이 솟았으니 王道의 瑞氣와 名門의 發祥이 共榮의 꿈을 서려 움트기 시작했다 人類의 삶은 桓雄과 檀君의 어지신 聖敎로 極東에서 仁慈之道의 어질고 착한 人倫調和 속에서 漸進人間本然의 유(水+兪)色진 王覇紛爭時代로 접어들 무렵 於焉 新羅의 國運 또한 否塞하여 새로운 局面으로 進入해 들어갈때가 松嶽山人 王建의 創業初다 松嶽山밑 高麗 松都近境에 坡州 坡平縣 坡平山이 있다 이 山이 곧 彌羅山이다 이 山 밑에서 큰 英傑이 나셨으니 諱는 莘達이요 王建太祖를 도와 三韓을 統合한 高麗建國의 魁偉將軍으로 統合三韓翊贊功臣이시니 이가 곧 百萬人의 鼻祖인 坡平尹氏祖上이다 陽谷 蘇世讓은 大提學으로 계실때 坡平尹氏己亥譜序文을 지었는데그 글속에 吾東邦氏族之貴者咸以坡平尹爲第一尹之始祖라 하고 凡幾百載而勳名將相繼繼承承聯芳趾美奕世冠冕是豈王謝崔盧之可此也라 하고 尹氏者自高麗初殆將數十世而簪紳相望益大이니 宜爲釐爲卷축(車+丑)刻諸金石以壽其傳而라는 濟世文章 이었으니 아무리 讚辭한들 이 글에 미칠 수 있겠는가 氏族의 繁榮과 高貴함이 이보다 더 할 수는 없다 彌羅山 精氣다 三韓功臣坡平 尹莘達의 玄孫인 尹瓘은 世紀의 巨星으로 十二世紀初에 누구도 豫測 못할 高麗 運命을 건진 名將으로 君臣 渾然一體 合力하여 養兵 先制攻擊으로 北方 五千餘方里를 席捲統治하여 오늘날 關北의 吾有와 東滿州一帶의 進出이 可能케 되었으니 一門의 人材가 아니라 東邦人 모두가 追慕할 韓民族의 巨星이시다 그뿐이랴 그 아드님 彦이는 妙淸騷亂 鎭壓에 有功하여 柱國賜 紫金魚袋 諡號 文康하시고 또 그의 아드님 鱗瞻은 趙位寵 叛亂을 討伐鎭壓하시고 諡號를 文定이라 하셨으니 文肅 文康 文定 三世에 亘하면서 國家禍亂을 克服시킨 壯하신 忠은 일찍이 없었다 큰 人脈을 나으신 坡平山에서 좀 떨어진 坡州 積城縣에 笠巖山이 있다 積城땅은 長湍縣에 屬해 있을때도 있었다 이 笠巖山 기슭에 唯有大塚하니 이는 判漢城府事府君 坡平人 尹希齊之墓라 文康公 尹彦이의 十世孫이시다 公은 高麗末期 세상이 어지러워질 무렵 禑王 六年庚申에 나셔서 入李朝하여 世祖 十三年丁亥에 逝去하셨으니 그 壽가 八十八이시다 그 父親은 佐命功臣 坡平君 諱 坤이시며 拜參贊吏曹判書 諡號가 昭靖公이시다 그의 祖父는 高麗末 恭愍王을 도와 鷹揚軍上護軍 兼 軍簿典書때에 妖僧辛旽의 專恣함이 日甚하여도 朝廷側이 莫敢言이라 公께서 뜻을 같이한 重臣들과 議誅 奸兇 辛旽의 上疏에 非僧非俗의 亂政亡國危急存亡之秋라고 하신 憂國衷情을 기려 輸忠亮節輔理功臣號를 받았다 또 湖南에 猖獗한 倭賊을 掃蕩한 麗末의 義士이시니 王佐世儒名門으로 諱 承順 諡號는 忠簡公이시다 나라에 大功을 세우신 世世名人집의 後裔이며 麗末鮮初八代王朝를 亘하신 公의 榮貴가 晉王謝에 比할바라 한 譜書撰文 그후의 子孫들의 繁榮은 唐崔盧집에 凌駕할 若跨歷數世而榮于邦家功在社稷則亦蔑蔑乎無聞焉吾東方氏族之貴者라 한 己亥譜書의 名文章인 蘇陽谷의 말씀 外 또 무슨할 말이 있겠는가 高麗巨族은 勿論 朝鮮朝名閥로 押世한 裔孫들의 貴가 오직 瑞氣 자욱한 坡平山의 神佑라 아니할 수 없다 그 孫에 忠景公 師路는 世宗朝 貞顯翁主의府君駙馬이시다 駙馬都尉께서는 祖父生存時에 歿하였으나 그 五世孫에 松巖 儼에 이르러 文科 松巖의 三子 苔扇 民獻 有學行으로 文科 苔扇의 子 無谷 絳 文科 無谷의子 趾美 趾善 趾完 趾仁 四兄弟 皆大科요 杜浦 東山은 左右相이니 四代直系만 七文科에 兩相의 榮達은 古今稀罕한 貴이다 또 曾孫에 平窩 倬은 오늘의 成均館大學校뜰앞의 銀杏나무를 심으신 어른으로 大科後 同知成均館事로 人材養成에 平生을 바쳤으며 그의孫 暾이 魯城 得尹面에 定着하여 德을 심어 그의孫 雪峰 燧 八松 煌 後村 전(火+全) 모두 大科에 及했을뿐아니라 八松의 子 魯西 宣擧孫 明齋 拯 三代가 儒敎性理學名閥로 明齋께서는 國王이 儒林尊道德하니 小子 亦嘗欽이라 하고 平生不識面으로 右議政을 除授한 世稱 白依政丞이라 한다 魯宗派는 累先代尋墓의 탄誠이 있는 孝門으로 國內 손꼽히는 文閥이다 天機는 속일 수 없다 공교롭게 漢城公 墓表와 神道碑銘撰者 皆兩門所出이니 奇異한 일이로다 趾仁撰 墓表刻石 그대로 이 神道碑銘에 다음과 같이 옮긴다 尋墓前 墓碣前面에 正憲大夫 判漢城府事 尹公 貞夫人 洪氏合葬之墓라 있었고 陰刻에 公名 希齊 坡平人 夫人 南陽洪氏 丙戌 夫人逝 享年 八十'缺'丁亥 公又逝 享年 八十八 合葬于 積城 笠巖山 子 坰. 垠. 增. 培. 壎이라 있었다 趾仁 撰 墓文에는 嗚呼此及積城縣笠巖山我先祖判漢城府事府君貞夫人南陽洪氏合葬之墓也舊譜以爲墓在長湍官啣又以檢參議書之而俱未有考信矣去年冬漣川居宗人元敎因求山適到墓下舊有短表今折爲三段而合而看之則刻書幸無傷剝府君諱字夫人姓貫前後卒年子行名次一一詳載無少疑晦未知舊譜墓山職啣何以誤傳至此也諸宗人相與謀通告中外後孫改竪石而舊表大小字一依前刻移之獨夫人享年下一字缺更無可考之處且舊譜書贈贊成而未知其左右平日言行事蹟又無由尋考此爲後裔無窮之恨也 子 坰 郡事 贈領議政 垠 參議 贈右議政 增 副使 培 掌令 贈都承旨 壎 牧使郡事參議掌令 三房下 子孫至今十餘世冠冕不絶此豈非積善餘慶之所及耶玆庸附錄於舊記之下以資憑信云崇禎後八十五年 壬辰에 改立하노라 嗚呼痛栽라 人心의奕變을 孫犯于墳上之禍와昨今의世態는 善不進인 仁道逆行의 窘塞한 處地에 있어 悚懼함이 莫重함을 俱不能載이다 麗末의 混亂과 鮮初의官紀肅正 때문에 公의 平日의 言行과 事蹟의 傳함이 없고 다만 權陽村의 撰 公의 外祖父 柳高興伯碑文에 提州監務와 孫 師路碑文에 檢判漢城府事로 계셨던 것과 孫 師殷碑文에 贈議政府 左贊成으로 되어있는 記錄外 없으니 子孫의 無窮한 恨이 된다는 尋墓改竪時 撰 趾仁의 墓文을 敎訓삼아서 公의 事蹟 言及은 하지아니하는 것이 道理니라 다만 公께서는 麗末 名門巨族에서 태어나셔서 또한 子孫들의 榮貴를 몸소 만드신 그 어버이의 쌓인 功은 마침내 海東朝鮮大閥族을 이룩하셨다 八八高齡 內外偕老之榮과 目見하신 그 福祿이 晉王謝나 唐崔盧가 이에 比할 수 없다 마침 裔孫 碩住가 탄誠神道竪碑請文에 感應閉門 述碑銘이 떳떳함을 느끼며 墓前에 痛哭하면서 이글 남겨 公의 冥福을 빌 따름이다 檀紀四千三百二十一年 戊辰 十月 七日 *상식: 조선조 동반관아 관직에 한성부의 최고직이 판윤인데, 부사라고 했으니 이해를 못하는 후손이 있을까 해서 쓴다. 조선 태조3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한양부라하고 최고직을 판한양부사라 칭하다가 다음해 한성부로 개칭하고 그 최고책임자도 판한성부사라 칭하였다. 그후 세조12년에 최고직을 판윤이라하고 그 아래에 좌윤 우윤등을 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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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두가 알아야할 것을 알려 주어서 감사하네
시간 되시는 후손들은 이날 많은 참석을 바래 보는데
그래서 조용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또 기쁜 맘으로 함께
묘제에 참석해서 즐검을 나누었음 하는 맘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