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를 그려줄게 (외 1편)
장선희 못 본 지 꽤 됐지? 그 말엔 반짝이풀 다정이 묻어있다 카드를 꾸미던 끈끈한 점성으로 널 기다려, 턱을 괴고서 이곳은 창고형 카페, 창고의 탈피가 카페라면 네가 꿈꾼 탈피는 어느 지점일까 핀에 꽂힌 채 서서히 말라가던 나비의 날개, 너는 변하고 싶다 했지 속을 뒤집을 수 없다면 44사이즈에서 77사이즈로 변하는 건 대수롭지 않다며, 외투 입은 마네킹이 여전히 추워 보였어 시간의 지층 속 우린 정자 바다에 멈춰있고 한 발자국 물러섬도 서성임도 없이, 가족 해체가 생겼을 때도 아이가 뱃속에서 죽었을 때도 소리 내어 울 곳은 집과 멀어야 했지 마른 풀씨가 뿌리내릴 곳을 찾았던 거야
널 그곳에 두고 이른 봄의 부추처럼 하늘을 간질여 놓길 바랐어 어둑해지는 검은 바위 주변으로 하얀 파도가 휘감고 있어 무서움일까 아름다움일까? 바다에서 늘 벌어지는 광경이 누군가에겐 인상적 장면이 되기도 하지 상실에도 가치란 게 있겠지? 창고는 잡동사니를 버리지도 쓰지도 않으면서 쌓아두는 곳, 카페로 바뀌면서 버려졌을 잡동사니의 마지막 그곳은 또 어디였을까 거미줄부터 걷어내자 창문도 활짝 열자 대걸레가 있으면 더 좋겠지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인 먼지에는 증발되지 못한 결핍도 있을 거야 손 걷어붙이고 아침부터 수평선까지 3월에서 천장까지 먼지를 털어줄게 얼굴이 둥글어진단 건, 거칠었던 마음이 풀밭이 되고 있단 거니까 너의 가슴 위에 뛰놀, 양 떼 한 쌍 그려줄게
소파 너는 지루한 비만이다 건기의 첫 페이지가 끝 페이지로 엎어져 있고 햇살이 가재걸음으로 지나간다 발자국에 묻어있는 밀림은 막다른 길이고 위로만 솟구침이고 수직을 몰고 가는 건 초록 새끼 도마뱀의 꼬리, 햇빛 피할 물속이 필요하겠지 두꺼운 피부는 마르고 상처가 키운 주먹 겅중겅중 목도리도마뱀이 지나가고 오독 같은 독충이 사냥총 같은 침을 내뿜는다 진흙 목욕도 좋아 물속 점프도 좋아, 강이 범람하고 송곳니를 등 뒤로 휘둘러 썩은 풀과 나무 가득한 흙탕물을 일으키는 너의 종족은 공격성을 풀에게 전하는 무리, 풀을 먹을 땐 아주 천천히 꼭꼭 씹어먹어야 하지 대충이란 건 없지 너는 여름에도 무릎 담요가 필요하고 죽고 죽이는 건 죄가 아니다 둔중한 몸의 뒤뚱뒤뚱이지만 물속 너는 우아하지 너의 밀림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영역, 한쪽 엉덩이가 아프다 이건 소파가 아니다 아래턱 힘이 강한 하마 이야기다 다리가 짧은 넌, 내 엉덩일 이빨로 파고든다 말처럼 달리고 싶었을까, 두 눈 커다랗게 뜬 채 누런 강물 속을 떠다니는 짧은 다리, 강한 햇살에 조금씩 잘려 나가 살아남은 소파는 하마의 궁뎅이, 빠르게 일어선다 ―사이버문학광장 《문장웹진-콤마》 2024-08-28 ---------------------- 장선희 / 1964년 경남 마산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2년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으로등단. 2020년 시집 『크리스털 사막』 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