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義士). 담대하게도 혈혈단신 혼자의 몸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작은 밀알이 되겠다며 적국(敵國)의 심장부 일본 동경으로 날아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져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의인(義人)이다.
오늘(1.8)은 이봉창 의사 의거 86주년이 되는 날. 의사의 의거 86주기를 맞아 의사의 묘(墓)역이 있는 서울 효창공원 내 백범 기념관에서 의거 일을 기념하는『제86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이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과 광복회, 시민, 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나라위해 순국한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기자에게 있어 이봉창 의사를 떠올리면 불쑥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이수현(당시 나이 26)군이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으로 퇴근 길 한 일본인 취객이 실수로 지하철 선로에 떨어지자 지체치 않고 뛰어 들었다가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사망한 의로운 한국인이다. 시일이 흐름에 때로 그 이름이 잊혀 질 때도 있지만 잠시 머리를 가다듬으면 곧바로 떠올리게 되는 이름이다.
시대적으로 이봉창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게 1932년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가 강제 을제늑약에 의한 외교권을 빼앗은 시점으로부터 27년이 지나 그 혹독함이 절정을 달하는 무렵이고, 이수현 학생이 지하철에서 일본인을 구하다 절명한 것은 의사의 의거로부터 69년이 지난 2001년이었으니 반백년이 훨씬 지난 시점임에도 거사(巨事)로 중첩됨은 그 중심에 일본, 일본인이라는 대상이기 때문 아닌가 해진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8일 동경 경시청 앞에서 거행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현장으로 잠입해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일왕의 운수가 거기서 끝나는 날이 아니었던 지 폭탄은 일본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서 폭발해 일장기기수(日章旗旗手)와 근위병(近衛兵)이 탄 말 두 필만을 거꾸러뜨리는데 그쳐, 일왕 폭살계획은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현장에서 체포된 의사는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 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교수형)하였다. 당시 의사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그에 앞서 李 의사는 거사 전인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맹세 글에서 이렇게 자신의 결의를 다졌다.
『나는 赤誠(적성)으로써 祖國(조국)의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回復(회복)하기 爲(위)하야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의 一員(일원)이 되야 敵國(적국)의 首魁(수괴)를 屠戮(도륙)하기로 盟誓(맹서)하나이다』<大韓民國 十三年 十二月 十三日 宣誓人韓 李奉昌 韓人愛國團 앞>
이봉창 의사가 두터운 천위에 붓으로 써 내려간 국한문혼용체 선서문이다. 빼앗긴 나라의 현실을 감내한 채 울분만을 토로하는 나약한 젊은이의 모습이 아니다. 비록 나라는 빼앗긴 상태지만 적성(赤誠 : 참된 정성)으로 일제식민통치하 국권을 빼앗은 적국의 최고 통치자를 자신의 힘으로 제거하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정신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1자의 짧은 글귀지만 담겨진 의미는 장대하고 웅대하다. 자신을 바쳐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되찾겠다는 절절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또 이 의사가 독립운동 투신을 위해 상해에 와서 한 말이 이렇게 전하기도 한다.
“제 나이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하여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의사가 서른 한해의 짧은 생애에서도 그가 겪은 삶의 체험을 ‘쾌락’이란 말로 표현함은 아무리 좋은 일, 하고 싶은 행동들을 다 취했다 한들 조국의 독립보다 더 큰 쾌락은 없다는 것이며, 그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그 자체가 바로 ‘영원한 삶’, 즉 ‘영원한 쾌락’에의 길임을 깨우치고자 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의사의 의거는 외국에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보이는 중요한 사건이 됐고,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5억 인구가 못한 일을 1명의 조선인 청년이 해냈다고 칭송했다.
그의 의거는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 투쟁의 선봉으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전선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가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만보산(萬寶山) 사건 이래 한ㆍ중 간 감정 대립도 씻는 계기가 되었다. 효창공원에는 이준열사, 백정기 의사와 함께 李의사 등 3의사의 묘가 나란히 위치하고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의인(義人) 이수현군은 그가 사망한지 18년이 지난 오늘에도 한국과 일본에서 의인으로 오르내린다. 당시 한일 양국에서도 떠들썩한 사건이었음을 기억한다. 2001년 1월 26일 재일본 유학생으로 아르바이트 후 귀가하던 이 군은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취객이 반대편 선로에 추락한 것을 목격하고 구조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때마침 선로로 들어오는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가깝고도 멀기만 한 양국 관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도쿄 신오쿠보역 에는 이 군을 기리는 추모의 글이 새겨진 기념물이 있고 지금도 장학사업 등 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매년 펼쳐지고 있다.
서로 시대를 달리한 시기에 한 분은 침략의 주역인 일왕을 제거하려다 실패해 침략국인 일본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아 순국하고, 한 젊은이는 영원한 평행선을 긋는 그런 양국의 관계아래서도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은 채 상대국가 국민의 목숨을 구하려고 뛰어들어 고귀한 생을 마감했다.
역설적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두 의인의 삶과 죽음은 각 개의 삶이 아니라 곧 조국을 위한 위대하고 고귀한 삶으로 귀착되지 않나 생각게 된다. 1월1일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을 빛낸 ‘의인’6명과 새해 해맞이를 했다고 한다. 의인들이 더해갈수록 대한민국 품격 또한 높아질 것이다.
기자는 이전 취재차 백범 기념관을 오갈 때면 버릇처럼 한 곳을 찾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 1번 출구 모퉁이에 ‘용산구 효창동 118-1번지는 독립운동가 이봉창(1901~1932)의사가 태어나 살던 곳이다.’로 시작하는 작은 생가터 표지석(서울시 사적(1994.7 제131호)이다. 그럼에도 궁금증이 인다. 진짜 이곳이 진짜 생가 터일까 하고?
李 의사의 의거 86주기에 즈음해 해외 순국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발굴 및 기념관 증개축과 국내 생가 터 복원 등을 거듭 되새기게 되는 오늘이다.(konas)
이현오 / 코나스 편집장. 수필가(holeekva@hanmail.net)