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며 사과해야 했던 일들이 몇 번 있었다. 이번에 하게 된 사과는 필자의 인생에서 가장 유쾌한 사과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이런 사과문을 쓰는 일은 즐거울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글자 그대로 사과다. 어쩌면 사과라기보다는 '인정' 내지 '항복'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지난 주 ESPN의 < Football Focus에서는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을 앞두고 경기 결과를 예측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아스날이 산 시로에서 어떤 결과를 낼 것인지 예상을 내놓을 차례가 되자 녹화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AC밀란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우리 프로그램의 전문가 패널 모두가 경기 결과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 어림 없어요! " 홈에서 무득점 무승부를 기록한 아스날이 노련한 디펜딩 챔피언을 상대로 원정에서 상대 문전을 가르고 무실점을 유지할 수 있을지 물어볼 때마다 전문가 패널들이 코웃음을 치며 내놓은 답변이었다. 이들은 아스날이 필립 센데로스를 기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센데로스가 이 경기에 나서게 되면 아스날의 8강 진출 가능성은 불확실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독자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결국 이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아르센 벵거의 팀은 전체 유럽대항전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경기력 중 하나로 꼽힐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2차전 동안 아스날의 수비진은 카카와 파투, 그리고 인자기를 무득점으로 막아냈다. (센데로스는 1차전에서는 전반 7분만에 투레를 대신해 교체 투입되었고 2차전에서는 선발로 나서 풀타임을 소화했다. 1,2차전 모두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UEFA측에서 경기가 끝난 후 내놓은 통계를 보면 아스날이 원정 경기에서 55%라는 놀라운 수치의 볼 점유율을 기록했다는 것. 그리고 인터밀란을 상대로 같은 구장에서 다섯 골을 터뜨렸던 당시의 아스날과 동급으로 놓을 수 있을 만큼 꽤 괜찮은 기회 대비 득점 성공률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결과는 티에리 앙리가 팀의 중심이었던 시절 쥐세페 메아짜에서 5-1로 승리한 것보다 더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경기 승리를 통해 이번 대회 아스날의 꿈을 좌절시킬 수도 있었던 팀 하나를 탈락시켜 버렸다는 것에서 첫 번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이제 우리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꿈꾸지 말아야할 이유가 있습니까? " 경기 종료 후 인터뷰에서 벵거가 한 말이다.
게다가 엠마누엘 아데바요르가 자신이 진정으로 수비수들에게 까다로운 상대임을 입증했고, 경기 최우수선수를 차지한 알렉산더 흘렙이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자를 무색케 한 4-4-1-1 포메이션은 마치 어느 상대에게든 통용되는 공식 같았다. 아데바요르는 원톱으로 상대 수비진을 90분 내내 갖가지 방법으로 괴롭히며 공간을 열어주었고 결국 AC밀란을 상대로 챔피언스리그 첫 골을 기록하는 기쁨을 만끽했다. 흘렙은 아데바요르의 아래에 위치해 공격과 수비의 시발점으로 필드 전체를 누비고 다녔다.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 마티유 플라미니와 세스크 파브레가스 또한 환상적이었다. 플라미니는 이번 시즌 내내 꾸준히 보여준 자신의 뛰어난 경기력을 이 경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고, 부상에서 복귀한 후 부진해 보이던 파브레가스는 시즌의 중요한 길목에서 자신의 능력을 다시금 발산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그리고 AC밀란까지. 이번 시즌 파브레가스가 득점에 성공한 팀들이다. 이들의 활약에 AC밀란이 자랑하던 미드필드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아스날은 산 시로 원정 승리로 강하게 탄력을 받았고 자국 리그에서도 그 기세를 이어나가고자 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필자는 '아스날이 현재 노리고 있는 두 개의 트로피 중 하나라도 획득할 가능성이 있는지' 지난번 출연한 우리 프로그램의 패널들에게 물어볼 것이다.
아마도 전문가 패널들은 계속해서 강한 부정을 표할 것이다. 추측컨대 대학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제이미 리브스만이 " 현실이 변한다면 생각을 바꿀 것이다. " 라는 저명한 경제학자 존 케인스의 말을 따를 것이다.
달라진 상황을 감안하여 의견을 바꾸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 없다. 독자 여러분이나 많은 축구팬들, 그리고 모든 아스날팬들에게 한 말씀 드리자면 사실 현실은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다.
아스날은 이번 시즌 몇몇 경기에서 무너진 것을 제외하고는 승승장구하며 꽤나 비평가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식상한 선심성 멘트가 나오게 되었다. " 우리는 아스날의 플레이 방식을 정말 사랑합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하지만 그들은 이번 시즌 그 어떤 트로피도 들어 올리지 못할 겁니다. "
아스날에 대해 부정적인 이들을 변호하자면, 이번 시즌 지금까지의 아스날을 승리자로 만든 요인은 팀의 매력적인 축구와 무언가 진정 특별한 '잠재성'이 존재한다는 믿음의 조화라고 말할 수 있다. " 잠재성 갖고는 트로피 진열장을 제대로 채울 수 없다. " 전문가들의 말이다. 아스날에 대해 부정적인 이들이 갖고 있는 생각의 바탕이 이렇다. 아스날의 잠재성이 타이틀을 가져다 줄만큼 발현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난주 아스날이 보여준 놀라온 경기력을 가능케 한 것인가? 이들의 잠재성은 어떻게 발현된 것인가? 아르센 벵거는 이렇게 암시를 남겼다. " … 제게 또 다른 만족감을 준 것은 팀이 정말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감독들은 어느 순간 팀이 한 단계 더 올라서는 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기에서 그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죠. 이 결과가 팀 내의 믿음을 강화시키길 바랍니다. 믿음과 겸양 사이의 균형을 맞추며 이 믿음이라는 것을 시즌을 헤쳐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고 싶습니다. 팀을 꾸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죠. "
이번 시즌 아스날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냈던 이들 모두가 아마도 이번 일을 통해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또 한 번 필자가 단골처럼 이용하는 케인스의 말을 인용해보겠다. " 다음 중 어떤 것이 사람을 더 보수적으로 만드는가? 현재 이외의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는 것 아니면 과거 이외의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는 것. "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아스날은 '가까운 과거'에 충분히 잘 해왔으며, 화요일 밤 산 시로에서의 정신이 그들의 '현재'에 불을 붙였다.
아스날의 미래는 밝다. 남은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하늘의 뜻이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저버릴지라도 상관없다. 필자가 보기에 이미 아스날은 이번 시즌 어느 부문에서만큼은 승자가 되었다. 밀란의 한 시대가 흘러갔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비평가들로부터도 승리를 거두었으니 말이다.
미안하다, 아스날. 하지만 그대들은 예전에도 멋진 팀이었고 지금도 멋진 팀이다.
[풋볼위클리 48호(08/03/17-08/04/06)에 게재된 글입니다.]
풋볼위클리 편집위원/ESPN STAR SPORTS 존 다익스
번역 - 김민곤
사진 ⓒAFP/멀티비츠
http://sports.media.daum.net/nms/worldsoccer/news/general/view.do?cate=23772&type=&newsid=325758&cp=footballweekly
첫댓글 아스날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