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은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정부 당시 발표된 헌장이다.
기초 위원 26명과 심사 위원 48명이 모여서 초안 작성 후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헌장으로, 박정희 정권 때 새마을운동 만큼 많이 보급된 것들 중 하나. 내용은 철학자 박종홍과 철학자이자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이 주도하여 작성되었다. 5차 교육과정 때까지는 교과서 앞 부분에 가장 먼저 인쇄되어 나왔으며 각급 학생은 물론 노동자, 공무원, 군인, 경찰 등을 막론하고 외워야 했다. 당연히 교육 과정 고시문에도 가장 앞에 위치했다.
국민교육헌장 전문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사실 내용 자체는 대체로 좋은 말이고 시대상을 고려해볼 때 의외로 지나친 국가주의 사상을 강요하다시피하는 문구는 없기 때문에 한 번쯤 읽어보는 정도로 끝났으면 별 문제가 안 됐을 것이다. 문제는 전 국민에게 암기를 강요하다시피 했던 것.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는 학생에겐 일반적으로 선생들의 매질이 더해졌고, 사원이나 공무원의 경우 상사들에게 한 소리 듣거나 징계 조치를 당했으며 군인의 경우에는 혹독한 기합을 받았다. 당연히 실랑이도 자주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노래로 만들어져 음반으로 판매된 바 있었다. 이렇게 강제 암송이 이뤄졌기 때문에 1970~80년대에 학생 시절을 보낸 중장년 층에서는 지금도 이 전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내용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해도 처음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정도는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이 헌장 자체가 메이지 유신 때 발표된 군국주의, 국가주의적 내용의 헌장인 교육칙어(혹은 교육에 관한 칙어)와 비슷하다는 지적이나 극단적인 민족주의만 더해주고 도움은 안 되는 내용이라는 비판이 있긴 했는데, 당연히 그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전면적인 비판은 못했다.
우리의 교육지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한마디로 인간다운 사회는 아직도 우리 현실에서는 한갓 꿈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바로 알고 그것을 개선할 힘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을 교육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역시 이 사회에서는 우리 교육자들의 꿈에 머물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마구 누르고 자손 대대로 물려줄 강산을 돈을 위해 함부로 오염시키는 풍조가 만연한 가운데,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존중하는 교육은 나날이 찾아보기 어려워져 가고 있다. 무상 의무교육은 빈말에 그치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도 과밀 교실과 이기적 경쟁으로 몸과 마음을 동시에 해치고 있으며 재수생 문제와 청소년 범죄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된지 오래다. 그리고 온갖 시련과 경쟁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는 진실이 외면되기가 일쑤요 소중한 인재가 빈번이 희생되고 교육적 양심이 위축되는 등 안타까운 수난을 거듭하고 있다.
대학인으로서 우리의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 볼 때 오늘의 교육의 실패는 교육계 안팎의 모든 국민으로하여금 자발적인 일치를 이룩할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에 우리 교육이 뿌리박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바로 그러한 실패를 집약하는 본보기인바, 행정부의 독단적 추진에 의한 제정 경위 및 선포 절차 자체가 민주 교육의 근본 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형태의 애국, 애족 교육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지난날의 세계 역사 속에서 한때 흥하는 듯하다가 망해버린 국가주의 교육 사상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부국강병과 낡은 권위주의 문화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찾는 것은 잘못이며 민주주의에 굳건히 바탕을 두지 않은 민족중흥의 구호는 전체주의와 복고주의의 도구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또한 능률과 실질을 숭상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와 권력순응을 조장하고 정의로운 인간과 사회를 위한 용기를 소홀히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민주주의 교육이 선행되지 않는 애국 애족 교육은 진정한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실천이 결핍된 채 반공만을 앞세운 나라는 다 공산주의 앞에 패배한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땅에 인간다운 사회를 실현하고자하는 우리는 격동하는 국내외의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슬기롭게 생각하고 용기있게 행동할 사명을 띠고 있다. 이에 우리 교육자들은 각자가 현재 처한 위치의 차이나 기타 인생관, 교육관, 시국관의 차이를 초월하여 다음과 같은 우리의 교육지표에 합의하고 그 실천을 다짐한다.
1.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교육의 참 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
2.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첫걸음으로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적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배워야한다.
3.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며 그러한 갑섭에 따른 대학인의 희생에 항의한다. 특히 구속 학생의 석방과 제적 학생의 복적을 위해 우선적으로 노력한다.
4. 3.1 정신과 4.19 정신을 충실히 계승 전파하며 겨레의 숙원인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한 민족 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한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수 일동
김두진, 김정수, 김현곤
명노근, 배영남, 송기숙
안진오, 이방기, 이석인
이홍길, 홍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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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비판한 적은 있었는데, 바로 구속 수감 조치되었다. 1978년 6월 27일 당시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의 교수들이 교육 민주화를 주장하는 '우리의 교육지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이를 지지해서 일어난 6월 29일 학생들의 시위를 말한다. 성명서 발표 직후 교수 11명 전원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29일 교수들의 석방과 민주화를 외치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관련 교수들은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 또는 전원 해직됐으며 학생들 또한 30여 명이 구속되고 제적·정학을 당했다. 성명서는 당초 전국의 교수들이 참여키로 계획됐으나 사전 발각 조짐이 감지되면서 전남대학교 교수 11명만의 서명으로 AP통신과 아사히 신문 등 국내외 언론에 공개됐다. 덤으로 "왜 충만 강조하고 효(孝)는 없느냐" 라고 문제 제기한 교사도 있었는데 역시 구속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 6.29 선언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각급학교에서의 국민교육헌장 강제 낭독이 점차 사라졌고, 1988년 10월 24일에 김형식 문교부 장관이 "국민교육헌장이 국가주의를 우선하고 기능과 능률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고 하여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중앙교육심의회에 심의를 의뢰하고 국민교육헌장 공식 폐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폐지론이 점차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후 문민정부 시기인 1993년 12월 4일부터 오병문 교육부 장관이 국민교육헌장 폐지에 대해 다시 검토한 뒤 여론 조사와 연구를 거쳐 1994년 11월부터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삭제하고 국민교육헌장 선포 기념식 역시 1993년에 열린 제25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교육부는 1995년 들어 국민교육헌장의 공식적 폐지에 대해 헌장의 기능이 이미 소멸되었으므로 폐지를 유보했다. 이후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 11월 28일부터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대통령령 규정’ 개정에 따른 기념일 정리 작업의 일환으로 국민교육헌장 선포 기념일이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실 뭐 국경일도 아니었고 공휴일도 아니었으니 별로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지만... 여담으로 12월 5일은 2012년 이후부터는 무역의 날이 되었다.
국민교육헌장 발표일인 12월 5일을 국민교육헌장선포기념일로 제정해서 암송대회 같은 게 열리기도 했다. 1973년 정부의 서정쇄신정책으로 각종기념일을 27개만 남기고 다 취소했을 때 교육관련 기념일은 국민교육헌장선포기념일 하나만 기념하도록 했고, 이 때문에 RCY에서 1958년 처음으로 시작하고 1964년에는 5월 26일, 1965년부터는 5월 15일로 확정된 스승의 날이 학교 현장에서 사라졌다. 이후 전두환 정권 때 부활하면서 1982년이 제1회 스승의 날이 되었지만, 청소년적십자에서는 1964년을 제1회 스승의 날로 기념한다.
전두환 정권 시기부터 국민정신 교육이 강화되면서 특히 각급학교의 도덕, 국민윤리, 국사, 사회과 교과서 개편 작업이 진행되었고, ‘문교행정’, ‘국민윤리교육소식’, ‘국기·국가·국가원수에 대한 예절’, ‘기본생활습관지도자료’, ‘국어순화자료’ 등의 교육 자료가 제작 보급되었고, 교육 공무원에 대한 이념 교육 등이 강화되었다.
폐지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흔적은 남아있다. 오래 된 초등학교에서 화단 한 편을 장식하고 있는 이순신 동상이나 책 읽는 소녀 동상 사이에 뭔가 빼곡히 적힌 바위나 콘크리트 비석 따위가 있다면, 열에 아홉은 국민교육헌장을 새긴 물건이다.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은 세대는 이게 뭔지 나이가 들어서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어릴 적에 장난치는 곳이나 장식용 돌덩이 정도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201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각급학교에서 모범교원을 표창할 때, 스승의 날과 12월 5일 두 번 표창했다. 국민교육헌정선포기념일에 정부의 말을 잘 듣는모범교원을 표창하던 것을 전두환 정권 때 스승의 날이 부활한 뒤에는 한 해에 두 번(스승의 날과 국민교육헌장선포기념일) 표창했고 이것이 기념일이 폐지된 뒤에도 계속 된 것. 이제 교육 현장에서 아무 의미도 없어진 12월 5일에 모범교원을 표창하는 것 또한 국민교육헌장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2020년대 들어서는 확실히 스승의 날 한 번만 하는 듯.
북한에는 국민교육헌장의 강화판인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 있다.
이승만 정부 시절이던 1949년부터 제정된 <우리의 맹서>가 있어 국민교육헌장 비슷한 기능을 했다. 당시 내용은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라고 세 줄로 구성되어 1960년까지 초중고 교과서에 의무 수록되었다.
영어 교과서에는 영역 버전으로 수록되었다. 번역은 시사영어사가 담당했다.
모 걸그룹 멤버가 국민학생 시절 이걸 외워봤다고 한다.
유시민이 JTBC에서 진행한 토론회에서 국정교과서에 대해 비판할 때 국민교육헌장 중 첫 번째 줄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를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난 거다" 라는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